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2화 — 진열하면 안 됐다
리스트는 창고 2번 선반, 안쪽 판자 뒤에 있었다.
이새벽은 그걸 알고 있었다. 오지호의 메모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하지만 밤 2시 47분, 간이 창고 형광등 하나가 깜박이며 금방이라도 나가버릴 것 같은 상황에서, 그 선반 앞에 쭈그려 앉아 판자를 끌어당기는 건 — 솔직히 말하면 — 겁나는 일이었다.
겁나는 일을 해야 살아남는다는 걸 새벽은 알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무릎이 시멘트 바닥에 닿았다. 차갑고 딱딱했다. 손가락이 판자 모서리에 걸렸다. 나무 결이 거칠었고, 끝이 약간 갈라져 있어서 피부를 물었다. 먼지 냄새와 함께 뭔가 눅눅한, 오래된 종이 냄새가 훅 치고 들어왔다. 새벽은 숨을 참으면서 판자를 끌어당겼다.
리스트는 A4 용지 세 장을 접어 클립으로 묶은, 평범하다 못해 초라한 물건이었다. 글씨는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오지호의 필체였다. 새벽은 그걸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 왜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반듯하고, 빈틈이 없고, 쓸데없는 장식이 없는 글씨. 감정이 빠져나간 자리에 정확함만 남긴 것 같은 글씨.
리스트 맨 위에는 제목도 없었다. 그냥, 항목이 시작됐다.
``` 1. 바코드 없는 상품은 스캔하지 않는다. 2. 스캔이 안 될 경우, 구매를 거절한다. 3. 거절 후 손님이 돈을 두고 간다면 — 그 돈을 만지지 않는다. 4.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 탑차가 오면 납품을 받지 않는다. 5. 창고 안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면, 창고 문을 열지 않는다. 6. 이름이 없는 상품은 진열하지 않는다. ```
새벽은 세 번 읽었다.
첫 번째는 글자를 읽었고. 두 번째는 의미를 읽었고. 세 번째는 자신이 이미 저지른 것들을 세었다.
규칙 1번과 2번은 어겼다. 이미. 어젯밤에 바코드 없는 음료를 — 그 CCTV에도 안 잡힌 여자가 사 간 — 스캔하려다 실패했고, 규칙 3번은 그 여자가 두고 간 연도 표기 없는 동전으로 어겼다. 탑차는 4번 규칙을 만들어놓고 박살냈다.
세 개.
남은 건 5번과 6번이었다.
새벽이 천천히 리스트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마지막 장 뒷면에 메모가 더 있었다. 앞 장과는 다른 느낌 — 오지호가 나중에 덧붙인 것 같은 글씨였다. 조금 더 눌렸고, 조금 더 서둘렀다. 마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마치 지금 당장 써두지 않으면 쓸 수 없게 될 것 같았던 것처럼.
``` 이새벽에게.
스캔하려고 했을 거야. 아마 이미 했겠지. 괜찮아. 나도 했으니까.
중요한 건 그 다음이야. POS가 꺼졌다가 다시 켜지면 화면에 뭔가 뜰 거야. 읽으려고 하지 마.
그냥 닫아. 진열하지 마. 절대로. ```
새벽은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지호가 미리 알고 썼다. POS가 꺼진다는 것도, 다시 켜진다는 것도. 화면에 뭔가가 뜬다는 것도. 그게 언제 일어날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 아니, 직접 겪었던 사람처럼.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야, 아니면 — 이미 시작된 거야?
창고 형광등이 탁, 하고 꺼졌다. 완전히.
어둠이 쏟아졌다. 눈앞이 아무것도 없는 검정이 됐다. 새벽은 반사적으로 선반 모서리를 잡았다. 나무가 손바닥을 물었다. 3초. 5초. 형광등이 다시 켜졌다.
창고는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납품 박스들. 청소 도구. 빈 행거.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새벽의 뒷목이 오소소 돋아났다. 피부가 뭔가를 먼저 알고 있는 것처럼.
새벽은 창고를 나왔다. 문을 닫으면서 손잡이에서 손을 뗄 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안을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카운터로 나왔을 때, 편의점 안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새벽 3시 12분. 새벽이 제일 싫어하는 시간대였다. 사람도 없고, 소리도 없고, 시간이 두껍게 고여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시간. 형광등이 편의점 안의 모든 것을 — 과자 봉지도, 냉장 진열대 유리도, 자기 손도 — 너무 선명하게 비춰서, 오히려 그게 이상해 보이는 시간. 이렇게 다 보이는데 왜 더 무서운 거야, 하는 시간.
납품받은 4박스가 아직 창고에 있었다. 점주 박철민은 "낮 타임 애들이 처리해"라고 했지만 — 그건 일반 납품 기준이었다. 바코드 없는 박스들이 낮 타임까지 창고에 있어도 되는지, 새벽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뭐가 들었는지는 봐야 하지 않나.
박스 중 하나를 커터칼로 열었다. 칼이 테이프를 가르는 소리가 편의점 안에 너무 크게 들렸다. 뾱뾱이 포장 속에 음료 캔이 12개 들어 있었다. 어젯밤 그 여자가 사 간 것과 같은 모양, 같은 색깔의 캔이었다. 이름이 없었다. 바코드가 없었다. 디자인만 있었다 — 파란 그라데이션에, 뭔가를 상징하는 것 같은 기하학적 무늬. 브랜드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냥 패턴만. 마치 처음부터 이름이 있을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새벽은 캔 하나를 집어들었다. 차가웠다. 납품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미 냉장 온도였다. 흔들어봤다. 액체가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냄새를 맡으려다 — 그만뒀다. 뚜껑을 따는 건 더더욱.
POS 기기를 켰다. 어젯밤에 꺼져 있었던 것, 다시 확인하는 것처럼. 정상이었다. 화면에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대기 화면이 떠 있었다. 판매 금액 0원. 영수증 롤 잔량 정상. 날짜와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가고 있었다.
새벽은 캔의 바닥 면을 POS 기기에 대봤다. 스캔하는 척. 확인만 해볼 생각이었다. 바코드가 없으니 당연히 아무 반응이 없을 것이었다. 그냥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삐—.
기계가 울렸다.
바코드가 없는데.
새벽은 손을 멈췄다. POS 화면을 봤다.
뭔가가 떠 있었다. 새벽은 자신의 눈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화면에 뜬 글자는 한글이 아니었다. 가나도 아니고, 알파벳도 아니고, 중국어도 아닌 — 새벽이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자였다. 기호처럼 생긴 것들이 줄을 맞춰서 배열돼 있었다. 상품명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가격이 있어야 할 자리에. 숫자처럼 보이는 기호도 있었다. 1,200원 위치에 있어야 할 자리에.
새벽은 읽으려고 하지 않았다. 읽을 수도 없었지만.
화면이 꺼졌다.
정전이 아니었다. POS만 꺼졌다. 조명은 멀쩡했고, 냉장고 모터 소리도 멀쩡했고, 유리문 바깥 차도에 신호등 불빛도 멀쩡했다.
오직 POS만.
새벽은 재부팅 버튼을 눌렀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이 먼저 움직였다. 습관이었다 — 기기가 이상하면 재부팅, 재부팅 안 되면 전원 뽑았다 꽂기, 그래도 안 되면 점주에게 전화. 몸이 기억하는 매뉴얼. 뇌가 따라잡기 전에 손이 하는 일.
기기가 돌아왔다. 재부팅 화면이 뜨고, 로고가 뜨고, 로딩 바가 채워지고, 대기화면이 뜨고.
화면 하단 구석에 뭔가 깜박이고 있었다.
새벽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화면 왼쪽 아래, 마치 시스템 메시지처럼 뜨는 작은 텍스트 박스 안에 — 한글이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한글이었다.
``` 진열 완료 후 삭제됩니다. ```
새벽이 멈췄다.
진열 완료. 진열. 진열하면 — 삭제.
삭제되는 게 뭔데.
텍스트가 사라졌다. POS 화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정상 대기 상태로 돌아왔다. 판매 금액 0원. 영수증 롤 잔량 정상.
새벽은 POS 앞에 서서 3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손이 캔을 쥐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캔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새벽은 그 차가움을 느끼면서,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오지호의 목소리가 종이 속에서 말했다. 진열하지 마. 절대로.
새벽의 발이 진열대 쪽으로 움직였다.
나중에 새벽이 스스로에게 설명한 이유는 이랬다: 어차피 이미 어긴 규칙이 세 개였다. 한 개 더 어기는 게 뭐가 다르냐고. 그리고 — 진열하면 삭제된다는 게 뭔지 직접 보지 않으면, 이 편의점에서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고.
두 설명 다 절반만 진실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 지금 이 순간 새벽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에 있었다. 심장이 정상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손이 약간 떨렸다. 뒷목 털이 서 있었다. 이렇게 온몸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뇌가 그걸 처리하는 것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상태. 두려울 때 오히려 몸이 뭔가를 해야 한다고, 무조건 행동해야 한다고 아는 사람의 반사신경. 강도가 칼을 꺼냈을 때 새벽이 뒷걸음질 치는 대신 카운터 위 물건을 잡았던 것처럼. 그게 옳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이라서.
음료 캔을 냉장 진열대 칸에 밀어 넣었다. 다른 음료들 사이에. 파란 캔이 차갑고 평범한 척 그 자리에 꽂혔다.
딸깍.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새벽은 카운터로 돌아와서 CCTV 화면을 봤다. 냉장 진열대 앵글이 잡혀 있었다. 캔이 보였다. 파란 그라데이션이 화면 속에서도 선명했다.
2분이 지났다.
5분이 지났다.
캔이 없어졌다.
새벽은 CCTV 화면을 뚫어지게 봤다. 누가 꺼내 간 것도 아니었다. 타임랩스처럼 천천히 재생해봤다 — 5배속, 10배속으로. 캔은 그냥 없어졌다. 사라지는 '순간'이 없었다.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 어딘가에서. 있다가 없었다.
새벽이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잠깐.
진열 완료 후 삭제됩니다.
상품이 삭제된 게 아니었다. 아니, 상품 자체가 사라진 게 요점이 아니었다. 메시지가 말한 건 '진열 완료 후 삭제'. 진열을 완료하면 — 삭제가 발생한다. 진열이 삭제의 조건이다. 그럼 삭제되는 건 상품이 아니라 —
뭔가 다른 것이었다.
새벽은 냉장 진열대로 걸어갔다. 캔이 있던 자리에 손을 넣었다. 텅 비어 있었다. 옆 칸 음료를 꺼내봤다. 멀쩡했다. 유리문 안쪽 차가운 공기가 손등을 쓸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 냄새가 났다.
캔 음료 냄새가 아니었다. 오래된 공기 냄새, 아니면 아무도 없는 빈 방 같은 냄새. 어딘가 오랫동안 닫혀 있던 것이 잠깐 열렸다가 다시 닫힌 것 같은 냄새. 새벽이 그 냄새의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냄새라기보다는 부재 같은 것. 뭔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것의 냄새.
새벽이 손을 빼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진동이 등 쪽 주머니에서 심장처럼 느껴졌다.
한수진이었다.
"야."
수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평소의 수진은 야간에도 에너지가 있었다. 지금은 달랐다. 딸각, 딸각 — 전화기 너머로도 팔찌 소리가 들렸다.
"스캔 해봤어?"
새벽이 잠깐 망설였다. "…했어."
"화면에 뭔가 떴지?"
"응."
"읽었어?"
새벽이 대답하기 전에 수진이 먼저 말했다. "잠깐, 읽었어도 일단 지금 그거 진열 안 했으면 돼. 진열했어?"
"…했어."
전화기 너머 정적.
딸각.
딸각.
아무 말도 없었다. 수진이 숨을 쉬는 소리만 들렸다. 팔찌 소리만 들렸다. 새벽은 그 정적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걸 했는지를 비로소 실감했다.
"수진아."
"……어."
"근데 진열하고 나서 상품이 사라졌어. CCTV 보면 그냥 없어졌어. 사라지는 순간도 없이. 뭐가 삭제되는 거야? 리스트에 진열하지 말라고 돼 있는데 — 상품이 사라지면 그냥 끝난 거 아니야? 뭐가 문제야."
"새벽아."
수진의 목소리가 한 톤 더 내려갔다. 딸각 소리가 멈췄다.
"상품이 사라진 게 아니야."
냉장 진열대 앞에 서서, 새벽은 조용히 물었다. "그럼 뭔데."
"그 상품이 간 자리로. 뭔가가 올 수 있게 되는 거야."
새벽은 유리문 쪽을 봤다.
새벽 4시의 골목이 거기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신호등은 빨간불이었다. 가로등이 한 번 깜박였다. 이유 없이. 바람도 없었고, 차도 없었다.
"수진아. 어떻게 해."
"일단 창고에 들어가지 마. 그리고 손님이 와도 냉장 진열대 열어주지 마. 뭘 사고 싶다고 해도." 수진이 잠깐 멈췄다. "근데 새벽아, 중요한 거 물어볼게."
"뭔데."
"오지호 선임 메모. 거기 진열하지 말라고 했지?"
"응."
"근데 왜 했어."
새벽이 대답 안 했다.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두려워서 오히려 했다는 게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수진이 천천히,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메모에 다른 거 없었어? 진열하면 어떻게 된다, 그런 거."
"삭제된다고 했어. POS에서. '진열 완료 후 삭제됩니다.'"
"그게 오지호 선임이 쓴 거야?"
"아니. POS 화면에서 떴어."
전화기 너머 수진이 숨을 들이켰다. 딸각, 팔찌 소리가 빠르게 두 번 연속으로 났다.
"새벽아, 잘 들어. 그 메시지는 오지호 선임이 하나도 몰랐던 거야. 내가 아는 선임 중에 그 단계까지 간 사람이 — 없어. 진짜로."
새벽이 카운터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등이 등받이에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딱딱하고, 실재하는 것.
"그럼 나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모르겠어."
"수진아."
"진짜 모르겠어. 근데 — 새벽아." 수진이 잠깐 망설였다. "너, 지금 겁나?"
새벽이 잠깐 생각했다.
자기 자신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심장이 뛰고 있었다. 빠르지 않았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뒷목이 서 있었지만 — 공황이 아니었다. 이게 뭔지, 새벽은 알고 있었다.
"…아니."
두려움의 반대편이 아니었다. 두려움이 너무 깊어져서 다시 잔잔해지는 지점이었다. 강도가 칼날을 꺼냈을 때, 뇌가 완전히 고요해지던 그 감각. 아드레날린이 공포를 집어삼키고 나서 남는 것. 새벽의 몸이 이미 알고 있는 상태.
"수진아, 나 오지호 선임 마지막 근무 날 CCTV 봐야 할 것 같아."
"그거 어떻게 구해."
"점주한테 있지. 박철민 씨."
전화기 너머 수진이 멈췄다. 딸각 소리 없이, 완전히. 팔찌도 멈추고, 숨소리도 멈춘 것 같은 정적이었다.
"야."
"응."
"조심해. 그 사람 — 알아. 다 알아. 모른 척하는 거야. 그리고 새벽아." 수진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수화기에 바짝 붙어서 말하는 것처럼. "그 사람한테 물어보지 마. 아직은."
"아직은?"
"네가 뭘 알고 있는지 먼저 알아야 해. 그 다음에 그 사람 반응을 봐야지 —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얼마나 모른 척하나."
새벽은 점주의 명함을 카운터 서랍에서 꺼냈다. 한쪽 모서리가 살짝 접혀 있었다. 새벽이 처음 이 편의점에 왔던 날, 박철민이 직접 건넨 것. 그때 박철민은 웃으면서 명함을 줬다. 아주 보통의 웃음이었다. 아무것도 이상한 게 없는 웃음이었다.
그게 지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알았어."
전화를 끊었다. 편의점 안이 다시 고요해졌다. 형광등 아래 과자 봉지들이 줄지어 있었다. 냉장고 모터가 낮게 울렸다.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새벽은 카운터에 기대 유리문 너머 골목을 봤다.
가로등이 다시 깜박이다 멈췄다.
뭔가가 올 수 있게 되는 거야.
수진의 말이 귓속에서 돌았다. 들어오는 것. 어디서. 어디로. 그 상품이 간 자리에 생긴 빈 공간으로. 새벽이 만들어준 공간으로.
새벽은 CCTV 화면을 다시 봤다. 냉장 진열대 앵글. 파란 캔이 있던 자리. 텅 빈 칸이 화면 속에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텅 빈 게 아니었다.
새벽이 CCTV 화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해상도가 낮아서 잘 안 보였지만 — 분명히. 파란 캔이 있던 자리에. 뭔가가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처럼 보이는데, 공간이 — 달랐다. 유리 안쪽 다른 칸들은 냉장고 형광등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는데, 그 자리만 빛이 닿지 않는 것처럼 어두웠다. 어둡고, 깊었다. 옆 칸들과 같은 공간 안에 있는데, 그 칸만 다른 어딘가인 것처럼.
마치.
구멍 같았다.
새벽은 카운터에서 나왔다.
발소리가 났다. 자기 발소리인데도 너무 컸다. 편의점 안이 너무 조용해서.
냉장 진열대 앞에 섰다. 문을 열면 안 된다고 수진이 말했다. 새벽은 유리문 밖에서 그 칸을 봤다. 안쪽이 어두웠다. 아까 손을 넣었을 때는 그냥 텅 빈 칸이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어둠이 그냥 어둠이 아니었다. 어둠이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냉장 칸이 그렇게 깊을 리 없는데 — 화면 속 그 자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새벽이 유리문 손잡이를 잡았다.
잡기만 했다. 열지는 않았다.
잡은 손이 차가워졌다. 냉장고 유리는 원래 차갑지만 — 이건 냉장고 차가움이 아니었다. 손바닥을 타고 손목까지 올라오는, 다른 온도였다. 어디서도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차가움. 온도계가 측정할 수 없는 것의 차가움.
그리고, 새벽은 들었다.
소리가 아니었다. 냉장고 안쪽에서 오는 뭔가였다 — 소리라기보다는 진동, 진동이라기보다는 압력 같은 것. 귀로 듣는 게 아니라 가슴 한가운데에서 느껴지는 것. 심장박동이 한 박자 어긋날 것 같은 감각. 몸 안에 있는 무언가가 흔들리는 것 같은.
누군가가 — 안쪽에서 — 손잡이를 당기고 있었다.
새벽이 손을 놨다.
한 발 물러섰다.
두 발. 카운터까지.
냉장 진열대 유리문이 잠깐 흔들렸다. 조금. 아주 조금 — 하지만 분명히. 안쪽에서 당기는 것처럼.
그리고 멈췄다.
편의점이 다시 고요해졌다. 형광등이 윙 울렸다. 냉장고 모터가 낮게 돌아갔다.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형광등 아래 모든 게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그게 제일 이상했다.
새벽은 카운터 서랍을 열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찾던 걸 꺼냈다. 오지호가 남긴 것 중에 새벽이 리스트 말고 또 하나 발견한 것 — 작고 낡은 열쇠. 금속이 닳아서 빛을 잃은 것. 손에 자주 잡혔던 물건.
열쇠에 테이프가 붙어 있었고, 테이프 위에 볼펜으로 딱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창고'.
새벽은 그걸 손바닥에 올려놓고 봤다.
창고. 5번 규칙: 창고 안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면, 창고 문을 열지 않는다.
이 열쇠가 왜 창고 밖에 있는 거야. 창고 열쇠라면 창고 안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창고 열쇠가 두 개야? 왜 오지호가 이걸 카운터 서랍에 뒀어?
…잠깐.
창고 안에서 목소리가 들리면 문을 열지 않는다.
만약 창고 열쇠가 안에 잠겨 있다면 — 애초에 열 수가 없으니까 규칙을 지킬 수 있다. 열쇠가 밖에 있으면 — 열 수 있게 된다. 선택의 여지가 생긴다. 그러니까 규칙이 필요한 거다. 열쇠가 밖에 있어서 열 수 있기 때문에, 열지 말라는 규칙이 필요한 거다.
오지호는 이 열쇠를 밖에 뒀다. 새벽이 찾도록.
찾게 해서 — 쓰게 하려는 건지, 쓸 수 있다는 걸 알면서 쓰지 않는 선택을 하게 하려는 건지.
새벽은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새벽 4시 33분.
냉장 진열대는 잠잠했다. 편의점 안은 고요했다. 형광등 아래 과자 봉지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있었다. 아무것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게 제일 이상했다.
새벽은 카운터 의자에 앉아서 리스트를 다시 꺼냈다. 맨 마지막, 오지호의 메모 뒷면. 끝부분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새벽이 처음에 창고에서 읽었을 때는 없었던 것 같은 — 아니, 있었는데 못 본 건지 모를. 글씨가 나머지보다 더 연했다. 힘이 빠진 사람의 글씨처럼.
``` 창고 열쇠는 쓸 날이 있어. 때가 되면 알아. ```
새벽이 종이를 접었다. 다시 폈다. 다시 접었다.
때가 되면 알아. 그 말을 쓰면서 오지호는 어디 있었을까. 어떤 표정이었을까. 이 리스트를 선반 뒤에 숨기면서 — 다음 사람이 찾을 거라고, 이새벽이라는 이름의 다음 사람이 이걸 읽을 거라고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냥 — 누구든, 찾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을까.
새벽이 주머니 속 열쇠를 손가락으로 잡았다. 금속이 차가웠다. 오지호의 손이 마지막으로 쥐었을 온도가 거기 있었다.
새벽 5시. 낮 타임 알바가 오기 한 시간 전.
냉장 진열대 안쪽 어두운 칸이 지금도 저기 있었다. 열지 않은 유리문 너머. 그 안에서, 아까 손잡이를 당기던 것이 —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지 없는지. 새벽은 그걸 보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대신 새벽은 박철민의 명함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오전 8시에 오는 점주. 새벽이 퇴근 직전 그 사람과 마주친다. 오지호의 마지막 근무 날 CCTV를 봐야 한다. 수진이 그 사람은 다 알고 모른 척하는 거라고 했다. 아직은 물어보지 말라고 했다.
다 안다면.
지켜보면 된다. 먼저.
새벽은 카운터에 명함을 눌러놓은 채, 창고 쪽을 한 번 봤다. 문 아래 틈새로 빛이 새지 않았다. 조용했다.
목소리는 아직 안 들렸다.
바깥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새벽이 그걸 듣고, 처음으로 숨을 제대로 내쉬었다. 폐 안에 묵어 있던 공기가 전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살았다. 오늘 밤은.
형광등이 윙 울렸다. 편의점 안 모든 게 선명하게 보였다. 새벽이 직접 만들어준 구멍이 냉장 진열대 안쪽에 있었다. 아침 빛이 창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창고 열쇠가 주머니 안에서 차갑게 무거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