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형이라고 부르지 마
규칙 3번을 처음 소리 내어 읽은 건 사흘째 아침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도 대답하지 말 것.
한새벽은 수첩을 펼쳐 그 문장 옆에 한 단어를 눌러 적었다. '왜.' 볼펜 심이 종이를 파고드는 감각이 손바닥까지 전해졌다. 그는 잠시 그 글자를 바라보다가 수첩을 덮었다. 이유를 모르는 규칙은 지키기 어렵다. 이유를 아는 규칙은 더 무섭다. 그리고 이 섬에서, 새벽은 이미 후자 쪽이 더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등대 안은 낮에도 어두웠다. 천장 쪽에 달린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안개에 걸러지면, 등대 내부는 마치 물속 같은 빛깔을 띠었다. 회색빛이 물처럼 고여 있는 곳—소리도 거기 잠겨 있는 것처럼 뭉개지고 느려졌다. 새벽은 그 안에서 하루의 절반을 기계 점검으로 보냈다. 손이 바빠야 머리가 조용했다. 머리가 조용해야 이 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점심을 건너뛰고 오후 세 시쯤, 비상 발전기 배선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아니었다. 노크도 아니었다. 누군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새벽아."
공기가 얼어붙었다.
새벽은 배선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손목에서 맥박이 뛰는 게 느껴졌다—너무 선명하게, 귀에 들릴 것처럼. 피가 손끝까지 밀려왔다가 다시 빠져나갔다. 왼손이 저절로 오른쪽 손목 흉터 위로 움직였다가, 새벽이 의식적으로 멈췄다. 지금은 아니다.
목소리였다. 사람의 목소리인데 사람 같지 않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나이를 알 수 없는, 그러나 어딘가 낯익은 음역의 목소리. 낯익다는 게 문제였다. 낯설었다면 그냥 무시하면 됐다. 낯익기 때문에 더 무서웠다—무시하는 데 힘이 들었으니까.
"새벽아, 나야."
새벽은 천천히 일어섰다. 공구를 내려놓는 금속 소리가 등대 내부에서 짧게 울렸다가 사라졌다. 그는 철문 쪽으로 걸어가지 않았다. 대신 벽 옆 좁은 선반에 놓인 수칙 노트를 집어 들었다. 규칙 3번.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도 대답하지 말 것.
그래. 대답하지 않으면 된다.
새벽은 노트를 내려놓으며 한 번 더 그 문장을 읽었다. 두 번째로 읽으니까 더 이상했다. '대답하지 말 것'이 아니라 '대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적혀 있어야 맞는 말 같았다.
문제는 그 목소리가 저녁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규칙을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근데 몸은 달랐다.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깨가 철컥 굳었고, 손끝이 차가워졌으며, 숨이 한 박자씩 늦게 나왔다. 새벽은 그 반응이 싫었다. 자기 몸이 자기 말을 안 듣는 것이, 유령보다도 더 불쾌했다. 공포는 참을 수 있었다. 공포에 반응하는 몸은 참기 어려웠다.
저녁 일곱 시. 등대 등명기에 불을 올리는 시간.
새벽은 계단을 올랐다. 삼십사 개. 발걸음마다 계단이 삐걱거렸고, 그 소리가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잠깐씩 덮었다. 등명기 점등 레버를 올리는 순간, 거대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안개를 가르는 원형의 빛살. 바다 쪽을 향하고, 섬을 향하고, 다시 바다를 향해—
빛이 해안선을 훑는 순간, 새벽은 봤다.
사람이었다.
한 명이었다. 체구가 작았다. 어른이라기엔 가벼운 실루엣—바람에 흔들릴 것처럼 얇은, 그러나 꼿꼿하게 서 있는. 빛이 지나가자마자 안개가 그 형체를 다시 삼켰지만, 새벽은 그 형체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고개가 위로 향해 있었다. 등대를, 이 유리를, 이 안의 새벽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빛이 한 바퀴를 더 돌았을 때—형체는 없었다.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새벽은 멈추지 않았다.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수첩을 꺼내 한 줄 눌러 썼다. 해안. 한 명. 작음. 이쪽 보고 있었음. 그리고 수첩을 덮으면서,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번에는 왼손을 억누르지 않았다.
오른쪽 손목 흉터를 엄지가 천천히 쓸어내렸다. 식은 철 위를 긁는 것처럼 매끈하고 차가운 감각. 오래된 감각. 새벽은 그게 진정제처럼 느껴진다는 게 싫었고, 동시에 멈출 수가 없었다. 흉터는 항상 거기 있었다. 달아나지 않고, 불러도 안 오는 것들과 달리—흉터는 항상 거기 있었다.
밤 열한 시.
목소리가 바뀌었다.
낮에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와는 달랐다. 이건 더 가까웠다. 더 작았다. 더—정확했다.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문 바로 너머에서, 목재 한 장 두께 너머에서 흘러드는 것처럼.
"형."
새벽의 손이 수첩 위에서 멎었다.
한 글자였다. '형.' 경상도 억양 특유의 짧은 끝맺음.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 그냥 뭉텅 잘린 것 같은 발음. 발음이 아니라 호흡이 만든 것 같은, 말이라기보다 숨처럼 나온 것 같은 소리. 새벽은 그 억양을 세상에서 딱 한 명한테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대답하지 말 것.
새벽은 숨을 참았다.
"형, 나 여기 있어."
잠겼다. 철문은 잠겨 있었다. 이중으로 걸쇠도 걸려 있었다. 새벽은 일어서서 문에서 최대한 먼 벽 쪽에 등을 붙였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렸다—느리게, 그러나 세게. 달리다가 세게 넘어진 것처럼, 한 번 치면 아픈 방식으로. 마치 뭔가가 안에서 나오려는 것처럼.
"형, 춥다."
새벽은 눈을 감았다.
여울이—한여울이—마지막으로 그에게 전화했던 건 밤 열두 시가 넘어서였다. 새벽은 그때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든 척하고 있었다. 진동 소리를 들었다. 화면에 뜬 이름을 봤다. 새벽은 그 이름을 보면서, 이미 자기가 받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피곤했기 때문에. 내일 얘기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내일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건—몰랐기 때문에.
내일은 오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소리가 났다. 긁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는 소리였다. 평평하고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마치 문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이 힘이 빠져 흘러내리는 것처럼. 새벽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소리에 형태를 붙이지 않으려 했다. 소리에 형태를 붙이는 순간, 그건 다른 것이 된다는 걸 알았다.
"형이 받았으면."
새벽이 눈을 떴다.
그건 문장이 아니었다. 끝맺음이 없었다. 형이 받았으면— 다음이 없었다. 공기 중에 잘린 채로 걸려 있는 말. 문법적으로 미완성인 게 아니라, 끝내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잘린 말. 새벽은 그 말이 어디서 끝나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선택지가 너무 많았다—좋았을 텐데, 달랐을 텐데, 지금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알기 때문에 못 들은 척할 수가 없었다.
발이 움직였다.
한 걸음. 두 걸음. 새벽은 자기 발이 움직이는 걸 내려다봤다. 멈추려 했다. 멈춰지지 않았다. 멈추는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지금 이 순간은 그 방법이 작동하지 않았다. 세 걸음째에 발이 철문 앞에 닿았고, 손이 걸쇠 위로 올라갔다.
규칙 3번.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도 대답하지 말 것.
새벽은 자기 손을 봤다. 걸쇠를 쥔 손이 떨렸다. 규칙을 어기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어기고 싶지 않은데 손이 멈추지 않는 것이—그게 더 정확한 공포였다.
손 안에서 걸쇠가 딸깍 소리를 냈다.
문 너머가 조용해졌다. 소리가 사라졌다. 기다리는 것처럼.
그게 더 나빴다.
소리가 있을 때는 거기 뭔가가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소리가 없어지면—없어진 건지,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소리 없이 문을 통과해서 이미 안에 있는 건지—알 수가 없었다.
새벽은 걸쇠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로 10초를 셌다. 20초. 30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안개 속 바람 소리만이 등대 외벽을 긁었다. 긁고 또 긁다가 스러졌다.
새벽은 걸쇠를 열었다.
문을 다 열지는 않았다.
한 뼘. 딱 한 뼘만 열었다. 안개가 그 틈으로 빨려들듯 흘러들어왔다. 차가웠다—피부가 아니라 폐 속으로 직접 들어오는 것 같은, 바닷물을 한 모금 삼킨 것 같은 차가움이었다. 새벽은 그 차가움이 목 안에서 내려가는 것을 느끼면서 틈 사이로 바깥을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해안까지 이어지는 좁은 돌길. 양쪽에 자란 억새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흔들렸다. 발자국도, 형체도, 그림자도—없었다. 방금까지 거기 있던 것처럼 목소리가 났었는데. 등대 문 한 뼘 너머에서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는 소리를 냈었는데.
새벽은 틈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바깥 공기를 쥐듯이. 차갑고, 축축하고, 염분 냄새가 났다. 소금 냄새—그리고 그 아래 깔린 다른 냄새. 뭔지 알 수 없지만 비어 있지 않은, 무언가 머물렀다 간 자리에서 나는 냄새.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그러다 봤다.
문 아래쪽.
돌길 위에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등대 쪽으로 오는 방향이 아니라—등대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방금 여기 있었다가 몸을 돌린 발자국. 오는 방향의 발자국은 없었다. 오직 나가는 방향만. 마치 처음부터 등대 안쪽에서 나온 것처럼, 문을 통과해서 나간 것처럼—그쪽 방향으로만 찍혀 있었다.
크기가 작았다. 성인 남성의 발보다 훨씬 작은. 성인 남성의 발이 아니었다.
새벽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걸쇠 두 개를 다 잠갔다. 문 앞에 가져다 놓은 공구 상자를 발로 밀어붙였다. 그러고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철벽이 차갑게 등을 눌렀다. 그 차가움이 오히려 좋았다. 확실히 거기 있었으니까.
무릎 위에 이마를 올렸다.
규칙 3번.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도 대답하지 말 것.
어겼다. 열지는 않으려 했지만 걸쇠를 열었다. 안 보려 했지만 발자국을 봤다. 대답은 안 했으니까—규칙 3번을 다 어긴 건 아니었다. 그러나 문을 연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는지 충분하지 않았는지, 결과가 뭔지—노트에는 써 있지 않았다. 규칙은 금지만 나열할 뿐, 어겼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 공백이 규칙 자체보다 무서웠다.
새벽은 수첩을 꺼냈다. 손이 조금 덜 떨렸다. 아주 짧게 눌러 썼다. 규칙 3번. 어겼음. 아직 살아 있음. 그리고 한 줄 더. 발자국. 작음. 나가는 방향만.
마지막으로 한 줄을 더 쓰려다가, 멈췄다. 이름을 쓰면 달라지는 것 같았다. 쓰지 않으면 아직 그냥 '목소리'고, '형체'고, '발자국'이다. 이름을 쓰는 순간—그건 다른 것이 된다.
새벽은 수첩을 덮었다.
다음 날 아침, 오판석 노인이 해안가에 있었다.
새벽은 노인을 보고 곧장 다가가지 않았다. 먼저 발자국을 확인했다. 어젯밤 등대 문 앞의 발자국은 사라지고 없었다. 젖은 돌길에 희미하게라도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아무것도 없었다. 파도가 쓸어간 것도 아니었다. 거기까지 파도는 닿지 않았으니까. 그냥 없었다.
수첩에 한 단어 적었다. 사라짐.
노인은 새벽이 다가가는 것을 보지 않는 척했다. 그러면서도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등을 돌리고 앉아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새벽은 노인으로부터 두 걸음 떨어진 바위에 앉았다. 말이 없었다. 두 사람 다.
파도 소리가 그 침묵을 채웠다. 여기 파도 소리는 육지 바다와 달랐다. 더 묵직했다—섬 전체가 울리는 것처럼. 갈매기 한 마리가 멀리서 울고 사라졌다.
새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규칙 3번. 어기면 어떻게 됩니까."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했다. 새벽은 기다렸다. 파도가 세 번 더 들어왔다 나갔다. 억새가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거 뭔 규칙이고."
노인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새벽을 향한 게 아닌 것처럼—그러나 분명히 새벽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 섬의 노인은 모든 말을 그런 식으로 했다. 새벽한테 하면서 새벽한테 하지 않는 것처럼. 질문에 답하면서 답하지 않는 것처럼.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지 말라는."
노인이 콧소리를 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미 아는 걸 들었을 때 내는 소리. 잠시 후 노인이 말했다.
"대답을 안 했으면 됐제."
새벽이 노인을 봤다. 노인은 여전히 바다를 향해 있었다.
"문은요."
노인이 처음으로 새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이었다. 일 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눈이 마주쳤다가 다시 바다를 향했다—그 일 초 안에 노인의 눈에서 새벽이 읽은 건, 안쓰러움이었다. 동정이 아니었다. 안쓰러움. 뭔가를 알고 있는데 말해주지 못하는 사람의 눈빛.
"문을 열었나."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하는 말의 형태를 빌린 확인이었다. 새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필요 없었다. 노인이 이미 알고 있었다—그게 소름이었다. 새벽이 어젯밤 혼자 문을 열고, 발자국을 보고, 다시 문을 잠근 것을. 노인이 어떻게 알고 있었다.
"규칙을 다 지킨 사람은 이 섬에 없어."
노인이 일어서며 말했다. 처음으로 직접적인 문장이었다. 바다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먼 억새 쪽을 향하며, 짧고 단단하게. 새벽이 몸을 세웠다. 무언가 더 나올 것 같았다. 그 문장 뒤에 붙어야 할 말이—설명이, 경고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노인이 걸음을 옮겼다. 안개 쪽으로.
"어르신."
새벽이 불렀다. 노인이 멈추지 않았다. 새벽은 한 걸음 따라가다가, 멈췄다. 뒤따라가면 노인이 말해줄 것 같지 않았다. 다른 방식이 필요했다.
"그 노트. 12번째 페이지."
노인의 발이 반 박자 늦게 움직였다.
멈춤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았다. 그러나 새벽은 봤다. 발이 다음 걸음을 내딛기 직전, 아주 미세하게—공중에서 한 박자 지체되는 것을. 무의식이 만든 반응이었다.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것을 다리가 배신한 것처럼.
노인은 대답 없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새벽은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노인이 사라진 방향을 봤다. 안개가 발등을 핥고 지나갔다. 파도가 다시 들어오고 나갔다. 억새가 흔들렸다. 새벽 빼고 다 움직이는 것 같았다.
수첩을 꺼냈다. 아주 천천히, 눌러서 적었다. 노인—알고 있다. 12번째.
그 아래 한 줄 더.
왜 말 안 하나.
그리고 그 아래, 쓰려다 멈췄다가 결국 쓴 한 줄.
규칙을 다 지킨 사람은 없다—는 게, 지킬 수 없게 만들어졌다는 뜻인가. 아니면 지키면 안 된다는 뜻인가.
새벽은 그 문장을 쓰고 나서 한 번 읽었다. 그리고 그 아래 선을 그어 지웠다. 지운 게 아니었다. 지울 수 없었다. 선 아래로 글자 형태가 그대로 비쳤다.
등대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돌길 중간쯤이었을 때, 등대 2층 유리창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작은 창. 새벽이 없었는데—등을 켜두지 않았는데—창에 빛이 어렸다. 아주 희미하게. 불꽃이 아니라 빛 자체가 모인 것 같은 흐릿한 백색. 안개가 만들어낸 착시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안개는 자기 형태를 갖지 않는다. 형태는 다른 무언가가 만든다.
새벽은 발을 멈췄다.
창에 형체가 있었다.
창문에 기대어 서서 새벽을 내려다보는 형체. 체구가 작았다. 어깨가 좁았다. 옆머리가 짧았다—귀 위로 가지런히 쳐낸 것처럼 짧은 옆머리. 빛이 형체의 뒤에서 새어나오는 것인지, 형체 자체가 빛을 머금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새벽의 가슴 안에서 뭔가 쿵 내려앉았다.
아래로, 아주 아래로 내려앉아서—올라오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일 초. 이 초. 형체가 움직이지 않았다. 새벽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억새를 한 번 훑고 지나갔다. 그 사이에도 형체는 창에 기댄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 거리에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더 선명했다.
새벽은 달리지 않았다. 달리면 안 된다고 어딘가에서 알고 있었다—빠르게 움직이면 그게 쫓기는 게 된다고, 쫓기는 순간 다른 것이 시작된다고. 빠르게 걷는 것과 달리는 것 사이—딱 그 경계에 서서 돌길을 올랐다.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서, 걸음 소리 사이로 박동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계단을 올랐다. 삼십사 개. 발이 계단을 밟을 때마다 등대가 울렸다. 2층 문을 밀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창가에 아무것도 없었다. 빛도 없었다. 형체도 없었다. 창문 유리에는 안개가 맺혀 있을 뿐이었다. 물방울이 유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없었다—고 새벽이 숨을 내쉬려 했을 때.
창 앞으로 걸어가서, 유리에 맺힌 물방울 위로 손가락을 짚었다. 차가웠다. 손가락이 유리 위를 쓸었다.
손가락 끝에 닿았다.
유리 안쪽에, 김으로 쓴 것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글씨. 안개가 만든 게 아니었다. 유리 안쪽에서, 등대 내부에서 누군가 손가락으로 직접 쓴 것처럼—수증기 위에 눌러서 쓴 것처럼 또렷하게.
세 글자.
다 알아.
새벽이 멈췄다.
다 알아.
한여울 특유의 필체였다. 획이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고 마지막 획이 짧게 잘리는—두 달 동안 냉장고에 붙어 있던 메모지에서 본 필체. 쇼핑 목록이 적혀 있던. 과자 이름이랑 세제 이름이 삐뚤빼뚤 적혀 있던. 새벽이 그 메모지를 버리지 못해서 냉장고 옆면에 그대로 뒀던—지금도 거기 붙어 있을.
새벽은 유리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글씨가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물방울이 흘러내리며 글자를 지우는 중이었다. 다 알— 마지막 글자가 흘러 번졌다. 새벽은 그것을 막으려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손가락을 유리에 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글씨가 지워지는 동안 손가락 끝에서 차가운 물기가 전해졌다. 안개의 온도. 바다의 온도.
새벽은 수첩을 꺼내지 않았다. 이번엔 적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유리가 다시 흐려지는 것을 봤다. 글씨가 완전히 지워질 때까지. '다'가 지워지고, '알'이 지워지고, '아'가 마지막으로 흘러내려 번진 후—창 전체가 고르게 흐릿해졌다.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그런데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보이는 게, 가장 무서웠다.
창 너머 안개가 등대를 조용히 삼키고 있었다. 등대가, 이 방이, 새벽이—천천히 흐릿해지고 있었다. 안개 안에서는 경계가 사라진다. 안에 있는 것과 바깥에 있는 것의 경계가. 살아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가.
새벽은 처음으로—이 섬에 온 이후 처음으로—이 질문을 똑바로 직면했다.
여울이가 다 안다는 게, 내가 모르는 것까지 안다는 뜻이면.
여울이는 내가 받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나.
그게 경고인가. 아니면 시작인가.
12번째 규칙은 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