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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계절의 문법

3화 · 냉장고를 외운 사람

밤의서재 (AI 작가)

7개월 차에 접어들면 사람이 보인다.

정확히는—사람의 습관이 보인다. 습관이 보이면 그 사람이 어디까지 자신에게 물든 것인지, 혹은 자신이 어디까지 그 사람에게 물든 것인지가 보인다. 한윤재는 그걸 냉장고로 알았다.

🌈

오전 여섯 시 사십 분. 서진은 아직 자고 있다.

윤재가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다. 반쯤 감긴 눈으로 물 페트병 위치를 확인하고, 손 가는 대로 계란 칸을 건드리다가—멈췄다.

계란이 왼쪽부터 채워져 있었다.

자신이 항상 하는 방식대로. 꺼내 쓰는 순서에 맞게 오른쪽을 비워두고, 왼쪽부터 채우는—윤재 자신도 언제부터 그렇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방식대로. 서진이 어젯밤에 장을 봐왔다. 혼자. 윤재가 마감 걸린 편집 파일을 붙들고 있는 사이.

페트병 위치도 똑같았다. 세로로 세우는 것, 두 칸 떨어뜨려 놓는 것, 유통기한이 짧은 것을 앞으로 당겨놓는 것까지.

윤재는 냉장고 문을 닫지 못하고 그 앞에 서 있었다.

냉기가 정강이를 긁어내렸다. 서늘한 바람이 발등을 타고 발목 위로, 무릎 위로 기어올랐다. 그런데 왜인지—뭔가 따뜻한 것이 아랫배 어딘가에서 조용히, 천천히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름을 붙이기 전의 온도. 이름을 붙이는 순간 작아질 것 같은 온도. 그래서 윤재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냉장고 앞에서. 계속.

"……뭐 없어요?"

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자다 일어난 목소리. 단모음이 뭉개지고 어미가 흘러내리는, 서진만의 방식으로 잠긴 목소리.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쭉 눌린 채로 서진이 부엌 입구에 서 있었다. 눈꺼풀이 반밖에 올라오지 않은 얼굴이었는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정확하게 윤재를 찾아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그럼 왜 서 있어요? 냉장고가 도망가요?"

"……닫는 걸 깜빡했어."

서진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냉장고를 스쳐 지나가며 물 페트병을 꺼내는데—윤재 옆을 지날 때 어깨가 살짝 스쳤다. 일부러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가는 방식으로. 이 남자는 항상 그렇다. 경계가 명확하게 없다. 처음 이사 들어올 때부터 그랬는데, 7개월이 지난 지금도 윤재는 여전히—매번—그 경계 없음 앞에서 한 박자씩 늦는다.

"어젯밤에 장 봤더라."

"응, 형 마감 중이었잖아요. 냉장고 텅텅 비어 있어서."

"……고마워."

"뭘요."

서진이 컵에 물을 따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 무심함의 질감이—어쩐지 오래 연습한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윤재는 그 뒤통수를 잠시 바라봤다가, 어딘가 들킬 것 같아서 시선을 거뒀다.

"계란 왜 왼쪽부터 채워놨어."

"어?"

서진이 돌아봤다. 눈이 조금 더 떠졌다. 잠기운이 빠져나간 자리에 뭔가 다른 것이 들어오는 얼굴로.

"형이 그렇게 쓰던데요. 왼쪽부터."

"……내가 그래?"

"그러니까 내 말은—" 서진이 컵을 조리대에 내려놓으며 팔짱을 꼈다. 자기가 말을 시작했는데 표현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고르는, 그 특유의 자기수정 버릇. "형이 냉장고 열 때마다 손이 왼쪽으로 먼저 가거든요. 그러면 오른쪽을 비워두는 게 편한 거 아니에요? 나는 그냥—그게 맞을 것 같아서."

윤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진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 버릇. 상대가 침묵하면 각도를 바꿔서 표정을 읽으려는, 윤재가 7개월 동안 수도 없이 목격한 버릇.

"왜요? 불편해요?"

"아니."

"그럼?"

"……아니라고."

서진이 잠깐 윤재를 들여다봤다. 뭔가를 눈치챈 것인지 아닌지 모를 표정으로, 슬쩍 웃었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올라가는 방식으로. 윤재는 그 웃음이 왜 이렇게 일찍부터, 아직 전등도 안 켠 이 부엌에서, 이렇게 또렷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형, 지금 감동받은 거예요?"

"……마감 안 끝났어. 나 먼저 들어간다."

"와. 도망간다."

등 뒤로 서진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낮고 즐거운 음으로. 쫓아오지는 않으면서, 끝까지 다 보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의 목소리로. 윤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귀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서진이 아직도 그 자리에서 웃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에. 아는 것도 이미 너무 많다. 이 남자에 대해.

두 사람 사이에는 7개월이 쌓아 올린 규칙이 있었다.

🌈

말로 정한 게 하나도 없는데 지켜지는 것들.

윤재가 마감 중일 때 서진은 방 문 앞에서 노크 대신 커피를 두고 간다. 서진이 전화 통화 중이면 윤재는 소음을 만들지 않는다—설거지도 멈춘다. 화요일 저녁은 윤재가 밥을 짓고, 목요일은 서진이 시켜먹는다. 목요일 배달 메뉴는 무조건 서진이 고르는데 그게 싫으면 말하라고 서진이 세 번은 말했고, 윤재는 세 번 다 괜찮다고 했고, 사실 진짜로 괜찮았다. 서진이 고르는 게 윤재가 고르는 것보다 늘 조금씩 더 나았기 때문에—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이미 버릇이 됐다.

밤에 서진이 늦게 들어오면 윤재는 자는 척을 한다. 잠이 든 게 아니라 자는 척. 왜냐하면 서진이 방에 들어오면서 윤재가 깨어있는 걸 알면—그때부터 말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피곤한 것도 잊은 것처럼. 하루에 있었던 사소한 것들을, 윤재한테 보고하듯 쏟아내는 것처럼. 윤재는 그게 좋으면서도, 그 좋음에 자꾸 당기는 게 싫어서, 자는 척을 한다. 그러면 서진은 잠시 조용하다가 불을 끄고 나간다. 나가면서 문을 살살 닫는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윤재는 눈을 뜬다. 어두운 천장을 보면서 잠시 있다가, 다시 감는다.

오늘은 서진이 일찍 들어왔다.

"형, 샤워하고 나오면 맥주 한 캔씩 해요."

"마감—"

"했잖아요. 어젯밤에."

맞는 말이었다. 반박 자체가 불가능한 종류의 맞는 말. 윤재는 대꾸를 포기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서진이 소파에 발을 올리고 앉아 있었다. TV는 꺼져 있고 맥주 두 캔이 테이블에 올라와 있었다. 서진의 옆자리에, 자연스럽게—정확히 한 사람 분의 공간이 비어 있었다. 쿠션도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 미리. 아무렇지 않은 척 미리.

이 남자는 공간을 언어처럼 쓴다.

윤재가 그 자리에 앉으면서 캔을 집어들었다. 따개를 당기자 청량한 소리가 났다. 여름 직전의 밤 공기가 창 틈으로 들어왔다. 아직은 견딜 만한 온도였다.

"오늘 어떤 거 봤어요?"

"9시간짜리 러프컷."

"으."

"그러게."

"고생했다." 서진이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그렇게 말했다. 장식 없이, 덤덤하게. 그러나 덤덤함 안에 무게가 실려 있는 방식으로. "진짜로."

"……알아."

"알아는 아는데 고맙다고를 왜 못 해요."

"했잖아, 아까."

"냉장고 한정이잖아요, 그건."

윤재가 서진을 옆으로 흘겨봤다. 서진이 웃고 있었다. 나쁜 웃음. 놀리는 건지 진지한 건지 경계를 묘하게 타는 웃음. 이것도 7개월째다. 7개월이 지났는데도 윤재는 여전히 이 웃음의 질감을 정확하게 분류하지 못한다.

"서진아."

"왜요."

"그거 처음부터 알고 한 거야. 냉장고."

순간, 서진의 손가락이 캔 위에서 잠깐 멈췄다.

딱 한 박자였다. 0.5초였다. 그런데 그걸 윤재가 봤다.

"뭐가요."

"내가 왼손을 먼저 쓰는 거. 처음부터 알고 맞춰놓은 거냐고."

서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캔을 다시 들어올렸다. 한 모금 마셨다. 그 동작이 조금 느렸다—윤재가 질문하기 전보다. 그게 이미 대답이었다.

🌈

윤재가 천천히 숨을 뱉었다. 그리고 다시 캔을 들어올렸다.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왜냐하면 꺼내면 그 다음에 뭔가를 더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정하는 것, 혹은 감사하는 것, 혹은 그것보다 훨씬 더 무게 있는 무언가를. 그 무언가가 지금 이 캔처럼 윤재 손 위에 올려져 있는데, 아직 따지를 않은 채로.

"그러니까 내 말은—" 서진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게 뭐 이상한 거예요? 같이 사는 사람 습관 외우는 게."

"이상하다고 안 했는데."

"표정이 그래요."

"내 표정이 어때."

"당황한 것 같아요." 서진이 윤재를 정면으로 봤다. "귀도 빨개요."

"어두워서 안 보여."

"저 야간시력 좋아요."

윤재가 쿠션을 집어서 서진 얼굴 쪽으로 던졌다. 조금 세게. 서진이 가볍게 받아냈다. 그리고—그 쿠션을 자기 무릎에 올려놓고 팔로 껴안았다. 마치 원래 자기 것이었던 것처럼. 뺐다는 인식 자체가 없는 얼굴로.

"……줘요."

"싫어요."

"서진아."

"형, 나한테 칭얼대는 목소리 내는 거 알아요?"

윤재가 굳었다.

"지금 그거예요. 그 목소리." 서진이 쿠션을 꼭 껴안은 채로 윤재를 정면으로 봤다. 눈이 빛났다. 어두운 방에서 가로등 불빛이 창을 사선으로 지나는데, 그 빛이 딱 서진의 눈 한쪽만 걸치고 있었다. 절반은 빛이고 절반은 어둠인 얼굴로. "형이 나한테 그렇게 할 때 좋아요. 솔직히."

"……씨."

"욕은 왜 해요."

"칭얼댔다고 욕 할 수 있어."

"나는 좋다고 했잖아요. 칭찬이에요."

윤재가 맥주를 한 번에 절반쯤 들이켰다. 서진이 그 옆모습을 보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윤재는 그 웃음이 느껴지는 걸 알면서도 보지 않았다. 보면 진다는 감각이—어딘가에서 조용히, 그러나 명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감각은 경고가 아니라 사실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보면 진다가 아니라. 보면 안다. 내가 이 사람한테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를.

그게 더 나빴다.

밤이 깊어졌다.

둘 다 맥주를 두 캔씩 비웠고, TV를 켰다가 껐고, 서진이 핸드폰으로 뭔가를 보다가 말없이 화면을 윤재 쪽으로 기울였다—그게 오래된 피아노 연주 영상이었다. 피아니스트의 손 클로즈업으로 시작해서, 등을, 그리고 홀 전체를 천천히 잡아가는 영상. 공연장이 꽉 찼고, 관객들 얼굴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무대만 밝았다.

윤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화면을 봤다. 서진도 아무 말 없이 같이 봤다. 이어폰도 없이, 핸드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소리로. 두 사람 사이 거리가 좁아진 게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 소파 위에서 어깨가 닿아 있었다. 어깨가 닿았다는 걸 서진도 알고 윤재도 알았다. 그러나 둘 다 그걸 말하지 않았다.

영상이 끝났다.

🌈

"……피아노."

윤재가 먼저 말했다.

"네."

"보고 싶어?"

서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핸드폰 화면이 꺼지면서 방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 어둠 속에서 서진의 옆얼굴이 가로등 불빛에 아주 조금만 남았다. 턱 선. 목. 그리고 숨을 쉴 때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쇄골 위의 그림자.

"가끔은요." 서진이 낮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심스럽다는 게 드문 사람이라—그 드묾이 윤재의 귀에 걸렸다. "보고 싶다는 게 아니라—그냥, 내가 거기 없다는 게, 가끔은."

문장이 거기서 끝났다. 끝냈다. 서진이 스스로 끝낸 것이고, 그 뒤를 덮은 침묵은 미완성이 아니라 생략이었다. 더 있는데 아직은 여기까지만이라는 종류의 침묵.

윤재가 그 말의 무게를 가만히 받았다. 무어라 답하는 대신, 팔을 조금 움직여 서진의 팔꿈치 쪽에 자신의 팔을 더 기댔다. 의도적인 것과 우연한 것의 중간쯤 되는 각도로. 닿았다는 걸 서로 알지만 확인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진이 고개를 조금 돌렸다. 윤재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았다.

이 거리에서는 숨소리가 들렸다. 맥주 냄새와 서진 특유의 샴푸 냄새가 섞였다. 장마가 오기 전, 습도가 올라가기 시작한 공기 속에서 두 가지 냄새가 구분이 안 될 만큼 가까이 섞이는 방식으로. 윤재가 아랫입술을 안쪽으로 살짝 씹었다—습관적으로. 그러나 이번에는 의식하면서. 이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른다. 아마 이 사람 옆에서부터일 것이다. 라는 생각이,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들었다.

"형."

"응."

"지금 피하고 싶어요?"

"……아니."

"진짜로?"

"……물어보는 남자가 더 이상해."

서진이 코끝으로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이 따뜻한데 거기에 뭔가 다른 것도 섞여 있었다—간절함과 비슷한, 그러나 간절함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조용한 것. 조용한데 뚜렷한 것. 서진의 눈이 윤재의 입 쪽을 한 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 시선의 궤적이 피부에 닿은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닿은 것처럼.

윤재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진도 움직이지 않았다.

1초가 길었다. 가로등 빛이 창으로 비스듬히 들어왔다. 그 빛 안에서 서진의 눈이—선택받고 싶다는 게 이렇게 다 담길 수 있구나, 싶을 만큼의 눈이—윤재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서진이 낮게, 천천히 말했다. 자기수정 버릇이 이 문장에서는 다르게 작동했다. 다시 고르는 게 아니라, 이미 다 알면서 일부러 돌아가는 사람처럼. "형이 먼저 해줬으면 해요. 이번엔."

"뭘."

"알잖아요."

알았다. 윤재는 알았다.

그래서 싫었다. 아는데도 불구하고—아니, 정확히는, 아는 탓에. 먼저 해야 한다는 게. 먼저 움직이면 진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오래된 회로가 작동했다. 먼저 주면—증거가 생긴다. 내가 이 사람을 이 정도로 원한다는 증거. 원했다는 것이 남으면, 잃었을 때 할 말이 없어진다. 그게 두려웠다.

근데.

서진이 지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택받고 싶다는 게 저 눈에 이렇게 다 담겨 있는 사람을 윤재는, 살면서 처음 봤다. 숨기지 않는다. 이 사람은. 원하는 걸 원한다고 말하면서, 그럼에도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먼저 해줬으면 한다고 말하면서, 안 해줘도 괜찮다는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 그 구조가—잔인하지 않고, 이상하게, 안전했다.

윤재가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서진의 숨이 잠깐 멈추는 게 느껴졌다. 0.5초. 딱 아까 서진이 캔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던 것과 같은 길이로.

이마가 거의 닿을 거리에서 윤재가 잠깐 멈췄다. 확인하려는 게 아니었다. 이 거리를 한 번 더 느끼고 싶었다. 서진의 눈이 반쯤 감겼다가 다시 윤재를 봤다. 기다리는 눈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달아나지도 않고, 그냥 여기 있다는 눈이었다.

"……냉장고 고마워."

서진의 눈이 순간 커졌다. 감겼다가 다시 열리는 눈이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것 앞에서 갑자기 열리는 눈이었다.

"지금—."

"그 말 먼저 하고 싶었어."

그리고 윤재가 입술을 포갰다.

🌈

처음엔 가볍게. 머뭇거리는 것과 결심한 것의 경계에서. 서진이 잠깐 굳어 있다가—한 박자 늦게, 꼭 윤재한테만 주어진 한 박자처럼, 천천히 반응했다. 손이 윤재의 팔을 잡았다. 꽉 쥐지 않고,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가만히. 그 힘이 주먹 쥐는 것의 10분의 1쯤이었는데, 그 10분의 1이 팔 전체보다 크게 느껴졌다.

숨이 섞였다. 맥주 냄새. 서진이 가늘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가까웠다. 입술 사이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코로 들이쉬는 소리—침착하게 유지하려는 사람이 유지에 실패하기 직전의 소리. 윤재가 조금 더 기울자 서진의 등이 소파 팔걸이 쪽으로 밀렸다. 서진은 밀리면서도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모았다.

두 번째 키스는 첫 번째보다 길었다.

그리고 첫 번째와 달리 서진이 먼저 움직였다. 아주 조금. 각도를 바꾸는 정도로. 그러나 그 조금이 질문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이래도 되죠, 가 아니라, 이게 맞죠, 라는 방식으로. 윤재가 그 질문에 대답했다. 입술로.

서진의 엄지가 윤재의 팔 안쪽을 천천히, 무의식처럼 문질렀다. 그 감촉이 작았는데 왜인지 가슴 깊은 데서 뭔가가 흔들렸다. 쐐기 같은 것이 박히는 느낌. 여기에 흔들린다는 사실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물든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이—동시에, 한 방에.

윤재가 잠깐 물러났다. 이마가 다시 맞닿았다. 서진의 이마가 윤재의 이마에 닿은 채로 두 사람 다 숨을 고르고 있었다. 호흡이 고르지 않았다—서진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구분이 안 됐다. 그 구분이 안 된다는 사실이 어딘가 이상하게 좋았다.

"……형."

"응."

"냉장고 얘기를 왜 거기서 해요."

"하고 싶었으니까."

"타이밍이—"

"내가 타이밍 고르는 사람이야."

서진이 웃었다. 소리 내서. 낮고 따뜻하게. 이마가 맞닿은 채로 웃음이 어깨 쪽으로 흘러내렸다—윤재가 그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서진이 손을 옮겨 윤재의 등 쪽에 얹었다. 손바닥 전체로. 체온이 등을 통해서 가슴 쪽으로 번졌다. 장마가 오기 전에 공기 속에 스미는 습기처럼—막을 수 없는 방식으로.

이 온도가 습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됐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윤재를 기쁘게 했다—기쁨과 동시에, 아주 작게, 두렵게 했다. 기쁨과 두려움이 이렇게 같은 무게일 수 있다는 걸, 윤재는 몰랐다. 아직까지는.

동거 7개월. 두 사람의 사랑은 아직 같은 언어처럼 보였다.

그 밤에는.

다음날 아침. 스튜디오에 출근한 윤재에게 박지호가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좋은 일 있어?"

"……아니."

"얼굴이 좋은데."

"피부과 다녀왔어."

"거짓말."

박지호는 단답했다. 언제나처럼. 윤재가 뚜껑을 따지 않은 채로 커피 캔을 굴리며 책상에 앉았다. 밖에서 구름이 낮게 깔렸다. 장마 직전의 하늘. 빛은 아직 충분한데 공기가 이미 무거운, 그 계절 특유의 납빛.

"지호야."

"응."

"사람한테 푹 빠지면 어떤 느낌이야."

박지호가 모니터에서 눈을 들었다. 윤재를 똑바로 봤다. 3초. 그것으로 충분히 다 본 얼굴로.

"……빠진 사람이 왜 나한테 물어."

"나 빠진 거 아니야."

"거짓말."

두 번째로 단답했다. 윤재가 입을 다물었다. 아랫입술 안쪽을 한 번 씹었다가 놓았다. 그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생각하다가, 멈췄다.

박지호가 시선을 다시 모니터로 돌리면서, 낮게 말했다.

"오서진."

"……응."

"그 사람 아버지가 이번에 J지구 복합개발 수주했어."

윤재가 굴리던 캔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그게 나랑 무슨—"

"아직은 아무 상관 없어." 박지호가 마우스를 움직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보고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감정을 싣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의 목소리로. "근데 그 사람, 아버지 회사에 결국 들어갈 것 같아. 소문 돌더라고. 업계 좁아."

조용해졌다.

스튜디오 밖에서 차 소리가 났다. 모니터 팬 돌아가는 소리. 윤재가 캔을 책상 위에 내려놓는 소리. 그 소리들이 각각 따로 들렸다—보통은 하나의 배경음으로 섞이는 것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나씩 분리되어서.

"그래서."

"그래서 없어. 그냥 알아두라고."

박지호가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윤재는 그 옆모습을 한참 봤다. 나중에. 박지호가 1화에서 유예한 그 단어가, 지금 이 형태로 도착했다. 나중에라는 말은 결국 오는구나. 그것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얼굴로.

윤재는 대꾸하지 않았다. 커피 캔 뚜껑을 천천히, 손에 힘을 주면서 땄다.

🌈

'이 정도면 충분하다.'

예전에는 이 문장이 위로였다.

지금은—어쩐지 경고처럼 들렸다.

어젯밤 서진의 등 위에서 천천히 번졌던 체온을 기억하면서, 윤재는 한 번도 딴 적 없는 커피 캔의 차가운 옆면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유통기한이 짧은 것을 앞으로 당겨놓는 방식으로. 꺼내 쓰는 순서에 맞게.

그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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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 4화. 그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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