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찢긴 페이지
배는 새벽 네 시에 떠났다.
안개 때문이었다. 선착장에서 뱃사람이 말했다. "지금 출발 안 하면 낮에도 못 가요. 거기 안개는 사람 눈을 막는 게 아니라 먹어버리거든." 짧고 평탄한 말이었다. 특별히 겁주려는 의도도 없는, 그냥 사실을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게 더 나빴다.
한새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첩을 꺼내 짧게 적었다. 안개. 먹는다.
그리고 배에 올랐다.
갑판에서 육지가 사라지는 데는 삼 분도 걸리지 않았다. 엔진 소리, 파도가 철판을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흰색이었다. 흰색이라는 말도 정확하지 않았다. 색이 없는 게 아니라 색이 지워진 것 같았다—누군가 이 바다 위에 존재했던 모든 것을 지우개로 문질러버린 것처럼.
새벽은 난간에 두 손을 짚고 서서 그 흰색 속을 들여다보았다. 안개는 단순히 앞을 가리는 게 아니었다. 두께가 있었다. 층이 있었다. 가까운 안개는 투명하고, 그 너머 안개는 불투명하고, 더 너머의 안개는 이미 다른 무언가였다—더 이상 기체라고 부르기 어려운 어떤 것. 어디선가 물 냄새가 아닌 다른 냄새가 섞여 왔다. 소금도 생선도 아닌, 젖은 돌 위에 이끼가 수십 년 쌓인 것 같은 냄새. 시간의 냄새라는 말이 있다면 이런 것일 거라 생각했다. 새벽은 그 냄새를 폐 깊이 들이마셨다.
여기 있었어?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생각도 문장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그냥 냄새였고, 그냥 그리움이었다. 그리움이라는 단어조차 너무 깨끗했다. 이건 더 더럽고, 더 오래되고, 더 무거웠다. 죄책감과 그리움이 한 덩어리로 엉겨붙어서 가슴 한쪽에 눌어붙어 있는 것—새벽은 그것에 이름 붙이기를 일 년째 포기하고 있었다.
한여울이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 밤에도 안개가 짙었다고 했다. 새벽은 그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진동이 세 번 울리는 것을 보면서 손을 대지 않았다. 이유는 사소했다—피곤했다. 내일 하면 되지, 생각했다. 내일이 없다는 걸 그날 밤은 몰랐다.
한 달 뒤 여울은 없어졌다.
시체도 없었다. 유서도 없었다. 단서라면 여울이 마지막으로 이 섬에 다녀왔다는 사실뿐. 경찰은 실종으로 처리했고, 부모는 사고사로 결론 내렸다. 빠르게. 너무 빠르게. 마치 결론을 먼저 정해두고 그 안에 사실을 욱여넣은 것처럼. 새벽만 아직 결론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여기 왔다. 등대지기 구인 공고를 보자마자 이름을 적어 냈다. 자격도 경험도 없었다. 그럼에도 채용됐다. 면접도 없었다. 서류 검토 흔적도 없었다. 이틀 만에 이메일 한 통이 왔다. 채용되셨습니다. 준비되면 오세요. 그것뿐이었다.
새벽은 그 이상함을 수첩에 적어두고 일단 넘겼다.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적어두고 나중으로 미루는 것—그것이 새벽이 이 세계를 견뎌온 방식이었다.
섬은 두 시간 후에 나타났다.
정확히는, 섬이 나타난 게 아니었다.
안개가 한 군데에서만 살짝 열렸다. 손이 찢어놓은 것처럼—아래쪽은 두껍고, 위쪽은 얇고, 그 틈새가 정확히 하나였다. 그 틈새로 등대가 먼저 보였다. 육지도 해안선도 아니고, 등대 불빛이 먼저였다. 하얗고 느리게 회전하는 그 빛이 안개를 한 번 쓸고 지나갈 때마다, 섬의 윤곽이 찰나씩 드러났다 사라졌다. 드러났다 사라졌다.
숨을 쉴 때마다 흉곽이 수축하듯이, 섬이 그렇게 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다.
새벽은 난간을 더 세게 쥐었다.
불빛이 열두 번 돌면 새벽이 온다. 수칙 노트의 첫 줄은 나중에야 읽었지만, 그때 그 말이 먼저 몸으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뼈가 먼저 알아챈 것처럼.
선착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뱃사람이 짐을 내려주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작별 인사도 없었다. 주의사항도 없었다. 그냥 엔진을 올리고 사라졌다. 엔진 소리가 안개 속으로 멀어졌다. 얇아졌다. 없어졌다.
새벽은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 바닥에 남은 짐 가방을 한 손으로 들었다. 그러고 섰다.
침묵이 압력처럼 귓속으로 밀어닥쳤다.
파도 소리조차 없었다. 파도는 분명히 있었다—선착장 아래 물이 나무 기둥을 핥는 게 보였다. 그런데 소리가 없었다. 있어야 할 소리가 없는 것. 새벽은 그 구멍 뚫린 침묵 속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서운 건지 단지 낯선 건지 아직 판단하지 못했다. 그냥 수첩을 꺼내 적었다. 소리 없음. 그리고 걸었다.
등대로 가는 길은 표지판 하나 없었다. 그냥 등대를 보면서 걸으면 됐다. 불빛이 회전할 때마다 앞의 길이 잠깐씩 밝아졌다가 꺼졌다. 밝을 때 두 발짝, 어둠 속에서 두 발짝. 그렇게 올라갔다. 자갈 위를 걸을 때 소리가 났다. 그게 이 섬에서 새벽이 처음으로 들은 소리였다. 자기 발소리. 자기 발소리뿐인 곳. 새벽은 그것도 수첩에 적고 싶었지만, 걸으면서 쓰기에는 어두웠다.
등대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철제 문을 밀자 녹슨 경첩이 낮게 신음했다. 살아있는 것의 소리 같았다. 잠을 자다 깨어난 것의 소리. 안에서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밀폐된 공간 특유의, 오래된 습기와 쇠 냄새, 그리고 그 아래 희미하게, 누군가 살았던 냄새. 음식도 아니고 세제도 아닌. 그냥 사람의 냄새. 새벽은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손이 잠깐 멈췄다.
손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켜지는 데 시간이 걸렸다. 깜빡, 깜빡, 하다가 형광등이 간신히 붙었다. 눈을 찌르는 빛이 아니었다. 빛이 있는데도 여전히 어두운 것 같은, 노란빛으로 기울어진 형광등이었다. 오래되어 색이 변한 것.
좁고 낡은 공간이었다.
1층은 간단한 주방 겸 거실이었다. 낡은 나무 탁자 하나, 의자 두 개. 그런데 한쪽 의자는 다리가 테이프로 묶여 있었다—박스 테이프를 여러 겹 둘둘 감아서. 왜 다리를 묶어놨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부러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묶여 있었다. 마치 의자가 혼자 움직이는 것을 막으려는 것처럼. 새벽은 그 의자를 삼 초쯤 바라봤다가 눈을 뗐다.
싱크대 위에는 누군가 쓰다 남긴 흔적들이 있었다. 컵 두 개. 아직 절반 남아 있는 쌀. 세제. 그리고 탁자 위 한가운데에—
노트 한 권.
표지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갈색 가죽 표지. 모서리가 닳고 페이지들이 물기에 쪼글쪼글 말라붙어 있었다. 여러 번 젖고 마른 것. 새벽은 배낭을 내려놓지도 않고 탁자로 걸어가 그것을 들었다. 무게가 생각보다 묵직했다. 그냥 종이 무게가 아닌 것 같았다. 새벽은 그런 생각이 드는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판단했다. 판단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펼쳤다.
첫 페이지에 손글씨가 가득했다. 잉크가 번진 곳이 있었고, 글씨가 중간에 흔들리는 곳도 있었다. 글씨체가 균일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쓴 것인데 상태가 다른 여러 사람이 쓴 것처럼—어떤 부분은 반듯하고, 어떤 부분은 기울어지고, 어떤 부분은 눌려 있었다. 손이 떨리는 상태에서 쓴 것처럼. 혹은, 쓰는 동안 손이 떨리기 시작한 것처럼.
수칙 노트 — 이 규칙을 모두 따르는 한, 등대는 당신을 지킨다.
1. 등대 불빛은 밤 열두 시가 되기 전에 반드시 켜야 한다.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2. 불빛이 꺼지면 창밖을 보지 마라. 절대로. 3. 안개가 짙어지는 날 밤, 해안 쪽에서 소리가 들려도 나가지 마라. 4. 밤 두 시에서 세 시 사이,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소리가 나도 문을 열지 마라. 5. 등대 계단 열여섯 번째 칸은 밟지 마라. 6. 새벽 네 시, 불빛이 열두 번 돌고 난 뒤에는 30초간 눈을 감아라. 7. 식사는 혼자 하라. 의자가 두 개라도 한 자리만 써라. 8. 노크 소리가 세 번 이하이면 열어도 된다. 네 번부터는 열지 마라. 9.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도, 먼저 "누구냐"고 물어라. 대답이 오면 열어도 된다. 대답이 없으면—
아홉 번째 규칙 뒤에 잉크가 번져 있었다. 번진 건지, 누군가 손으로 문질러 지운 건지. 의도적으로 지운 것인지 사고인지도 알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그렇게 된다는 걸 새벽은 알았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쓴 사람이 스스로 문질렀다면. 쓰고 나서 쓴 것을 없애기로 결정했다면.
무엇 때문에.
새벽은 계속 읽었다.
열 번째, 열한 번째 규칙은 읽었다.
그리고 열두 번째 페이지가 없었다.
찢겨 있었다. 깨끗하게 잘린 게 아니었다. 가위로 자른 게 아니었다. 거칠게, 급하게, 방향을 바꿔가며. 페이지 끄트머리가 너덜너덜하게 남아 있었다—얼마나 빠르게 뜯어냈으면 종이가 그렇게 찢어졌을까. 찢긴 자리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종이 결이 날카롭게 손끝을 스쳤다. 미세한 통증이었다. 새벽은 손끝을 떼지 않았다. 그 날카로움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열두 번째 규칙.
누군가 이것을 없애고 싶었다. 이 노트를 등대에 두면서—이것만은 가져가거나, 태우거나, 물에 담그지 않고, 찢었다. 찢어서 버린 게 아니라 찢은 채로 노트를 여기 두고 갔다. 빈자리가 보이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그러면서도 내용은 남기지 않았다.
왜 노트 자체를 없애지 않았나.
수첩을 꺼내 적었다. 열두 번째 — 없음. 누가. 왜.
세 단어.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금은.
자리를 잡고 짐을 푸는 데 한 시간쯤 걸렸다.
등대 2층이 침실이었다. 천장이 낮고 창문이 하나였다. 창문은 바다 쪽을 향해 있었다. 새벽은 침대 위에 침낭을 펼치고 앉아 수칙 노트를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세 번 읽었다. 규칙 7번에서 눈이 멈췄다. 의자가 두 개라도 한 자리만 써라. 그 말이 이상했다. 두 개라도, 라는 표현. 두 개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쓴 문장이었다. 처음 온 사람에게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었다. 두 개가 왜 거기 있는지 이미 아는 사람이 쓴 것이었다. 의자가 왜 두 개인지—묶인 의자가 왜 묶여 있는지—수칙 노트는 말하지 않았다.
아홉 번째 규칙에서 지워진 부분. 열두 번째 페이지의 빈자리.
두 가지가 같은 종류의 것인지 다른 종류의 것인지, 새벽은 아직 알 수 없었다.
불빛 점검을 해야 했다.
등대 조명 패널은 3층이었다. 계단을 오르는데—새벽은 열여섯 번째 칸을 세었다. 하나, 둘, 셋. 발걸음마다 셌다. 열다섯 번째 칸에 발을 올리고 멈췄다. 다음 칸을 내려다봤다. 다른 칸과 다르지 않았다. 낡은 철제 계단. 녹이 슨 곳. 새벽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열일곱 번째 칸으로 바로 건너뛰었다.
계단이 삐걱했다. 열일곱 번째 칸이.
열여섯 번째 칸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새벽은 그 사실을 수첩에 적었다. 그리고 계속 올라갔다.
불빛은 이상 없었다. 회전 속도 정상. 밝기 정상. 패널이 낡았지만 작동했다. 새벽은 패널 앞에 서서 창밖으로 불빛이 해안을 한 번 쓸고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안개가 아직 짙었다. 불빛이 지나갈 때 해안선이 2초쯤 드러났다.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불빛이 돌았다.
아무것도—
있었다.
새벽은 눈을 깜빡였다.
불빛이 다시 지나갔다. 해안. 바위. 젖은 모래. 그리고. 형체들. 한 명이 아니었다. 여럿이었다.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불빛이 지나가는 2초 동안 미세하게 위치가 달라지는 것 같은—같은 것 같은—판단이 서기 전에 불빛이 반대 방향으로 넘어갔다.
해안이 다시 어둠에 잠겼다.
새벽은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랐다. 창유리에 손을 댔다. 차가웠다. 냉기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불빛이 돌아왔다.
해안.
아무것도 없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모래가 있었다. 바위가 있었다. 그리고—발자국이 있었다. 지금 막 새로 난 것처럼, 젖은 모래 위에 선명하게. 많았다. 방향이 없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갔는지, 규칙이 없었다. 그냥 거기 있었다. 안개 속으로 사라진 것들이 남기고 간 것처럼.
새벽은 창에서 손을 떼었다.
오른손 손목의 흉터를 왼손으로 쓸어내렸다. 무의식이었다.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세 번 쓸고 난 후였다. 손을 멈췄다. 흉터의 질감이 손끝에 남았다—오래되어 납작해진 흉터.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 흉터.
수첩을 꺼내 적었다. 해안. 형체들. 안개 속. 발자국.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한 단어를 더 적었다.
여럿.
그날 밤은 잠들지 못했다.
수칙 4번이 머릿속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 두 시에서 세 시 사이,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새벽은 그 문장을 계속 다시 읽었다. 아무도 두드리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 시간을 규칙으로 적어놓았나. 두드리지 않는 게 정상이라면 규칙이 필요 없다. 규칙이 필요하다는 건 예외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외가 있었고, 그 예외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두드리지 않는다는 말 안에 숨겨져 있었다.
아무도가 아닌 것이 문을 두드린다는 것.
두시 십칠 분에 소리가 났다.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긁는 소리였다. 철제 문 바깥쪽에서,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일정한 간격으로. 서두르지 않는 소리였다. 기다릴 수 있는 것의 소리였다.
새벽은 침낭 위에 앉아 있었다. 등이 벽에 붙어 있었다. 소리를 들었다.
열지 않았다.
규칙 4번에 두드린다고 적혀 있었다. 긁는 소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규칙이 다루지 않는 것이 온 것이다. 규칙 바깥의 것. 수칙 노트를 쓴 사람이 예상하지 못했거나, 혹은 예상했지만 쓰지 않기로 한 것.
열두 번째 페이지처럼.
긁는 소리가 멈췄다.
대신 다른 소리가 왔다. 소리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침묵이라고 하기엔 분명하게 들렸다. 누군가 문 바깥에서 숨을 쉬는 소리. 규칙적으로. 가깝게. 문 두께가 없는 것처럼 가깝게.
그리고 목소리가 왔다.
"……형."
새벽은 움직이지 않았다.
뇌가 그 단어를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형.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밖에 없었다. 없었다, 는 게 맞는 말이었다. 지금은. 이미. 일 년 전부터.
"형, 안에 있나?"
경상도 억양이었다. 문장 끝이 살짝 올라가는. 장난기가 그 억양 사이에 섞여 있었다. 살아 있을 때 그대로였다. 버스 뒷자리에서 새벽 옆구리를 쿡쿡 찌르던 목소리. 새벽 전화를 받지 않았을 때 두 번째 시도 없이 그냥 문자를 보내던—형 바쁨? ㅇㅋ 나중에—그 목소리.
아니, 살아 있을 때 그대로일 수가 없었다.
새벽은 오른손 손목을 왼손으로 쥐었다. 꽉 쥐었다. 흉터 위에 손톱이 파고들었다. 반달 모양의 통증이 선명했다. 생생했다. 이게 현실이라는 확인이었다. 문 너머가 아니라 여기가 현실이라는. 자신이 지금 살아 있다는.
문 너머에서 소리가 멈췄다.
발소리도 없었다. 물러가는 소리도 없었다. 그냥 없어졌다. 새벽은 그 없어짐을 기다렸다. 3분. 5분. 7분.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새벽은 그 침묵 속에서 수첩을 꺼냈다. 손가락이 약간 떨렸다. 그래도 글씨는 반듯하게 썼다. 오래 연습된 버릇이었다. 글씨를 반듯하게 쓰는 동안은 손이 떨리더라도 생각이 흔들리지 않았다.
두 시 십칠 분. 긁는 소리. 목소리.
펜이 잠깐 멈췄다.
여울.
이름을 적고 나서, 새벽은 오랫동안 그 글자를 들여다봤다. 두 글자였다. 자신이 일 년 동안 입 밖에 내지 않은 두 글자. 적으면 현실이 되는 것 같아서 수첩에도 쓰지 않았던 두 글자. 이제 적혔다. 형광등 아래서 파란 잉크로, 반듯하게.
새벽은 수첩을 덮지 않았다. 그냥 그 이름을 보면서 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았다.
정확히는 안개가 하얘졌다. 어둠이 걷힌 건 아니었다. 빛이 들어온 건지 안개가 스스로 빛을 품은 건지 알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아침이었다. 낮이 되어도 이 섬에서는 그것이 낮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흐릿한 곳. 안개가 그 경계를 먹어버린 곳.
새벽은 등대 바깥으로 나왔다.
해안 쪽으로 걸어갔다. 어제 밤 발자국을 봤던 곳. 젖은 모래가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발자국이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없었다.
밀물이 쓸고 간 모래는 평평했다. 깨끗했다. 어제 밤 그 선명했던 발자국들은 흔적도 없었다. 새벽은 그 앞에 쭈그려 앉아 모래 표면을 손으로 짚어봤다. 차갑고 젖어 있었다. 손가락 아래에서 모래알이 눌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밀물이 쓸었을 수 있다. 그게 가장 쉬운 설명이었다. 새벽은 가장 쉬운 설명을 쉽게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설명이 아직 없었다.
일어서려던 참에—
등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돌아봤다.
노인이었다. 칠십 줄로 보이는, 낡은 방수복 차림의 노인. 낚싯대를 들고 있었다. 새벽에게서 스무 발짝쯤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몰랐다. 발소리가 났으니까 지금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발소리가 다가오는 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새벽은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다. 그냥 갑자기 발소리가 나고 사람이 있었다.
노인이 새벽을 보고 있었다. 눈이 이상하게 선명했다. 나이에 비해. 낡은 얼굴에 낡지 않은 눈. 새벽은 그 눈과 눈이 마주쳤다.
새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사세요?"
대답이 없었다. 노인은 새벽을 그냥 봤다. 대답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었다. 거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봤다. 마치 새벽이 말하는 내용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새벽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새벽은 질문을 바꾸려다—
노인이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새벽은 잠깐 그 뒷모습을 봤다. 쫓아가야 할지 말지 판단하는 사이, 노인이 멀어졌다. 안개가 그를 삼켰다. 뒷모습이 희어졌다가 흐려졌다가 없어졌다. 발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아까 온 것처럼. 온 것도, 간 것도 소리가 없었다.
새벽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수첩을 꺼냈다.
노인. 방수복. 낚싯대. 안 말함.
그리고 한 줄 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알고 있는 것 같았는지—새벽은 쓰지 않았다. 쓸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냥 그 눈이, 새벽을 보는 방식이, 처음 온 사람을 보는 방식이 아니었다는 것. 그 눈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새벽이 누구인지를, 혹은 새벽이 왜 왔는지를, 혹은 새벽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셋 중 어느 것인지 새벽은 몰랐다.
돌아오는 길에 등대 문을 열다가 눈이 갔다. 철제 문 아랫부분. 어제 긁는 소리가 난 곳.
아래쪽 철판에 줄이 나 있었다.
길고 가늘고 선명한. 손톱 같은 게 긁어서 생긴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여러 줄. 어제 밤에는 없었다—새벽은 확신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들어올 때 이 문을 밀었고, 철판이 눈앞에 있었고, 이 줄들이 있었다면 봤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밤사이에 생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작게. 손가락 하나로 긁어 쓴 것처럼. 힘을 줘서 새긴 것처럼. 흐릿하게, 그러나 읽을 수 있게.
열어줘.
새벽은 그 글자를 보았다.
오래 보았다.
손끝이 그 글자 위로 가려다가 멈췄다. 닿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유를 몰랐다.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닿으면 무언가가 확정되는 것 같은. 이것이 진짜라는 것이 확정되는 것 같은.
왼손이 오른쪽 손목 흉터 위로 올라갔다. 천천히. 조용히. 손가락이 그 납작한 흉터를 따라갔다.
수첩을 꺼내지 않았다.
이건 적지 않았다.
적으면—적으면 이 섬에 온 이유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여울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여울이 새벽을 기다리고 있는 곳에 온 것이 되는 것 같았다. 그 두 가지가 다른지 같은지, 새벽은 아직 판단하지 못했다.
안개가 등대 벽을 타고 올라왔다. 천천히. 소리 없이.
새벽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