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3화 — 리스트 밖의 것들
새벽 한 시 사십칠 분.
편의점 오만 개가 넘는 나라에서, 지금 이 순간 야간 알바를 하는 인간이 몇 명이나 될까. 새벽은 빈 카운터에 팔꿈치를 올린 채 잠깐 그 숫자를 계산해보려다 포기했다. 계산기로 두드려봤자 의미 없는 숫자가 나올 거고, 그 숫자 안에서 자기가 얼마나 작은지만 확인하게 될 테니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냉장 진열대 3번 칸.
캔이 사라진 자리.
모서리가 없었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사람이 빼 간 자리는 빛이 들어온다. 옆 캔의 측면이 드러나고, 안쪽 플라스틱 선반이 보인다. 틈이 생긴다. 틈에는 반드시 빛이 새어 들어간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다. 그런데 저 자리는 그냥 어두웠다. 냉장고 내부 조명이 멀쩡히 켜져 있는데도, 그 칸만 빛을 먹어버린 것처럼 — 삼켜버린 것처럼 — 거기만 다른 세계였다. 새벽은 유리문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멀쩡히 켜진 조명 아래서 혼자 어두운 물건을 보고 있는 게 싫었다. 아니, 무서웠다. 그 단어가 더 정확했다.
새벽은 시선을 돌렸다.
…잠깐,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할 일이 있었다. 리스트를 가진 사람을 찾아야 했다. 오지호가 사라지기 전, 분명히 누군가한테 뭔가를 전달했을 것이다. 그게 규칙이었을 테니까. 야간 알바에는 인수인계가 있다. 창고 구석에 숨겨둔 쪽지가 인수인계라면, 그걸 받아봤을 사람이 있다. 박철민 점주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다면 — 혹은 진짜로 아무것도 모른다면 — 답은 다른 곳에 있다.
새벽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이 카운터 유리에 반사됐다. 형광등 불빛을 받아 하얗게 번지는 자기 손이 거기 있었다.
야간알바 커뮤니티 앱. 가입한 지 두 달 됐지만 거의 읽기만 했던 곳. 검색창에 적었다.
'오지호 편의점 야간'
결과가 열두 개 나왔다. 열한 개는 관련 없는 글이었다. 마지막 하나가 눈에 걸렸다.
> [질문] 혹시 마포 쪽 야간 알바 오지호 씨 아시는 분 있나요? 연락이 안 돼서요. 급합니다. > > 게시일: 6개월 전. 작성자: 수진수진수수진
새벽의 손가락이 멈췄다.
댓글은 열 개. 대부분 "모르겠다"였고, 마지막 댓글만 달랐다.
> "쪽지 주세요."
6개월 전 글에 달린 마지막 댓글. 그 사람도 찾고 있었다는 얘기다. 오지호를. 이미 오래전부터.
쪽지를 보낸 건 새벽이었다. 세 문장. 짧게.
> 저도 오지호 씨 찾고 있어요. 마포 쪽 편의점에서 지금 야간 하고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 거 있으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전송. 화면을 내려놓았다.
십 분이 지났다. 새벽은 유통기한 확인 작업을 시작했다. 냉장고 쪽은 피했다. 3번 칸 옆을 지나가는 게 아직 싫었다. 불빛 아래서 멀쩡하게 보이는 선반들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새벽은 손이 생각보다 안정적이라는 걸 이상하게 여겼다. 무섭지 않은 게 아니었다. 무섭다는 걸 인식할 여유가 없는 것뿐이었다.
스무 분이 지났을 때, 알림이 울렸다.
> 지금 근처 있어요. 나올 수 있어요?
편의점 바로 옆 골목 초입. 흡연 구역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틈. 가로등 빛이 닿지 않는 자리라 낮이든 밤이든 항상 어스름했다. 새벽 두 시에 가까운 지금은, 그냥 어두웠다.
여자가 먼저 와 있었다. 나이는 새벽보다 두세 살 위인 것 같았다. 짧은 머리카락이 귀 뒤로 넘어가 있었고, 귀에는 작은 은색 귀걸이가 박혀 있었다. 편의점 유니폼 위에 후드를 걸쳐 입었는데, 그 브랜드 색깔이 달랐다 — 이 편의점이 아니었다. 자기 매장 유니폼을 입고 남의 매장 골목에 서 있는 사람.
손목에 팔찌가 있었다. 메탈 소재 여러 개를 한꺼번에 끼고 있어서, 여자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딸각딸각 소리가 났다. 조용한 골목에서 그 소리가 이상하게 또렷했다.
"이새벽 씨?"
목소리가 빨랐다. 확인하듯이.
"네."
"한수진이에요. 저 쪽지 보낸."
수진은 새벽을 위아래로 훑었다. 빠르게. 무례하지는 않게. 뭔가를 재는 눈이었다. 쓸 만한지, 믿을 만한지. 새벽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자기도 똑같이 재고 있었으니까.
"몇 화 됐어요, 야간?"
"오늘이 첫날이에요."
수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게 전부였다. 놀라움도 아니고 걱정도 아닌, 그냥 정보를 받아들이는 얼굴.
"첫날에 커뮤니티 뒤진 거예요?"
"필요한 게 있어서요."
"리스트."
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은 한 박자 멈췄다가 팔찌를 한 번 딸각 굴렸다.
"받았어요?"
"창고에서 찾았어요. 오지호 씨가 숨겨둔 것 같더라고요."
"아." 수진의 목소리가 한 음 낮아졌다. 감탄도 아니고 안도도 아닌, 뭔가를 새로 계산하는 소리였다. "진짜 찾은 거예요?"
"네."
"다행이네." 그런데 다행이라는 말치고는 표정이 이상했다.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눈이 움직이지 않았다. "근데 여기 왜 나온 거예요. 리스트 있으면 됐잖아요."
새벽이 대답하지 않았다. 수진이 먼저 눈치를 챘다.
"…건드렸어요?"
침묵.
수진이 눈을 감았다 떴다. 팔찌를 두 번 딸각딸각.
"뭘 건드렸어요."
"파란 캔."
수진이 골목 벽에 등을 기댔다. 잠깐 하늘을 봤다. 새벽은 그게 한숨인지 생각인지 구별이 안 됐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얼마나 됐어요."
"한 시간쯤요."
"진열까지 했어요?"
"…네."
이번엔 수진이 아무 말도 안 했다. 딸각. 딸각. 딸각. 팔찌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골목이 그만큼 조용했다. 새벽은 자기 숨소리가 들릴 것 같아서 천천히 내쉬었다. 편의점 안이 보이는 각도로 몸을 틀었다. 카운터가 비어 있었다. 당연하다. 자기가 지금 여기 있으니까.
"야." 수진이 말했다.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는데도 또렷하게 들렸다. 벽이 소리를 모아주는 골목이었다. "그거 진짜야. 나 농담 안 해."
"알아요."
"아니, 그냥 '알아요'가 아니라—" 수진이 새벽을 똑바로 봤다. 골목 어둠 속에서도 눈이 또렷했다. "진열하면 뭔가가 올 수 있게 된다는 거, 들었어요?"
"들었어요. 아까 전화로."
"그러면 지금 이 편의점, 문 열려 있는 거예요. 일종의."
새벽은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문. 열려 있다. 냉장고 3번 칸에 빛이 없는 구멍. 유리문 안쪽에서 느껴지던 이상한 압력. 당기는 것 같은 감각. 새벽은 그것들을 착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었다. 아직 그 결정을 완전히 철회하지는 않았지만 — 지금 이 골목에서, 이 여자의 얼굴을 보면서, 그 결정이 조금씩 흔들렸다.
"얼마나 열려 있어요."
"그건 나도 몰라. 그게 문제야." 수진이 팔짱을 꼈다. 팔찌들이 한꺼번에 딸각 쏠렸다. "리스트에 있는 거 다 읽었어요?"
"대강."
"대강?"
"리스트 뒷면에 메모가 있었거든요. '진열하지 마.' 그거 먼저 봤는데."
수진이 잠깐 말을 멈췄다.
"뒷면에 메모가 있었어요?"
"네. 오지호 씨 필체인 것 같았어요. 리스트 다른 부분이랑 글씨체가 같았거든요."
"리스트 뒷면에 추가 메모를 썼다는 거, 나한테 말한 사람이 없었는데." 수진의 목소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조용해졌다. 처음의 날선 조용함이 아니라, 뭔가를 다시 계산하기 시작한 사람의 조용함이었다. "그 메모 사진 찍어놨어요?"
"아뇨."
"찍어요. 지금 당장."
새벽이 편의점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수진이 팔을 잡았다.
"잠깐." 팔찌가 딸깍 울렸다. 차가운 손이었다. "리스트 다 말해줄게요. 지금. 나중에 혼자 읽는 것보다 직접 듣는 게 나으니까."
새벽은 멈췄다. 다시 수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말해요."
수진의 리스트는 새벽이 창고에서 찾은 것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고, 겹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첫 번째. 바코드 없는 상품은 무조건 창고 선반 3번에 뒤집어 놓고 배송 장부에 '처리 완료' 체크. 스캔 금지. 스캔하면—"
"POS에 뜨죠."
"맞아. 근데 뭐가 떠요?"
"알 수 없는 문자열. 그리고 한글로 '진열 완료 후 삭제됩니다.'"
수진이 새벽을 봤다. 팔찌가 멈췄다.
"삭제됩니다?"
"네."
"…나는 '처리됩니다'라고 들었거든요." 수진이 작게 혀를 찼다. 혀가 차이는 소리도 골목에서는 선명했다. "매장마다 다른 건지, 아니면—"
"아니면?"
"버전이 다른 건지."
두 사람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삭제됩니다, 처리됩니다. 두 단어는 비슷해 보이면서도 전혀 달랐다. 처리는 어딘가로 옮겨진다는 뉘앙스였고, 삭제는 — 없어진다는 뜻이었다. 그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벽도 수진도 정확히는 몰랐다. 모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불쾌했다. 새벽은 목구멍 뒤에서 뭔가 차가운 것이 내려가는 감각을 느꼈다. 침을 삼켰다.
"우리 매장이 다른 건지, 아니면 내가 들은 버전이 틀린 건지." 수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느 쪽이든 좋은 쪽이 아닌 건 알겠는데."
"계속해요." 새벽이 먼저 말했다. 여기서 멈추면 생각이 너무 많아질 것 같았다. 생각이 많아지면 다리가 먼저 편의점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것 같았다.
수진이 새벽을 한 번 보고 이어갔다.
"두 번째. 새벽 두 시에서 네 시 사이, 카운터를 비우지 마. 손님이 없어도 앉아 있어. 화장실 가야 되면 두 시 전이나 네 시 넘어서 가라."
"이유는요."
"그 시간대에 들어오는 '손님'이 있대요. 그게 진짜 손님인지 확인하는 방법이 카운터에서 보는 것밖에 없대요."
"확인하는 방법이요?"
"눈을 깜빡이지 않아요."
새벽은 그 문장을 다시 들어야 했다.
"뭘요."
"눈을. 깜빡이지. 않아요." 수진이 또박또박 말했다. 한 글자씩 이를 찍어내듯이. "진짜 손님은 깜빡여요. 그게 아닌 것은 — 안 깜빡여요. 그냥 봐요. 계속. 당신을."
새벽의 등줄기를 뭔가가 훑고 지나갔다. 차가웠다.
"그냥 둬요. 상대 안 해. 말 걸면 안 돼. 뭔가 사고 싶다고 해도 계산해주면 안 돼. 그냥 '손님 저희 지금 재고 정리 중이라 계산 잠깐 멈춰요'라고 하고 시선을 돌려."
"그러면요?"
"나가요."
"나가요?"
"나가요."
새벽은 숨을 한 번 들이켰다. 길게. 골목 공기가 차가워서 폐 안쪽에서 느껴졌다.
"세 번째. 창고 안쪽 벽에 파란 스티커 있죠?"
"…봤어요. 둥근 거."
"건드리지 마. 뜯지 마. 특히 절대로." 수진이 잠깐 팔찌를 굴렸다. 딸각. "그게 거기 있는 이유가 있대요. 내 선임한테 들었는데, 자기는 이유를 몰랐어요. 그냥 건드리지 말라고만 했대요."
"선임이 누군지 물어봤어요?"
"이름 말해주기 싫어했어요." 수진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야간 알바 하는 사람들, 이름 잘 안 가르쳐줘요. 당신도 쪽지에 이름 먼저 말 안 했잖아요."
새벽은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이 바닥에서 이름을 먼저 내미는 사람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잃을 게 없다는 뜻이었다.
"오지호 씨도 그 스티커 알고 있었을까요."
"알았겠죠. 그 편의점 야간 오래 했으니까."
새벽이 생각했다. 오지호. 여자친구가 사라진 사람. 3년 전. 코드 없는 상품을 규칙대로 처리했는데 그날 이후 한 사람이 사라졌다. 규칙대로 했는데 사람이 사라졌다면, 그건 규칙이 틀린 건지, 아니면 규칙 안에 이미 그 결말이 포함되어 있었던 건지. 새벽은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꺼내면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고, 그 대답이 듣기 싫었다.
"수진 씨." 새벽이 입을 열었다. "오지호 씨 마지막으로 연락된 게 언제예요."
수진의 딸각이 멈췄다.
"6개월 전. 커뮤니티 쪽지."
"뭐라고 했어요."
"리스트를 수정해야 할 것 같다고요." 수진의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이번엔 낮아진 채로 올라오지 않았다. "자기가 알아낸 게 있다고. 나중에 정리해서 보내준다고."
"그다음에는요."
"읽음 처리가 됐는데 답장이 없었어요."
골목이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가로등도 없는 이 틈에서, 수진의 말이 벽에 흡수되지 않고 공중에 그냥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읽음 처리가 됐는데 답장이 없었어요. 그 사람이 어디서 그 쪽지를 읽었는지, 읽고 나서 어디로 갔는지, 새벽은 모른다. 지금도 모른다.
새벽이 편의점을 봤다. 유리문 너머로 카운터 불빛이 보였다. 형광등이 차갑게 켜져 있었다.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새벽 한 시 오십팔 분. 두 시까지 두 분.
"들어가야겠다." 새벽이 말했다.
"두 시 때문에?"
"네."
수진이 새벽의 팔을 잡지는 않았다. 대신 말했다.
"이미 하나 건드렸으면 늦었을 수도 있어."
새벽이 멈췄다.
발이 멈췄다. 호흡이 멈췄다. 심장만 계속 움직였다. 쿵, 쿵, 쿵. 형광등 아래 빈 카운터. 3번 칸의 구멍. 열려 있다는 문.
"늦었다는 게—"
"문이 이미 열렸을 수 있다고요." 수진이 똑바로 말했다. 눈이 새벽에게 고정됐다. "그 말이에요. 두 시 규칙이 평소엔 확률 문제라면, 오늘은 확률이 달라졌을 수 있어요."
새벽은 자기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손가락 끝부터였다. 앞치마 주머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열쇠가 손바닥에 닿았다. 차가운 쇳덩이. 오지호가 숨겨둔 것. 그게 지금 새벽의 손 안에 있었다.
"그래도 카운터에 있는 게 낫겠죠." 새벽이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단단하게 나왔다. 손이 떨리고 있는데도.
수진이 새벽을 봤다. 새벽이 수진을 봤다. 골목의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이 잠깐 서로를 봤다.
그러다 수진의 한쪽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용감하네요, 진짜로."
"용감한 게 아니라, 할 일이 남아서요."
"오지호 씨 CCTV."
"어떻게 알았어요."
"뻔하잖아요." 수진이 팔찌를 한 번 딸각 굴렸다. "나도 보고 싶었는데 점주가 안 보여줬어요. 박철민 씨, 그냥 안 보여주면 어떡해요?"
"강요는 못 하겠죠." 새벽이 말했다. "근데 반응은 볼 수 있어요."
수진이 새벽을 다시 한번 훑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달랐다. 재는 눈이 아니었다. 다른 눈이었다.
"연락 유지해요. 뭔가 생기면 바로 쪽지."
"네."
"그리고—" 수진이 짧게 끊었다. "오지호 씨 창고 열쇠, 어디 있어요."
새벽이 앞치마 주머니를 손으로 눌렀다. 열쇠의 무게가 손바닥에 느껴졌다. 쇳덩어리 하나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갖고 있어요."
"그거." 수진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처음으로. 지금까지 전부 다 단단하게 말해왔는데, 거기서 딱 한 번 갈라졌다. "잃어버리지 마요. 그 열쇠가 뭔지 나도 몰라. 오지호 씨가 일부러 거기 숨겨둔 거니까, 이유가 있을 거예요."
수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는 게 — 이상하게도, 다른 어떤 말보다 더 무서웠다.
새벽 두 시 정각.
새벽은 카운터 뒤에 앉았다. 골목의 차가운 공기가 아직 피부에 남아 있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창고 열쇠를 앞치마 주머니에서 꺼내 카운터 서랍 안쪽에 다시 넣었다. 오지호가 숨겨뒀던 그 자리에. 손가락이 서랍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았다.
때가 되면 알아.
그 말을 쓴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새벽은 모른다.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알고 있는 건 — 그 사람이 이 서랍에, 이 열쇠에, 이 편의점 곳곳에 뭔가를 심어뒀다는 것.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가 먼저 길을 뚫었다. 새벽은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뚫린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르면서.
편의점이 조용했다. 냉장고 팬 소리만 돌아갔다. 두 시 삼 분. 두 시 사 분. 새벽은 카운터에서 시선을 고정했다. 유리문. 진열대. 유리문. 진열대. 3번 칸은 보지 않기로 했다. 보면 다시 생각하게 되니까.
두 시 오 분.
유리문이 밀렸다.
딸랑.
새벽이 카운터 너머를 봤다.
손님이 들어왔다. 삼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후드 점퍼. 검은 마스크.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걸음이 조용했다. 편의점에 들어오면서 특유의 저항감이 있다. 문에서 냉기와 온기가 부딪히고, 발소리가 타일에 부딪히고, 감각들이 살짝 어긋난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냥 들어왔다. 공간이 그를 받아들인 것처럼. 저항이 없었다.
남자가 음료수 코너 쪽으로 걸어갔다.
새벽은 숨을 참았다. 수진의 말이 귀 안쪽에 박혀 있었다.
눈을 깜빡이지 않아요.
새벽은 카운터에서 보이는 각도로 몸을 틀었다. 남자의 옆얼굴이 보였다. 마스크 위로 눈이 보였다. 음료수 진열대를 훑고 있었다. 시선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새벽은 눈을 깜빡였다.
남자도 눈을 깜빡였다.
새벽의 심장이 두근, 하고 내려앉았다. 그다음에 차오른 감정은 안도가 아니었다. 안도라면 긴장이 풀려야 했다. 그런데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가 더 죄어들었다. 깜빡인다는 걸 확인했다. 확인했다는 건 — 확인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지금 이 편의점이, 새벽이, 이 남자의 눈꺼풀 움직임을 세고 있다는 뜻이다.
남자가 이쪽을 봤다.
마스크 너머로 목소리가 왔다.
"혹시 이 매장에서 오지호 씨 알아요?"
새벽의 손끝이 서랍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카운터 너머. 낯선 남자. 눈을 깜빡이는 사람.
오지호를 아느냐는 질문.
새벽은 대답하기 전에 딱 한 가지를 확인했다.
남자의 눈. 한 번 깜빡였다. 두 번. 세 번.
정상이었다. 근데 그걸 확인했다는 사실 자체가 —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편의점에서 손님의 눈 깜빡임을 세는 야간 알바. 이게 지금 새벽의 현실이었다.
"죄송한데요." 새벽이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안 떨렸다. 손은 아직 서랍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저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요."
남자가 새벽을 봤다. 잠깐. 마스크 위 눈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게 전부였다. 남자가 음료수를 하나 들고 카운터로 왔다. 계산을 했다. 바코드가 찍혔다. POS 화면에 정상적인 금액이 떴다. 영수증이 나왔다. 거스름돈을 받았다. 나갔다.
딸랑.
새벽은 그 뒷모습이 골목 쪽으로 사라지는 걸 유리문 너머로 지켜봤다. 남자는 멀어지면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들어갔다가, 빛이 끊어지는 지점에서 그냥 사라졌다.
새벽은 숨을 내쉬었다. 폐 안쪽에 차가운 공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수진 씨한테 쪽지 보낼까.
그러다 손을 멈췄다.
저 남자가 물었다. 오지호를 아느냐고. 두 시가 넘어서. 이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 커뮤니티에 오지호를 찾는 글이 올라온 지 6개월이 됐다. 그 글을 쓴 수진은 새벽이 연락했을 때 가까이 있었다. 지금 근처 있어요. 새벽 두 시에 가까운 시간에, 이 편의점 근처에. 그리고 저 남자도 이 시간에, 이 편의점에서, 오지호를 물었다.
그게 우연이면 우연이고, 아니면 — 아닌 것이다.
새벽이 카운터 서랍을 열었다. 열쇠를 꺼냈다. 손에 쥐었다. 오지호가 숨겨둔 열쇠. 리스트를 뒤집어 '진열하지 마'라고 메모를 남긴 사람의 열쇠. '때가 되면 알아'라고 쓴 사람의 열쇠.
창고.
오지호는 리스트를 창고 2번 선반에 숨겼다. 창고 안쪽 벽에는 파란 스티커가 있다.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 왜 열쇠를 여기다 숨겼을까. 창고에 한 번 더 가라는 뜻이라면 — 창고에 뭔가 더 있다는 뜻이 아닐까.
리스트를 찾았다. 메모를 찾았다. 뒷면을 찾았다. 그다음에 찾아야 할 게 있다면, 그건 창고에 있다.
새벽이 열쇠를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시 십 분.
두 시에서 네 시 사이에는 카운터를 비우지 말라고 했다. 수진이 말했다. 눈을 깜빡이지 않는 손님이 올 수 있다고. 근데 창고는 카운터 오른쪽 복도 끝이다. 삼십 보. 문을 열고 닫으면 이 분도 안 걸린다. 삼십 보와 이 분 사이에서 뭔가 일어난다면 — 그건 일어나는 거고,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냥 가는 것이다.
새벽은 카운터에서 나왔다.
복도 불빛이 켜졌다. 발소리가 타일에 찍혔다. 하나. 둘. 셋. 차가운 공기가 등 뒤에서 따라왔다. 네. 다섯. 여섯. 냉장고 팬 소리가 멀어졌다. 복도 끝. 창고 문 앞.
열쇠를 꽂았다.
손목에 힘을 줬다.
돌아갔다.
문이 열렸다.
창고 안은 어두웠다. 아까 들어왔을 때와 같은 어둠이었다. 새벽이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불이 켜졌다. 선반. 박스. 2번 선반, 리스트를 꺼낸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안쪽 벽. 파란 스티커. 둥글고 낡은.
스티커 옆에 뭔가 있었다.
처음에는 못 봤다. 2번 선반 뒤쪽, 벽과 선반 사이 좁은 틈. 선반이 벽에 완전히 붙지 않고 손가락 두 개 너비만큼 떠 있는 그 틈. 거기에 작은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접혀 있었다. 색이 누래 있었다. 오래됐다는 뜻이었다.
새벽이 손을 넣었다. 긁혔다. 꺼냈다.
형광등 아래에서 펼쳤다.
빛이 선명했다. 글씨가 선명했다. 창고에서 혼자 종이를 펴드는 소리가 선명했다.
오지호의 필체였다. 리스트와 같은, 눌러 쓰는 습관의 글씨. 오래 눌러써서 뒷면에 자국이 남는 사람의 글씨.
딱 한 문장이었다.
박철민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형광등이 차갑게 켜져 있었다. 창고 안이 선명하게 밝았다. 글씨가 선명했다. 모든 게 선명하게 보이는데.
그래서 더 무서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