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열두 번째 페이지
안개는 낮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침 여섯 시, 새벽이 등대 2층 창문 앞에 섰을 때 섬의 절반이 이미 희뿌연 덩어리 속에 잠겨 있었다. 파도 소리가 들려야 할 방향에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없다는 것—그 자체가 소리처럼 귀를 짓눌렀다. 숨을 들이쉬면 안개가 같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입 안에 소금기가 남았다.
새벽은 수첩을 펼쳤다.
창문 글씨 — 여울 필체 맞음. 지문 없음. 안쪽에서 쓴 것. 노트 12번째 페이지 — 찢긴 흔적 선명. 의도적. 판석 노인 — '다 적혀 있는 게 아니여'. 무슨 뜻.
세 줄. 어젯밤에 적은 것들이었다. 새벽은 볼펜 끝으로 의도적이라는 단어를 한 번 더 눌렀다. 잉크가 번졌다. 종이가 패였다. 볼펜이 뚫고 나갈 것처럼 계속 눌렀다.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찢은 건 전임 등대지기였을 것이다. 아니면—
새벽은 생각을 그 자리에서 잘랐다. 아직 증거가 없었다. 증거 없는 추론은 수첩에 적지 않는다—그게 그가 오래전부터 지켜온 유일한 규칙이었다. 섬의 수칙 노트보다도 먼저 생긴, 자기 자신과의 약속. 아직은 적지 않는다. 아직은.
그는 코트를 걸치고 등대 밖으로 나왔다.
절벽까지는 걸어서 이십 분이었다.
지도에는 '북단 전망대'라고 적혀 있었지만, 사실상 그냥 깎아지른 돌벼랑이었다. 난간도 없고 표지판도 없었다. 섬에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방식치고는 너무 솔직했다. 솔직하다 못해 친절하기까지 했다. 오지 마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이 절벽은 무심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새벽이 절벽 가장자리에서 십 미터쯤 떨어진 지점에 멈춘 건 습관적인 거리 계산 때문이 아니었다.
누군가 서 있었다.
노란 우비. 섬에서 본 유일한 원색이었다. 바람이 우비 자락을 뒤로 거칠게 날렸지만, 그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손을 우비 주머니에 찌른 채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다는 안개 속에 없었다. 있어야 할 자리에 그냥 회색 공백만 있었다. 그 공백은 물이 아니었다. 아직 생기지 않은 무언가의 자리 같았다.
오판석이었다.
새벽은 멈췄다. 관찰했다. 노인의 등은 움직이지 않았다. 파도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안개 속에서 불규칙하게, 끊겼다 이어졌다 하는 소리로. 마치 누군가 숨을 쉬는 것처럼.
"거기서 뭐 하십니까."
새벽이 먼저 말을 걸었다. 질문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운 어조였다.
오판석은 돌아보지 않았다.
"......보고 있제."
"뭘요."
"아무것도 없는 거."
대화가 거기서 끊겼다. 새벽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노인의 옆얼굴이 보이는 각도까지—주름이 깊고 눈이 아래를 향한 채로 고정되어 있었다. 눈을 깜박이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이렇게 오래 눈을 깜박이지 않을 수 있는지, 새벽은 그걸 세어보지 않았다. 세었다가는 답이 나올까 봐.
"노트 얘기 하셨잖아요. '다 적혀 있는 게 아니다'—그게 무슨 뜻인지."
침묵.
새벽은 기다렸다. 이 노인이 질문에 직접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았다. 기다리거나, 포기하거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는 법은, 팔 개월 전에 이미 잊었다.
이십 초쯤 지났을 때, 오판석이 말했다.
"그 노트. 처음부터 니 손에 들어오게 돼 있었어."
"...무슨 소리예요."
"전임 등대지기가 남긴 게 아니여. 그 사람 노트는 따로 있었다고. 불에 탔어. 이십 년 전에."
새벽의 손이 천천히 오른쪽 손목 쪽으로 내려갔다. 코트 소매 위로,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특정 자리를 눌렀다. 옷 두께를 뚫고 흉터의 윤곽을 더듬는 버릇—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버릇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하고 있었다.
"그럼 그 노트는——"
"누군가는 알고 있을 것 같던데."
오판석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말이 끝난 게 아니었다—말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는 우비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절벽과 멀어지는 방향이 아니라, 절벽을 따라 수평으로 이동하는 방향이었다. 안개가 그를 삼켰다. 노란 우비가 마지막으로 흔들리다가 사라졌다.
"잠깐요—"
새벽이 한 발 내딛었지만 거기서 멈췄다. 안개가 너무 짙었다. 두 걸음만 들어가면 방향을 잃는다. 그는 절벽 가장자리에서 멈춰서 안개가 노인을 완전히 지운 자리를 바라봤다.
누군가는 알고 있을 것 같던데.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은 방향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대신, 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에 구멍만 남겨두는 방식의 방향. 새벽은 그 구멍을 한참 들여다봤다.
누가 썼다.
누가.
수첩을 꺼내 펜을 들었다. 펜 끝이 종이 위에 닿았다가 들렸다. 닿았다가 들렸다. 쓰지 않았다. 아직 증거가 없었다—아니, 증거는 있었다. 문제는 증거가 가리키는 곳이었다. 그곳을 적는 순간, 되돌아올 수 없다는 걸 새벽은 알고 있었다.
바람이 절벽 위로 올라왔다. 소금 냄새를 가득 싣고. 새벽의 코트 자락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마치 가라고 하는 것처럼. 혹은 가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두 가지가 같은 방향이었다.
그는 등대 쪽으로 돌아섰다.
등대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굵은 빗줄기가 아니었다. 가늘고 촘촘한, 안개와 비의 경계가 없는 그런 날씨였다. 적신다는 감각이 없었다. 어느 순간 코트가 무거워져 있었고, 어느 순간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스미는 비였다.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들어오는 종류의 것.
새벽은 코트 깃을 세웠다. 등대가 보이는 지점에서 발을 멈췄다.
2층 불빛이 켜져 있었다.
등대 조명이 아니었다. 2층 창문 안쪽—방등 불빛이었다. 그가 나올 때 분명히 끈 것이었다. 스위치를 한 번 내리고, 손잡이를 잡기 전에 뒤돌아 확인했다. 꺼져 있었다. 분명히.
새벽은 걸음을 빠르게 했다. 뛰지는 않았다. 뛰는 건—뭔가를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두려움을 인정하는 순간 다리가 제 속도를 잃는다는 걸 그는 알았다. 그래서 빠르게, 그러나 고르게. 계단을 올라 문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아침에 나올 때는 이렇지 않았다. 쥔 손바닥이 금방 저렸다.
문을 밀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1층. 테이블 위 수칙 노트가 놓인 자리. 의자가 당겨져 있었다—새벽이 앉던 쪽이 아닌, 반대편 의자가. 누군가 거기 앉았다가 일어난 것처럼 살짝 뒤로 밀려나 있었다. 새벽은 그 의자를 오래 봤다. 의자가 뒤로 밀린 각도가 정확했다. 일어서는 사람이 뒤로 민다. 앉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 여기 앉아 있다가, 새벽이 오는 것을 알고 일어섰다.
그는 의자를 보다가 계단을 올랐다.
2층 문을 열었을 때, 불이 꺼졌다.
찰칵—하는 소리도 없이. 그냥 어둠이 왔다. 창문으로 빗물이 흘렀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방 안에서 무언가 냄새가 났다—새벽이 손을 멈추고 코를 당겼다. 바다 냄새였다. 소금기와 해초가 섞인, 등대 밖에서 맡던 것과 똑같은 냄새가 실내에 가득했다. 창문이 닫혀 있는 데도. 문이 방금 열린 데도. 이 냄새는 환기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여기 있었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다는 것처럼.
창문은 닫혀 있었다.
새벽은 창 앞에 섰다. 창유리에는 글씨가 없었다. 어제의 다 알아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유리가 깨끗했다. 새벽은 손가락으로 유리를 건드렸다—차가웠다. 너무 차가웠다. 실내 온도보다 낮은 게 이상했다. 바깥 온도보다도 낮은 것 같았다. 유리 안쪽이 바깥보다 더 차갑다는 것은—그 너머에 무언가 있다는 것이다. 냉기를 만들어내는 무언가.
그때 불빛이 켜졌다.
등대 조명이었다. 자동 점등 시간보다 두 시간 일렀다. 빛이 회전하면서 안개를 뚫고 바깥으로 뻗어 나갔다. 새벽은 그 빛이 처음으로 무언가를 정확히 잡아내는 것을 보았다.
사람이었다.
절벽과 등대 사이, 해안 바위 위에 서 있는 형체. 빛이 그쪽을 지나치는 찰나의 1초, 딱 그 1초 동안만 실루엣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키가 작았다. 새벽의 어깨까지 올까 말까 한 키. 짧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팔이 몸 옆으로 자연스럽게 내려져 있었다—두려움도 경계도 없이, 그냥 거기 서 있는 것처럼.
새벽의 손이 창틀을 움켜쥐었다.
그 실루엣이 고개를 들었다.
등대를 향해. 창문을 향해. 새벽이 서 있는 자리를 향해.
등대 불빛이 지나쳐갔다. 어둠이 돌아왔다. 새벽은 창문 앞에서 숨을 죽인 채 빛이 다시 그쪽을 비추는 순간을 기다렸다. 회전 주기, 약 사 초. 빛이 돌아왔다.
아무도 없었다.
바위 위가 텅 비어 있었다. 새벽은 그 자리를 오래 들여다봤다. 빛이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더 그 바위를 비추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젖은 돌이었다. 파도가 닿았다가 물러난 자국만 남아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는 창문에서 물러났다. 손이 떨렸다.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감쌌다—코트 소매 위로, 흉터 위치를 더듬는 익숙한 동작. 손목이 차가웠다. 자기 체온인데도. 손바닥이 자기 손목보다 차갑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가, 그 생각을 뒤집었다. 손목이 차갑다는 게 이상했다.
수첩을 꺼냈다. 펜을 들었다.
실루엣 — 키 작음. 짧은 머리. 바위 위. 빛 1초. 고개를 들었다.
펜을 멈췄다.
닮았다.
그 두 글자를 쓰고 나서 새벽은 한참 동안 그 페이지를 들여다봤다. 쓰면 인정이 된다. 수첩에 적힌 건 관찰이고, 관찰은 사실에 가까워진다. 그는 두 글자를 지우려다 멈췄다. 지우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인정이었다.
그냥 덮었다.
밤 열 시, 등대 1층.
새벽은 수칙 노트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전부 열한 개의 규칙. 찢겨나간 마지막 페이지. 찢긴 면이 매끄러웠다—가위나 칼로 자른 것이었다. 손으로 찢으면 선이 이렇게 반듯하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준비하고 잘랐다는 뜻이었다.
누군가는 알고 있을 것 같던데.
오판석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다시 굴렀다.
새벽은 노트의 첫 페이지를 들여다봤다. 서체를 들여다봤다. 정자체였다. 힘을 주어 눌러 쓴 필압—누군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아주 또렷하게 쓴 것이었다. 규칙 하나하나를 쓸 때마다 잠깐씩 멈췄을 것이다. 생각했을 것이다. 이 규칙이 필요하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리고 잉크가.
새벽이 코를 내밀었다.
볼펜 잉크 냄새가 났다. 오래된 노트에서 나야 할 퇴색된 냄새가 아니었다. 새 잉크 냄새였다. 1년이 채 안 된—아니면 그보다 더 최근의.
그의 동생이 섬에 실종된 게 언제였더라.
팔 개월 전이었다.
새벽은 수첩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이번엔 증거가 있었다. 잉크 냄새, 필압, 찢긴 선. 증거가 충분했다. 그런데도 적을 수가 없었다.
여울이 썼다.
그 문장이 수첩 위에 올라오는 순간, 세계가 바뀐다. 동생이 이 섬에 왔다는 게 아니라—동생이 이 섬에서 이 노트를 썼다는 게. 규칙을 만든 쪽이 여울이라는 게. 그리고 마지막 열두 번째 규칙을 직접 찢어낸 쪽도.
왜 찢었을까.
새벽이 입술을 물었다. 바깥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지 않았다. 들이쳤다가 물러났다가—리듬이 없었다. 파도라기보다 뭔가가 안으로 들어오려는 소리 같았다. 밀고 당기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계속해서 밀기만 하는.
바로 그때.
"형."
낮고 짧은 한 마디였다. 문 너머에서가 아니었다. 계단 위에서였다.
새벽은 굳었다.
목소리였다. 소리였다. 집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은 파장으로—정확히 그 높이로, 정확히 그 무게로 울리는 한 마디였다. 새벽의 귀가 그걸 알았다. 귀는 거짓말을 못 한다. 귀는 오래된 것을 잊지 않는다.
규칙 3번. 이름을 불러도, 문을 두드려도, 대답하지 마라. 열지 마라. 어젯밤 그는 문을 열었다. 규칙을 어겼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것과 관계없이—오늘은 소리가 밖이 아닌 안에서 났다.
계단이 삐걱거렸다.
한 칸. 두 칸. 멈춤.
새벽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노트를 테이블 위에 놓인 채 내버려뒀다. 손이 손목으로 갔다. 흉터 위를 쥐었다. 코트 소매를 뚫고 손가락이 닿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각—아무것도 없는데도.
"형, 올라와."
이번엔 달랐다. 목소리가. 분명하게, 가깝게—장난기가 섞인 경상도 억양으로, 말끝이 살짝 올라가는 특유의 그 말투로. 오래 연습하지 않으면 흉내 낼 수 없는 종류의 억양이었다. 새벽만 알아들을 수 있는 종류의. 그게 더 무서웠다.
새벽의 심장이 한 박자 멈췄다가 다시 뛰었다. 너무 빠르게.
죽은 사람이 살아있을 때 말투로 형을 부른다. 그게 가장 무서운 거라는 걸—새벽은 알면서도, 알면서도 의자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두 발이 계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몸이 먼저 알았다. 머리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다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이 가장 오래된 형태의 공포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것.
멈췄다.
첫 번째 계단 앞에서. 발이 계단 위에 올라가려는 찰나에 멈췄다. 나무 계단의 가장자리가 발끝에 닿은 순간, 뭔가가 새벽의 등 위에서 차갑게 손을 얹은 것 같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등이 차가웠다.
수첩이 테이블 위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리 없이. 그냥 미끄러져서 카펫 위로 떨어진 것이었는데, 그 순간 새벽의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멈춰야 했다. 여기서 올라가면 안 됐다. 규칙 때문이 아니었다. 오판석의 말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알고 있을 것 같던데.
만약 여울이 썼다면—여울이 직접 규칙을 적었다면—열두 번째 페이지를 찢은 것도 여울이었다면—그 규칙을 지키지 말라고 한 건지, 반드시 지키라고 한 건지, 새벽은 알 수가 없었다. 여울이 남긴 규칙을 따라야 하는지, 여울이 지운 규칙을 따라야 하는지. 같은 손이 쓰고 같은 손이 찢었다면—그 손이 무엇을 원했는지를.
"형, 왜 안 와."
목소리가 한 칸 더 내려왔다.
계단 중간이었다. 새벽이 눈을 들었다. 계단 위가 어두웠다. 등대 불빛이 창문을 지날 때 찰나의 빛이 계단 쪽으로 흘러들었다—그 순간.
발이 보였다.
계단 위에, 발목 아래쪽만. 맨발이었다. 작은 발. 발등에 뭔가 묻어 있었다—해변 모래처럼 밝은 색이 아닌, 검고 젖은 것이 발등에 들러붙어 있었다. 해저의 모래였다. 바닥에 가라앉은 것들이 쓸려올라올 때 붙어오는 색깔이었다.
빛이 지나갔다. 어둠이 돌아왔다.
새벽은 숨을 쉬지 않았다. 숨을 쉬면 소리가 나고, 소리가 나면 무언가를 확인시켜줄 것 같았다. 확인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이 세계에는 있었다. 수첩에 적으면 사실이 되는 것처럼—말하면 실재가 되는 것들이.
십 초가 지났다.
계단은 더 이상 삐걱거리지 않았다.
"...여울아."
새벽이 말했다. 소리 내어. 처음으로. 묻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겠다고 했던 것들을 다 무너뜨리고, 그 이름을 혀 위에 얹어 내놓았다. 두 음절. 팔 개월 동안 혼자 삼켜온 두 음절이 공기 중으로 나와 계단 위로 올라갔다.
대답이 없었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파도 소리마저 잠깐 끊겼다. 섬 전체가 숨을 참는 것처럼. 새벽이 한 발을 계단에 올렸다. 두 번째 발이 따라갔다. 발걸음마다 계단이 내는 소리가 혼자였다. 하나의 걸음이 내는 소리만이 있었다.
계단을 다 올랐을 때, 2층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창문 앞 바닥에 물기가 있었다.
발자국 모양으로. 작은 맨발의 발자국이 창문 쪽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두 개가 나란히 찍혀 있었다. 새벽이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젖어 있었다. 차가웠다. 그리고 냄새가—바닷물 냄새가 났다. 소금과 해조류와 그 아래에 있어야 할 것들의 냄새가.
새벽은 한참 그 발자국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수첩을 꺼냈다. 펜을 들었다.
여울이 썼다.
다섯 글자를 적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무서웠다. 떨려야 했다. 이걸 쓰면서 떨리지 않는다는 것은—이미 어딘가에서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알고 있으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뜻이다.
적고 나서 다음 줄에 썼다.
열두 번째 규칙 — 여울이 찢었다. 이유 모름. 판석 노인 — 알고 있다. 말 안 한다. 왜.
세 줄. 새벽은 수첩을 덮었다. 창문을 등지고 계단 쪽을 바라봤다. 빈 계단이었다. 등대 불빛이 돌았다. 창문으로 스치는 빛이 방 안을 한 번 훑었다.
새벽이 발자국이 있는 자리를 다시 봤다.
발자국이 하나 더 늘어 있었다.
그의 발자국 바로 옆에, 그보다 작은 맨발 자국이 하나 더—언제 생겼는지 모르게, 젖어서, 새벽의 발과 나란히 찍혀 있었다.
나란히.
섬에 오기 전 새벽이 마지막으로 동생과 걸었던 방식 그대로. 여울은 언제나 새벽의 왼쪽이었다. 조금 뒤처지면서, 그래도 발을 맞추면서. 그 간격이 지금도 똑같았다.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의 거리가.
새벽은 일어나지 않았다. 쪼그린 채 그 발자국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왼손을 내밀어 빈 발자국 옆 바닥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차가운 나무 바닥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손바닥이—
따뜻했다.
바닥이 아니라 손바닥이. 새벽의 손바닥 안쪽이 처음으로, 이 섬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따뜻했다. 이 섬에서 새벽이 느낀 온기는 이것뿐이었다. 바닥도 차갑고, 공기도 차갑고, 유리도 차갑고, 자기 손목도 차가웠는데—지금 이 순간만, 손바닥 안쪽에 불씨 하나가 들어온 것 같았다.
눈물이 났다. 흘리지 않으려 눈을 감았다. 감으면 안 됐는데 눈이 감겼다. 오래 버텼다. 팔 개월 동안 버텼다. 그런데 이 손바닥의 온기 앞에서 버티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새벽은 갑자기 모르게 되었다.
귓가에 아주 작게, 숨결보다 얇게 소리가 들렸다.
"형, 열두 번째 페이지—"
말이 끊겼다. 뒤가 없었다. 문장이 끊어진 게 아니라 잘린 것 같았다. 가위로. 누군가 말의 허리를 잘라낸 것처럼, 중간에서.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새벽이 눈을 떴을 때, 발자국 두 개 모두 사라져 있었다. 바닥이 말라 있었다. 바닷물 냄새도 없었다. 손바닥의 온기도 이미 식어 있었다. 창문 너머로 등대 불빛이 돌았다. 바위를 비췄다. 해안선을 비췄다. 아무것도 없었다.
새벽은 수첩을 다시 펼쳤다.
열두 번째 페이지 — 여울이 말하려 했다. 못 했다.
그 아래에 마지막으로 한 줄을 더 썼다.
오판석을 다시 만나야 한다.
등대 불빛이 한 번, 두 번, 세 번 회전했다. 새벽은 그 빛이 도는 걸 세었다. 숫자를 세면서 손바닥을 허벅지에 비볐다. 온기를 지우는 것인지 붙잡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동작이었다.
열두 번이 되는 순간, 새벽은 손을 멈췄다.
등대가.
열두 번 울었다.
자동 점등 시간이 아니었는데. 아무것도 그 빛을 켤 이유가 없었는데. 열두 번째 회전에서 등대 불빛이 정확히 멈추었다—바위를 비추는 각도에서. 새벽이 처음으로 실루엣을 보았던 그 자리에서.
빛이 멈춘 채로 꺼지지 않았다.
새벽은 창으로 다가갔다. 손가락이 유리에 닿았다. 아까와 같은 냉기였다. 같은 차가움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유리 표면이 울었다. 진동이 있었다. 미세하게, 손끝으로만 느껴지는 떨림이. 마치 유리 안쪽에서 누군가 반대편 손바닥을 대고 있는 것처럼.
새벽은 손을 떼지 않았다.
수첩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