4화 · 4화. 그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
서진의 생일은 원래 조용했다.
윤재가 알기로, 처음부터 그랬다. 처음 만나던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서진은 자기 생일 앞에서 늘 같은 얼굴을 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눈빛은 한 박자 늦게 따라오는. "그냥 날짜잖아, 윤재야." 그렇게 말했다. 마치 달력에서 숫자 하나를 손가락으로 지우듯, 가볍게. 그때 윤재는 처음으로 눈치챘다. 서진이 가장 슬플 때 가장 환하게 웃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웃음을 알아채는 사람이 자기 말고는 없다는 것도—그것이 기쁨인지 두려움인지, 그때는 구분하지 않았다.
저녁 여섯 시. 윤재는 노트북을 덮었다.
편집 스튜디오의 불은 이미 윤재 자리만 켜져 있었다. 지호가 나가면서 문에 기대어 잠깐 서 있다가—뭔가 말하려다 말고, 결국 아무 말 없이 나갔다. 그게 지호식의 "오늘 야근하지 마"였다. 윤재는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 세 시간 더 앉아 있었다. 손이 트랙패드 위에서 멈추고 다시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렌더링 바가 끝까지 차오르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 이런 식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윤재는 늘 손이 먼저였고, 머리는 그 뒤를 따라왔다.
외장하드에 레이블이 붙어 있었다. 유성 매직으로 직접 쓴 글씨.
OSJ_DEMO_2014_raw
파일 이름이 아니라 레이블이었다. 그게 중요했다. 누군가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남긴 것—지워지지 않도록 새긴 것. 윤재가 꺼낸 건 외장하드가 아니라 서진의 기억이었으므로.
처음 그 파일을 발견한 건 석 달 전이었다.
동거를 시작한 지 사 개월째, 서진이 출장을 간 사흘 동안 윤재는 서진의 책상을 처음으로 들여다봤다. 정리라고 하기엔 솔직하지 못한 표현이다. 그냥 봤다. 서진이 쓰는 공간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었다—같이 산다는 것이 물리적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윤재는 알았고, 그래서 서진의 책상 서랍이 궁금했다.
서진은 서랍을 잠그지 않았다. 믿어서가 아니라 숨길 게 없어서—그런 사람이었다. 그 서랍 안에, 악보들 사이에, 낡은 카세트 하나가 있었다.
레이블에 손으로 쓴 글씨: 못 다 한 것들.
그게 다였다. 설명도 날짜도 없었다.
윤재는 그걸 집어 들고 한참 들여다봤다. 플라스틱 케이스가 모서리에서 살짝 갈라져 있었다. 오래된 것이었다. 서진은 그 카세트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건축 이야기는 자주 했다. 아버지 이야기는 가끔 했다. 음악 이야기는—단 한 번도.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를 윤재는 그때 처음으로 형태로 이해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크기의 카세트가, 서진이 평생 닫아둔 방의 열쇠처럼 느껴졌다.
윤재가 그 카세트를 디지털로 변환한 건 다음 날이었다. 아는 사람을 통해서, 조용히.
파일을 처음 열었을 때, 기타 코드 하나가 흘러나왔다. 반주가 들어오기 전, 서진의 목소리가 먼저였다—젊고, 조금 떨리고, 가사가 채워지지 않아 허밍으로만 이어지는. 완성되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노래하는, 그 목소리. 윤재는 그 순간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굳어버렸다.
그게 서진이었다.
윤재가 알고 있는 서진이 아니었다. 말이 생각보다 빠르고, 긴장하면 더 떠들고, "그러니까 내 말은—"으로 자기 자신을 고쳐 쓰는 서진이 아니라.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은 채로 그냥 노래하고 있는, 아직 아무것도 포기하기 전의. 허밍이 끝나는 지점에서 목소리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그 흔들림이 녹음의 결함인지 감정의 결함인지, 윤재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게 더 괴로웠다.
윤재는 그 파일을 석 달 동안 건드리지 않았다. 아니—정확히는 열 수가 없었다. 그 목소리가 지금의 서진과 너무 멀었고, 그 간격이 얼마나 깊은지를 자기가 다 알지 못한다는 게 두려웠다. 알고 싶은 것과 알아버리면 달라지는 것은 다르다. 윤재는 그 선을 서진이 허락하기 전에 먼저 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전, 손이 먼저 움직였다. 편집 프로그램을 열었다.
타임라인이 촘촘했다.
음악 편집이 영상 편집과 다르다는 걸 윤재는 알면서도 덤볐다. 학부 때 영상에 음악을 붙이던 방식 그대로, 거꾸로 음악에 영상을 붙였다. 서진의 허밍이 중심이었다. 그 위에 서진이 찍어둔 오래된 사진들을 얹었다—대학 시절 기타 케이스, 손으로 그린 악보 스케치, 공연 포스터 한 장. 사진들은 서진의 하드디스크 폴더 깊숙이 있었고, 폴더 이름은 그냥 숫자였다. 2014. 서진이 그것들을 지우지 않았다는 게—그것 역시 하나의 말이었다.
말 없이 흐르는 세 분짜리 영상. 제목도 자막도 없었다.
마지막 컷은 지금의 서진이었다. 현관에서 찍은 사진—서진이 모르는 사진. 새벽에 퇴근해 신발을 벗다가 잠깐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는 순간.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 아직 정하지 않은 것들을 안고 있는 얼굴. 그 얼굴이 영상의 마지막 프레임이었다. 허밍이 사라지고 나서 3초쯤 그 얼굴이 남아 있다가 천천히 검어졌다.
렌더링을 걸어두고 윤재는 등받이에 기댔다.
이걸 주는 게 맞는 건가.
물어봐야 하지 않나—그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물어보는 순간, 서진이 "괜찮아, 그냥 옛날 거야"라고 할 게 뻔했다.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그 말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이 영상이 있어야 했다—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방식으로. 서진이 늘 윤재한테 해왔던 것처럼.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그 말이 위로가 아니라 물음처럼 들렸다. 충분한 게 무엇인지. 누구를 위해 충분한 건지. 그리고—충분하다는 말로 자기가 무엇을 막고 있는 건지.
윤재는 USB를 뽑아 주머니에 넣었다. 손이 먼저였다.
아파트에 돌아왔을 때 서진은 이미 와 있었다.
주방에서 뭔가를 끓이고 있었다. 라면이었다. 생일에 라면을 끓이는 남자. 윤재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면서 그 뒷모습을 봤다. 어깨가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피곤한 게 아니라 무언가를 내려놓은 것처럼—그 차이를 윤재는 안다.
"왔어?"
"응."
"밥은?"
"먹었어." 거짓말이었다. 서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아마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냄비를 불에서 내리고 라면 두 그릇을 챙겼다. 말이 없었다. 서진이 말이 없을 때 윤재는 오히려 긴장한다. 말이 빠른 사람이 말을 잃으면, 그 침묵이 두 배 무겁다.
그릇을 식탁에 내려놓으면서 서진이 말했다.
"오늘 선배 만났어."
"차민율 선배?"
서진이 잠깐 멈칫했다. 그릇을 내려놓던 손이 0.5초 늦었다. "어."
윤재가 앉으면서 젓가락을 들었다. "무슨 얘기."
"그러니까—" 서진이 자기 그릇을 내려다봤다. 젓가락을 들지 않고. "아버지 회사 프로젝트 있잖아. 거기 내가 들어가는 거, 선배는 그게 맞는 방향이라고 했어. 직접 말하진 않았는데. 뭐, 뉘앙스로."
차민율.
윤재는 그 이름을 두 번 머릿속에서 굴렸다. 서진과 같은 과 선배. 지금은 같은 업계. 서진 아버지와도 인연이 있다는 얘기를 언제인가 들었다.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서진이 그 이름을 꺼낼 때마다 목소리에 뭔가가 섞인다는 걸—윤재는 놓치지 않았다. 정의하기 어려운 뭔가가.
"선배 말이," 윤재가 젓가락을 내려놓지 않은 채로 말했다. "'맞는 선택'이라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거야."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둘이 달라?"
"달라."
서진이 잠깐 윤재를 봤다. 그 눈빛이—무언가를 꿰뚫으려는 것 같기도 하고, 꿰뚫히는 것 같기도 했다.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건 선배 뉘앙스야," 서진이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선배가 틀린 게 아니라—어, 근데 내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데."
"그럼 어때."
"어떻다는 게."
"네 생각은."
서진이 젓가락으로 라면을 한 번 휘젓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오늘의 서진이었다. 말이 늘 생각보다 빠른 사람이 말을 잃었다—그 침묵이 라면 냄새보다 짙게, 뜨겁게 식탁 위에 앉았다. 윤재는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밀어붙일 수 있는 타이밍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서진이 아직 그 질문을 자기 안에서 굴리고 있다는 걸 알아서.
윤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같이 먹었다.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였고, 어쩌면 그게 맞는 방식이었다. 라면이 천천히 식었다.
설거지를 윤재가 했다. 서진이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걸 등으로 느끼면서. 물소리가 그 침묵을 적당히 채웠다. 윤재는 그릇을 닦으면서 서진이 핸드폰을 내려놓는 소리를 세었다. 세 번째 소리가 났을 때 서진이 말했다.
"윤재."
"응."
"오늘 내 생일인데."
"알아."
"선물 없어?"
물이 잠겼다. 윤재가 행주로 손을 닦으면서 돌아봤다. 서진이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고 윤재를 보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그 웃음이 뭔지 윤재는 이제 안다. 입꼬리가 먼저 올라가고 눈빛이 조금 늦게 따라오는 웃음. 오늘 많이 힘들었구나, 라는 걸.
"있어."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아무 레이블도 없는, 평범한 검정 USB. 손바닥에 올려놓고 서진에게 내밀면서 윤재는 말했다.
"노트북에 꽂아."
서진이 USB를 받아 들고 잠깐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플라스틱 캡을 한 번 만졌다 뗐다. "이게 선물이야?"
"안에 있는 게."
서진이 노트북을 펼쳤다. 꽂는 순간 파일 하나가 자동으로 뜨게 설정해뒀다. 서진이 파일명을 읽었다—파일명은 그냥 날짜였다.
2014.10.09
서진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첫 번째 컷—낡은 기타 케이스 사진. 그 다음—손으로 그린 악보 스케치, 잉크가 번진 곳이 그대로였다. 그리고 서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허밍이었다. 가사가 없었다. 반주도 불완전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서진의 손가락이 멈췄다.
트랙패드 위에 올려놓았던 손 전체가. 재생을 멈추지 않은 채로. 그대로 굳었다.
윤재는 서진의 옆에 앉아 있었다. 어깨가 닿지 않는 거리. 그러나 서진이 멈춘 그 순간을 윤재는 손끝으로 느꼈다—공기가 달라졌다. 서진이 숨을 멈춘 것처럼. 아니, 숨이 아니라 시간이 멈춘 것처럼. 거실 전체가 서진의 목소리만으로 가득 찼다. 젊고, 흔들리고, 아직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목소리.
영상은 계속 흘렀다. 공연 포스터. 대학 시절 사진 한 장. 그리고 마지막—현관에서 창밖을 보는 서진의 옆얼굴.
지금의 너.
영상이 끝났다.
화면이 검어졌다.
허밍이 사라진 자리에 침묵이 고였다. 서진이 움직이지 않았다. 윤재도 움직이지 않았다. 거실 안에 그 목소리의 잔향이 아직 있는 것처럼—없어진 게 아니라 스며든 것처럼 조용했다.
"이거," 서진이 말했다. 목소리가 달랐다. 평소보다 낮고, 천천히, 마치 발음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어디서 났어."
"서랍에 있었어. 카세트."
서진이 천천히 노트북을 내려다봤다. 검어진 화면 위에 자기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열어봤어? 그 카세트."
"응."
짧은 침묵. 그리고 서진이 웃었다—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입꼬리만 올라간 게 아니었다. 눈가가 먼저 구겨졌다. 그리고 눈물이 왔다. 서진이 손등으로 닦는 대신 그냥 뒀다. 닦을 생각을 못 한 것처럼.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가장 슬플 때 가장 환하게 웃던 사람이 오늘은—그냥 울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윤재 앞에서.
"나 이 노래," 서진이 말했다. 목이 막혀 한 음절씩 나왔다. "10년 동안 한 번도 꺼낸 적 없는데."
"알아."
"윤재한테도 말 안 했잖아."
"알아."
"그럼 어떻게—" 서진이 말을 잘랐다. 목이 더 막힌 것처럼. 그리고 눈물이 더 흘렀다. 닦지 않았다. 그게—그 모습이 윤재 가슴 안 어딘가를 천천히 눌렀다. 조용히, 그러나 깊이.
윤재가 손을 들어 서진의 목 뒤를 잡았다. 천천히. 세게 잡지 않았다. 그냥 거기 있다는 것처럼. 여기 있다는 것처럼.
"너 음악 포기한 거," 윤재가 말했다. 낮고, 조용히. "한 번도 괜찮다고 생각한 적 없잖아."
서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나한테는."
그 말이 공기를 가르고 서진 안으로 들어갔다—윤재는 그걸 느꼈다. 서진의 목 뒤 근육이 잠깐 굳었다가 풀리는 것을. 어깨에서 뭔가 내려가는 것을. 서진이 윤재 쪽으로 기울었다. 어깨가 닿았다. 이마가 윤재의 턱에 닿았다. 서진의 머리카락이 윤재의 턱선을 스쳤다. 뜨거웠다. 서진의 이마가, 서진이 울고 있다는 것이, 이 밤 전체가.
그대로 둘이 한참 있었다. 라면 냄새가 아직 주방에 남아 있었다. 창밖에서 바람이 한 번 지나갔다.
서진이 먼저 입술을 찾지 않았다. 윤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그 온도가 좋았다. 서진의 이마가 윤재의 턱 아래에서 뜨거웠고, 서진의 어깨가 윤재의 어깨 안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윤재는 목 뒤에 얹은 손을 서진의 머리카락 쪽으로 천천히 올렸다. 손가락이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었다. 서진이 숨을 들이켰다—아주 얇게, 코끝으로.
"윤재."
"응."
"나 선물 더 원해."
윤재가 서진을 내려다봤다. 서진이 고개를 들어 윤재를 봤다. 눈이 아직 붉었다. 그런데 그 눈이 달랐다. 아까의 슬픔이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더 솔직한 무언가. 윤재가 아랫입술 안쪽을 한 번 깨물었다. 그 시선을 받고 있는 것과 그 시선을 받아들이는 것이 같은 게 아니라는 걸, 윤재는 알면서도.
"어떤 거."
"뻔한 거."
서진이 먼저 윤재의 셔츠 깃을 잡았다. 당기지 않았다. 그냥 쥐었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주 조금. 울고 나서의 떨림인지 다른 것의 떨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윤재는 그 손을 느끼면서 몸을 기울였다.
입술이 닿았다. 어제나 그제처럼 급하지 않게—그러나 어제나 그제보다 더 깊이. 서진이 울었던 온도가 입술 사이로 넘어왔다. 소금기 없이, 그냥 뜨겁게. 서진의 손이 셔츠 깃에서 윤재의 목 뒤로 이동했다. 윤재가 서진의 등에 팔을 둘렀다. 소파가 삐걱였다. 창밖에 바람이 한 번 더 지나갔다. 거실이 어두웠다. 두 사람만큼 어두웠다.
가장 가까운 온도의 밤이었다.
새벽 두 시.
서진이 윤재의 팔 위에 누워 있었다. 숨이 고른 걸 보면 자는 것 같기도 했고, 고르다는 것 자체가 의도적인 것 같기도 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가로등 빛이 서진의 어깨선을 타고 흘렀다. 빛이 피부 위에서 조금 떨었다—창밖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것이었다. 윤재는 천장을 봤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 말이 오늘 밤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엔—그 말이 너무 작게 느껴졌다. 이 팔 위에서 자는 서진. 오늘 처음으로 그냥 울었던 서진. 10년 동안 닫아둔 문을 윤재가 두드렸을 때 열어준 서진. 충분하다는 말이 위로가 아니라 한계처럼 들리는 밤이 있다는 걸, 윤재는 오늘 처음으로 인정했다.
"자?"
서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작게 말했다.
"안 자."
"뭐 생각해."
잠깐 사이가 있었다. 서진이 숨을 한 번 고르는 소리.
"차민율 선배가," 서진이 천천히 말했다. "오늘 이런 말을 했어.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더 적합한 걸 찾아서 잘하게 된다고. 그게 불행한 건 아니라고."
"…선배 본인 얘기도 하는 것 같은데."
"그렇겠지. 선배도 원래 다른 거 하고 싶었을 거야." 서진이 잠깐 멈췄다. "우리 업계에 그런 사람 많잖아. 원래 다른 거 하려다 여기 온 사람들."
윤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진이 계속했다.
"근데 윤재야. 그게—그 말이 맞는 말인데. 맞는 말인 거 알겠는데."
"응."
"맞는 말이 듣기 싫을 때가 있잖아." 서진의 목소리가 천장을 향해 올라갔다가 가라앉았다. "그게 맞기 때문에 더."
윤재가 서진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뭔가를 말하려다 멈췄다. 말보다 이게 맞을 것 같아서.
"윤재는 알 것 같아서."
그 말이 가슴 안에 조용히 박혔다. 아프지 않은 방식으로. 윤재는 알 것 같아서. 서진이 자기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그것이 기뻤다. 그리고 그 기쁨 뒤에, 아주 가늘게, 두려움이 왔다. 이 사람을 알면 알수록, 이 사람이 나를 알면 알수록—잃는 게 더 커진다는 것을. 잃는 것을 상상하는 것조차 지금보다 더 무거워진다는 것을.
윤재는 아랫입술 안쪽을 천천히 깨물었다.
서진은 몰랐다.
다음 날 오전.
박지호에게서 문자가 왔다.
차민율 알지? 어제 업계 모임에서 봤는데—그 사람, 서진 씨 아버지 회사 부프로젝트 책임자로 들어간다더라. 밥은? 먹었어.
그리고 두 번째 문자.
그리고 윤재야. 서진 씨 아버지가 직접 그 프로젝트에 서진 씨 이름 올렸다는 얘기 나왔어. 네가 알고 있는 건지 몰라서.
윤재는 그 문자를 세 번 읽었다.
창밖에 햇빛이 있었다. 10월 아침의 빛이었다. 충분히 밝고, 그래서 그림자도 선명했다. 서진은 아직 자고 있었다. 어젯밤 윤재의 팔 위에서 잠든 채로.
오늘이 그 전날 밤보다 조금 더 밝았다.
그리고 딱 그만큼, 더 무서웠다.
지호는 문자를 거기서 끊었다. 네가 알고 있는 건지 몰라서. 그 뒤에 있는 말은 쓰지 않았다—지호는 늘 그렇게 했다. 말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는 사람. 그러나 윤재는 그 문장이 문자 뒤에 있다는 걸 알았다.
서진 씨가 그 프로젝트 받으면, 그 다음은?
윤재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냉장고를 열었다. 서진이 채워놓은 냉장고. 윤재가 쓰는 순서대로 정돈된 냉장고—달걀이 항상 손이 닿는 위치에 있었다. 서진은 윤재가 아침에 달걀을 쓴다는 걸 알았고, 윤재는 서진이 그걸 안다는 걸 알았다. 그런 것들이 쌓여서 동거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들이 쌓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손이 달걀을 꺼냈다. 습관처럼. 좋아하면 밥을 짓는다—그게 윤재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그 손이 조금 늦게 움직였다.
방문 너머에서 서진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곧 나올 것이다. 윤재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면서 불을 켰다.
그 순간 현관 쪽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택배치고는 이른 시간이었다. 윤재가 불을 줄이고 나갔다. 도어 카메라를 확인했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삼십대 중반쯤. 정장 재킷. 서 있는 자세가 반듯했다—힘을 준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의 자세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카메라를 정확히 보면서 말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오서진 씨 계세요?
윤재의 손이 도어 핸들 위에 멈췄다.
문을 열기 전 0.5초. 그 찰나에 윤재는 알았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이 사람이 오늘 이 집 앞에 서 있다는 것이, 어젯밤의 온도 위에 찬물 한 컵을 얹는 것과 같다는 것을. 그리고 그 찬물이 어디서 온 건지를 윤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윤재는 문을 열었다.
빛이 복도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10월 아침의 빛이—찬물처럼 차갑고, 선명했다.
"…차민율입니다. 오서진 씨 선배예요. 실례가 많습니다."
그 목소리가 조용하고 단단했다. 악의가 없었다. 그게—더 무거웠다. 악의가 없는 것들이 쌓여서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걸, 윤재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우가 지금 자기 현관 앞에 서 있다는 것도.
방문 너머에서 서진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