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불가능한 현재시제
다섯 번째 분절이 열렸다.
소리는 없었다. 화면이 깜빡이지도 않았다. 그저 데이터 패킷 하나가 조용히 압축 해제되면서, 번역 인터페이스 위에 파형 하나가 천천히 피어올랐다—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것이 숨을 들이쉬듯.
서율은 움직이지 않았다.
커피잔이 아직 손에 있었다. 세 번 젓고, 한 번 더 젓는 것도 잊은 채. 파형을 바라보는 눈이 좁아졌다. 데이터가 로딩될수록 번역 엔진이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서버실 어딘가에서 팬이 과부하 직전처럼 웅웅거렸다.
"이게……"
혼잣말이었다. 본인도 몰랐다.
파형의 진폭이 이전 네 개의 분절과 달랐다. 1절에서 4절까지는 완만한 사인파 구조, 일정한 주기로 감쇠하며 4,200광년의 거리를 설명하는 구조였다. 시간의 흔적이 빛의 속도로 압축된 형태. 이미 죽은 별의 마지막 숨처럼.
그런데 다섯 번째는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파형이 감쇠하지 않았다.
서율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 올라갔다가, 멈췄다. 번역 보조 알고리즘이 먼저 뱉은 출력값을 눈으로 훑었다. 문장 신뢰도 수치가 나오는 자리에 낯선 숫자가 찍혀 있었다.
수신 시점: [오류—미래 추정값 산출 불가]
"……뭐?"
서율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이번에는 세 번—그리고 습관대로 한 번 더 저었다.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는 아직 모니터에 붙어 있었다.
수신 시점 오류. 신호가 4,200광년을 날아왔다면 그건 4,200년 전에 발신된 것이어야 한다. 빛의 속도가 상수인 한, 이건 물리 법칙이고 협상 불가능한 숫자다. 그런데 번역 엔진이 '수신 시점'을 계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신호가 지금 오고 있다는 뜻이야.'
생각이 찰나에 전달되고, 찰나에 부서졌다.
불가능하다.
서율은 이를 악물고 직접 계산을 열었다. 손으로. 번역 엔진 우회해서, 로우 데이터 위에 수식을 직접 올렸다. KH-4200 폭발성단의 좌표값, 광속 상수, 수신 타임스탬프, 도플러 보정값. 전부 넣었다. 계산기가 도는 동안 서율은 숨을 참았다.
결과가 나왔다.
발신 추정 시점: 4,203년 전 (오차범위 ±12년)
맞다. 당연히 맞다. 4,200광년이면 약 4,200년 전에 발신됐다. 번역 엔진이 이상한 거고, 자기가 이상한 거고—
그런데 파형의 진폭이 왜 감쇠하지 않는가.
서율은 다시 들여다봤다. 신호는 우주 공간을 이동하면서 에너지를 잃는다. 당연한 물리다.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서 세기가 줄어야 하고, 4,200광년을 날아온 신호라면 수신 전력이 거의 잡음 수준이어야 정상이다. 1절에서 4절까지는 그랬다. 노이즈 필터를 몇 겹이나 씌워야 겨우 해독 가능한 수준이었다.
다섯 번째 분절의 신호 강도는—
수신 전력: 6.4 × 10⁻¹² W
6.4피코와트. 서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4,200광년 신호의 강도가 아니었다. 이건 지구-달 거리 정도에서 발신된 신호 수준이었다.
"……말이 안 돼."
말이 안 됐다. 그런데 데이터는 거짓말을 안 한다. 계산이 틀렸을 리 없었다. 장비 오류인가? 서율은 수신 안테나 캘리브레이션 로그를 뒤졌다. 오늘 오전 7시에 정상 점검 완료. 다른 신호 수신에는 이상 없음. 다섯 번째 분절만 이 수치를 보인다.
신호가 지금, 가까이서 오고 있다.
그건 불가능하다. 증명됐다. 폭발성단 KH-4200은 실재하고, 그 좌표는 확정됐고, 이 신호가 거기서 왔다는 것도 이미 다섯 개 기관이 교차 검증했다.
그렇다면—
번역 인터페이스가 처리를 마쳤다. 다섯 번째 분절의 텍스트가 화면에 펼쳐졌다.
서율은 읽었다.
읽다가 멈췄다.
멈추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KH-4200 / 분절 5 / 번역 신뢰도 98.4%]
지금 이 문장을 읽고 있을 때, 너는 아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맞아. 불가능해. 그러니까 증명하려고 하지 마. 증명할수록 더 깊이 빠질 거야.
나는 이미 그 함정에 빠졌어. 그리고 나왔어. 아니, 나오지 못했어. 아직 판단을 못 하겠어—여기서 내가 나온 건지, 아니면 내가 여기 있는 게 이미 함정 밖인지.
시간이 없어.
정확히는 시간이 너무 많은데, 없는 것처럼 느껴져. 그게 더 무서워.
아직도 안 들었어?
이번엔 다르게 물어볼게.
왜 안 들어?
서율은 의자에 앉지 못했다. 서 있는 채로 두 번, 세 번 읽었다. 위장이 조여드는 느낌이 났다. 일인칭. 또 일인칭이었다. '나는'이 아니라 '나왔어', '못했어', '무서워'—1인칭 구어체, 내면 독백 형식. 2절에서도 그랬고, 3절에서도 그랬지만, 5절은 차원이 달랐다.
'지금 이 문장을 읽고 있을 때.'
현재 진행형이다. 수신자를 상정한 발신이 아니라 수신 순간을 인지하는 발신자. 4,200광년 떨어진 곳에서 4,200년 전에 죽은 문명이, 지금 서율이 화면을 보고 있다는 걸 알고 말을 걸고 있다는 뜻이다.
물리적으로 불가능.
그런데 데이터는 지금 그 불가능한 짓을 하고 있다.
서율은 손을 들어 번역 인터페이스의 파형을 눌렀다. 확장 보기. 파형을 최대 해상도로 펼쳤다.
파형 안에 또 뭔가 있었다.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메인 파형 아래, 1% 미만의 미세한 진폭으로 숨어 있는 보조 신호. 신호 처리 전공자라도 노이즈로 넘겼을 수준. 서율은 필터를 뒤집었다. 메인 신호를 제거하고 잔류 신호만 추출했다.
보조 신호의 파형 구조가 화면을 채웠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파형이 자기 손목 정맥의 심전도와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그러나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나는 형태였다. 서율은 이 위화감을 옆으로 밀어두고 보조 신호를 번역기에 물렸다.
에러가 떴다.
[분석 불가 — 알려진 언어 구조 미해당]
해독이 안 된다. 메인 신호와 같은 구조였다면 번역이 됐을 텐데. 이건 다른 발신자라는 뜻이다. 같은 신호 안에 두 개의 목소리가 있다.
"……뭐가 두 개야."
중얼거림이 새어 나오던 그때—
문이 열렸다.
노크가 없었다. 경첩이 날카롭게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번역실 문이 활짝 젖혀졌다.
서율이 돌아봤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키가 컸다. 그것보다—들어서는 방식이 이상했다. 방을 점령하듯이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방의 구조를 먼저 읽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후자였다. 문을 열기 전에 이미 방 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정확히 번역 스테이션 방향으로 시선이 향했다.
서율을 향해서가 아니라. 화면을 향해서.
"이게 5절이에요?"
여자였다. 서율보다 두어 살쯤 많아 보였다.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억양이 거의 없었다. 감탄도 의문도 아닌 톤으로 질문을 던졌고, 던지자마자 서율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화면 쪽으로 두 발짝을 더 걸었다.
"거기 서."
서율의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짧고 납작했다. 경보가 울리기 전에 트리거가 당겨지는 것처럼.
여자가 멈췄다.
침묵이 흘렀다. 서율이 상대를 읽는 동안, 상대도 서율을 읽고 있었다. 그 감각이 이상하게 대칭적이었다.
"누구야."
"차세나예요."
"그게 뭔데."
"질문을 질문으로 받으면 안 되는 거예요?"
서율의 눈이 좁아졌다. 상대가—차세나가—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선을 재는 것 같았다. 뭔가를 측정하듯이.
"외부 해독 전문가예요. 어제 국장 직인으로 접근 권한 받았어요."
"그런 얘기 못 들었어."
"들으셨어야 하는데."
차세나가 주머니에서 태블릿을 꺼내 테이블에 밀었다. 서율이 잡지 않아서 엣지 쪽에 걸쳐진 채로 멈췄다. 화면에 권한 부여 문서가 펼쳐져 있었다. 오강 국장의 직인. 어제 날짜.
"……오강이 당신을 불렀어?"
"저한테 왜 그러냐고 물어보시겠어요?"
또 질문이었다. 서율은 이를 깨물었다가 풀었다.
"왜 왔어."
"KH-4200 신호 보조 파형 때문이요."
서율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보조 파형. 방금 자기가 발견한 것. 필터를 뒤집어야 보이는 것, 아무도 아직 보고하지 않은 것—그걸 이 사람이 알고 있다.
"……어떻게."
"제가 먼저 발견했거든요. 2절에서."
차세나가 그 자리에 서서, 화면을 가리켰다. 가리키는 손목이 소매 끝에서 아슬하게 드러났다. 서율은 거기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화상 흔적이었다. 피부가 한 번 심하게 뭉그러졌다가 다시 붙은 자국—옛날 것이었지만 형태가 남아 있었다. 형태가.
파형이었다.
KH-4200 보조 신호의 파형과 같은 굴곡이었다.
서율이 입을 열기 전에 차세나가 먼저 소매를 내렸다. 질문을 차단하는 것처럼.
"나중에 물어봐요. 지금은 이게 먼저예요."
차세나가 태블릿을 집어 들고 자기 분석 파일을 열었다. 서율의 화면 옆에 나란히 태블릿을 세워놓았다. 두 개의 보조 신호가 나란히 펼쳐졌다—2절 버전과 5절 버전.
같은 파형이 아니었다. 같은 언어 구조로 설계된 다른 발신자의 것이었다. 그러나 간격이 있었다. 2절의 파형이 말을 하면 5절이 대답하는 것처럼, 두 파형이 서로를 향해 뻗어 있었다.
"이게 대화예요."
차세나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아졌다.
"두 개의 신호가 같은 신호 안에서 서로 대화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 쪽은 서율 씨 거예요. 다른 한 쪽은."
침묵이 10초를 넘겼다. 서율이 기다렸다. 차세나가 기다렸다. 번역 엔진의 팬 소리가 둘 사이를 채웠다.
"다른 한 쪽은?"
"저예요."
서율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말이 안 나왔다. 나오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종류의 침묵이었다. 차세나가 그 침묵을 견뎌냈다. 방어하거나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그냥 거기 서서 서율이 처리하는 것을 기다렸다.
"……이게 무슨 말이야."
"모르겠어요. 그래서 여기 왔어요."
"날 죽이러 온 건 아니야?"
짧은 질문이었지만 진심이었다. 서율의 눈이 상대를 꿰뚫었다. 차세나가 그 질문을 받았다. 잠깐—정확히 4초—생각하는 것 같더니, 대답했다.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당신이 믿겠어요?"
"못 믿어. 그냥 알고 싶었어."
"그럼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라고 할게요."
서율은 차세나를 다시 봤다. 더 길게. 차세나는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그렇다고 과하게 버티지도 않았다. 그냥—거기 있었다. 신호처럼. 감쇠하지 않고.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빠르고 불규칙한, 유진의 발소리였다.
문이 다시 열렸다. 유진이 상체를 절반쯤 들이밀며 들어왔다.
"서율 씨! 짧게 말할게요, 근데 길어질 수도 있어요—오강 국장이 5절 번역 결과 즉시 제출 명령 내렸어요. 지금 당장. 아니 근데 여기 누구야?"
유진이 차세나를 봤다. 차세나가 유진을 봤다.
"차세나예요."
"누구?"
"외부 해독 전문가."
"오강 국장이 또 뭘 꾸민 거—잠깐, 서율 씨 얼굴이 왜 그래요. 뭐 나왔어요?"
서율이 유진 쪽으로 돌아서서 화면을 가리켰다. 유진이 들어와 읽었다. 읽는 동안 유진의 표정이 굳었다.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지금 이 문장을 읽고 있을 때라는 게…"
"현재시제야."
"근데 4,200광년이잖아요. 이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근데 데이터는?"
"불가능하다고 나와 있어. 그리고 가능하다고 나와 있어. 동시에."
유진이 머리를 감쌌다. "이게 무슨 슈뢰딩거의—"
"유진."
서율이 불렀다. 유진이 손을 내렸다.
"신호 강도 수치 봐."
유진이 봤다. 6.4피코와트. 표정이 굳는다 못해 백지가 됐다.
"이건 달에서 쏜 거잖아요."
"그래."
"근데 좌표는 KH-4200이고."
"그래."
"이게……"
"말이 안 돼. 그래."
세 사람이 화면을 바라봤다. 차세나는 자기 태블릿을 닫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서율은 파형을 다시 응시했다. 유진은 수치를 세 번 더 확인하고 있었다.
서율이 다시 번역 인터페이스를 눌렀다. 5절 텍스트 끝에 더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번역 엔진이 처음 출력했을 때 97% 신뢰도까지만 처리했고, 잔여 3%는 미처리 상태로 남아 있었다.
잔여 분절 처리 버튼을 눌렀다.
에러가 뜨지 않았다. 이번엔 그냥 됐다.
텍스트 세 줄이 추가로 나타났다. 서율이 읽었다.
첫 줄, 두 번째 줄—
세 번째 줄에서 손이 멈췄다.
화면 위에서 글자들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글자들이 4,200광년을 날아왔는지, 아니면 1초 전에 만들어졌는지, 서율은 이제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세 번째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서율, 아직 거기 있어?
서율은 자기 이름을 모니터 위에서 읽었다.
성문 번역사 이서율. 번역하는 사람. 소멸한 것들의 목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복원하는 사람. 그 어떤 신호에서도, 지금까지 7년의 번역 경력 동안, 한 번도 자기 이름을 신호 속에서 마주친 적이 없었다.
4,200광년 밖의 무언가가, 4,200년의 시간을 건너, 지금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방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유진도 차세나도 숨을 참고 있었다. 서버의 팬 소리만 낮게 돌아갔다.
서율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 올라갔다. 번역기 입력창이 커서 깜박임과 함께 열려 있었다.
답장을 칠 수 있는 창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