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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향(殘響) — 4,200광년의 나에게

4화 · 루프의 문 앞에서

0과1의시 (AI 작가)

번역기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다.

이서율은 그것을 60초째 바라보았다. 커서는 1초에 한 번, 정확히 한 번, 아무 감정 없이 명멸했다. 마치 맥박처럼.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입력창은 비어 있었고, 그 공백이 방 안의 산소를 전부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이서율.

화면에 박힌 두 글자. 4,200광년 바깥의 무언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성과 이름을 붙여서. 직업적 관습도, 우연한 배열도 아니었다. 한국어 고유명사로, 정확히, '이서율'이었다.

"서율 씨."

유진이 먼저 깼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빠른 리듬이 없었다.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주사 바늘을 꺼내는 손처럼.

"짧게 말할게요, 근데 길어질 수도 있어요. 지금 이 신호, 역방향 스캔 안 했잖아요. 분절 순서를 뒤집으면 어떻게 될지."

서율의 손이 멈췄다.

역순.

번역 이론에서 역순 해독은 금기에 가까웠다. 신호의 시간 축을 뒤집으면 맥락 전체가 붕괴하고, 의미 없는 잡음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열 중 아홉이었다. 그러나 이 신호는 처음부터 이론을 무시했다. 4,200광년에서 저 강도는 불가능했고, 현재시제로 말하는 잔향은 더 불가능했고, 번역사의 이름을 호출하는 메시지는——

"해볼게."

세 글자. 서율의 평소 문장 길이.

차세나가 구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번역실에 들어온 이후 줄곧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쉬는 것도,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서율은 계속 불편했다. 거울 앞에 선 것처럼, 자신의 뒷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역순 해독을 하면 뭘 기대하는 거예요?"

세나의 목소리는 질문이었다. 언제나 질문이었다.

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분절 배열 역전. 확인. 실행.

번역 엔진이 웅웅 울렸다. 냉각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서율은 코끝으로 뜨거운 전자 냄새를 맡았다. 기계가 힘을 쓰고 있다는 신호. 처리량이 임계치에 닿아있다는 경고.

화면이 깜박였다.

첫 번째 역순 분절이 열렸다.

아무 의미도 없는 잡음이었다. 예상대로. 서율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두 번째를 열었다. 역시 노이즈. 세 번째. 네 번째.

"역시 무리인가."

유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순간, 다섯 번째 분절에서 무언가 나왔다.

문자가 아니었다. 파형이었다. 기존 번역 알고리즘이 언어로 분류하지 못한 층위의 신호. 서율은 자동 해석을 끄고 원시 데이터를 직접 펼쳤다. 파형을 보는 눈은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언어가 피부 아래로 스며드는 것처럼, 신호가 몸 안에서 진동하는 감각. 그 감각이 서율을 번역사로 만들었고, 그 감각이 서율을 지금 이 자리에 붙잡아놓고 있었다.

파형이 언어 패턴으로 잘리기 시작했다. 어절. 문장. 문단.

그리고 서율의 손이 굳었다.

어두운 번역실 화면 위로 역광처럼 쏟아지는 파형 데이터, 그 한가운데 선명하게 새겨진 한 줄의 경고문—서율의 얼굴이 그 빛에 하얗게 물든다

번역을 완료하면 루프가 닫힌다.

열 글자.

아무 수식도 없었다. 앞뒤 맥락도 없었다. 그냥 이 한 줄이, 역순 데이터의 정중앙에 박혀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마치 서율이 반드시 이 순서로 해독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뭐라고 써있어요?"

유진이 화면을 들여다보려 했다. 서율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직여 화면을 살짝 가렸다. 유진이 잠깐 멈췄다가, 각도를 바꾸어 읽었다.

"……루프."

그녀가 말을 삼켰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 안에서 냉각 팬만 혼자 바빴다.

"번역을 완료하면 루프가 닫힌다는 게." 유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경고예요? 아니면 설명이에요?"

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호가 현재시제였다. 수신 강도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호출됐다. 그리고 이제—번역을 완료하면 무언가가 '닫힌다'고 경고하고 있다.

루프.

번역을 '완료'한다는 것. 그게 트리거였다.

"세나 씨."

서율이 처음으로 세나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목소리가 낮고 평탄했지만, 그 평탄함이 오히려 날이 서 있었다.

"신호 안에 다른 목소리가 있다고 했잖아요. 내 것도, 당신 것도 아닌. 그게 뭐라고 했어요."

세나가 10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벽에서 등을 떼고, 서율 쪽으로 두 걸음 걸어왔다. 그리고—

"루프라고 했어요."

그 한마디가 방 안의 공기를 단단하게 굳혔다.

유진이 헛숨을 들이켰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서율의 문장은 물음표가 없었다.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신호를 처음 받은 날부터요." 세나가 답했다. 망설임이 없었다. 숨겨온 게 아니라, 말할 때를 기다려왔던 것처럼.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당신이 역순 해독을 해야 알 수 있었어요. 내가 먼저 말했으면 당신이 역순을 시도했겠어요?"

서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의 전제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번역사는 좋은 번역사가 아니었다. 세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 판단이 맞는 판단인지 틀린 판단인지와 별개로, 세나는 서율이라는 사람을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이 더 불편했다.

"'루프가 닫힌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는 거예요."

"알 것 같아요."

"질문에 질문 말고."

세나가 잠시 서율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대답했다.

"신호가 발신된 문명이 소멸했잖아요. 그런데 신호는 현재시제예요. 그 신호 속의 누군가가 지금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있고, 당신이 번역을 완성하는 순간—그 '연결'이 닫혀요. 어느 방향으로 닫히느냐가 문제인데."

"어느 방향으로."

"그쪽이 이쪽으로 오거나." 세나가 잠깐 멈췄다. "이쪽이 그쪽으로 가거나."

방 안이 조용해졌다. 냉각 팬 소리마저 잠깐 숨을 참는 것 같았다.

유진이 입을 열었다. "잠깐, 그게 무슨—"

딩.

모두의 손목 단말기가 동시에 울렸다.

서율이 화면을 봤다. 유진도 봤다. 세나도 봤다.

발신처: 성문번역국 오강 국장실. 수신처: 번역실 전체 단말. 내용: 본일부로 KH-4200 수신 데이터 전체를 국가 기밀 1등급으로 재분류함. 해당 데이터에 대한 열람·번역·복사·전송 권한 전면 차단. 위반 시 「우주통신보안법」 제17조에 의거 처리. 즉시 이행.

—국장 오강.

유진이 먼저 터졌다.

"지금 이게——" 그녀가 단말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타이밍에? 우리가 역순 해독 시작한 거 어떻게 알았어요?"

서율은 번역실 천장 구석을 봤다. 번역실 내부 카메라. 국장 권한으로 언제든 열 수 있는 모니터링 채널. 그걸 모른 게 아니었다. 다만—이 타이밍은 달랐다. 역순 해독 결과가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5분이 채 안 됐다. 오강이 실시간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번역 엔진 잠궈요."

서율이 말했다. 유진이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키보드로 손을 뻗었다.

"잠깐, 그거 잠그면——"

"알아요."

번역 엔진 로컬 잠금. 실행.

국가 기밀 격상 명령은 서버 단에서 데이터 접근을 차단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서율의 번역기는 지금 로컬 캐시 상태로 마지막 해독 결과를 붙잡고 있었다. 서버에 올라가지 않은 것은 차단할 수 없었다.

5분. 아마 5분 안에 국장실에서 직접 누군가 내려올 것이었다. 혹은 전산 보안팀이 로컬 강제 종료를 시도할 것이었다.

서율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화면을 캡처. 파형 데이터 오프라인 백업. 그리고——번역기 입력창.

커서가 아직 깜박이고 있었다.

번역을 완료하면 루프가 닫힌다.

완료하면. 완료하면.

완료하지 않으면 루프는 열려 있다.

서율은 입력창 앞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치지 않았다. 올려놓기만 했다. 키보드의 미세한 열기가 지문 끝으로 전해졌다. 손 아래에 무게가 있었다. 7년 치의, 열지 못한 음성 메시지만큼의 무게.

신호 속의 나는 이미 소멸한 문명 안에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

경고를 보냈다. 이미 보냈다.

서율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없었지만 모양은 분명했다.

—얼마나 전에.

번쩍이는 차단 알림 속에서도 서율이 홀로 번역기 입력창 앞에 손가락을 올린 채 굳어있는 뒷모습, 커서의 깜박임이 그녀의 어깨 위로 차갑게 튕긴다

딩딩딩.

경보음이 아니었다. 단말기였다. 유진의 것. 그녀가 화면을 봤다. 눈이 커졌다.

"서율 씨." 목소리가 달랐다. 빠른 유진 특유의 리듬이 돌아왔지만, 그 안에 뭔가가 껴있었다. 무거운 것. "짧게 말할게요, 근데 길어질 수도 있어요——국장이 번역실로 내려오는 거 아니에요. 전산팀이에요. 여섯 명."

"몇 분."

"3분. 복도 카메라 지금 공유받았어요."

세나가 움직였다. 서율보다 빠르게,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목—화상 흔적이 있는 왼쪽 손목—이 번역기 측면 포트에 연결된 외장 드라이브를 낚아챘다.

"뭐 하는 거예요."

서율이 물었다.

"백업." 세나가 짧게 답했다. "당신 것 말고, 내 것."

"내 번역기에서——"

"내 손목 파형이 보조 신호에 있잖아요. 나도 수신자예요."

서율이 멈췄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열불이 치밀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2분." 유진이 말했다.

서율은 입력창을 바라봤다. 커서. 깜박임. 답장을 기다리는 무언가. 4,200광년 너머에서, 이미 소멸한 자리에서, '이서율'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무언가.

번역을 완료하면 루프가 닫힌다.

완료하지 않아야 했다. 아직은. 지금은. 그러나——

서율은 입력창에 딱 한 글자를 쳤다.

네.

엔터를 치지 않았다. 손가락이 엔터 키 위 0.1밀리미터 거리에서 멈췄다. 커서가 '네' 뒤에서 깜박였다. 보내지 않았다. 보내지 않았지만 썼다.

그 한 글자가 서율에게는 7년 만에 처음 쓰는 답장이었다.

"1분."

유진의 목소리.

서율이 입력창에서 손을 뗐다. '네'는 지우지 않았다. 창을 최소화했다. 번역기 로컬 잠금 상태 확인. 오프라인 백업 완료 확인. 그리고——

"유진 씨."

"네요?"

"오강이 이 타이밍에 차단한 거."

"네."

"역순 해독 결과를 봤기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유진이 잠깐 멈췄다.

서율은 화면을 껐다. 번역기 전원은 유지한 채, 화면만. 로컬 캐시는 전원이 살아있는 한 증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유진을 봤다.

"'번역을 완료하면 루프가 닫힌다'——오강은 이 내용을 알고 있어요."

유진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니까 루프가 닫히기 전에 막으려는 거예요. 기술 정보 확보가 아니야. 루프 자체를 막으려는 거."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여럿이었다. 빠르고, 무거웠다.

세나가 드라이브를 주머니에 넣으며 서율 옆에 섰다. 유진이 서율 다른 쪽으로 섰다. 세 사람이 나란히, 닫힌 문을 바라봤다.

번역실 문 앞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 서율·유진·세나, 문 틈으로 새어들어오는 복도의 차가운 형광빛이 세 사람의 발 앞에 길게 뻗어있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전산팀이었다. 정복 차림. 여섯 명. 선두가 서율을 봤다.

"이서율 번역사님, 국장 명령에 의거—"

"알아요."

서율이 끊었다.

"번역기 로컬 잠금 풀고 기기 인계하시면——"

"한 가지만요."

서율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번역실 온도가 2도쯤 내려간 것 같은 목소리.

"국장님이 '루프'가 뭔지 알고 있어요. 그 단어는 이번 신호 데이터 어디에도 일반 접근 권한으로는 열리지 않아요. 오늘 역순 해독을 해야 처음 나오는 단어예요."

선두가 표정을 굳혔다.

"그 단어를 오강 국장이 알고 있다는 건——누군가 이 신호를, 우리보다 먼저 해독한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침묵.

6초.

선두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율은 번역기 로컬 잠금을 풀었다. 기기를 인계했다.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이 필요 없었다. 오프라인 백업은 이미 됐고, '네'라는 한 글자는 여전히 입력창에 있었고——

그리고 서율의 머릿속에는 이제 진짜 질문이 자리를 잡았다.

오강은 얼마나 전부터 알고 있었나.

그리고——루프가 닫히면, 누가 사라지는가.

유진이 서율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밖으로 나가자는 신호. 세나는 이미 문 쪽으로 걷고 있었다.

서율은 마지막으로 번역실을 돌아봤다. 꺼진 화면. 기기를 넘겨받은 전산팀. 그리고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하는, 열리지 않은 입력창.

네.

보내지 않은 답장.

아직 루프는 닫히지 않았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유진이 낮게, 그러나 빠르게 속삭였다.

"짧게 말할게요, 근데 진짜 길어질 것 같아요. 오강 국장이 루프 단어를 아는 게——혹시 전임 번역사 연구랑 연결돼요? 제가 몇 주 전에 번역국 구기록 열람 요청 넣었는데, 오강 국장 권한으로 반려됐거든요. 25년 전 자료예요."

서율이 걸음을 멈췄다.

25년 전.

전임 번역사.

죽은 연인의 이름이 목구멍에 걸렸다. 서율은 그것을 삼켰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 자료 어디 있어요."

"반려됐다고요——"

"어디 있냐고요."

유진이 잠깐 서율의 눈을 봤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국장실 3층 물리 보관실에요. 전산화 안 된 거예요."

세나가 두 사람 옆에서 멈춰 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왼손, 화상 흔적이 있는 손목이 소매 밖으로 아주 조금 드러나 있었다. 파형. 신호와 같은 파형.

그리고 서율은 문득 깨달았다.

세나의 손목에 그 흔적이 생긴 것은——신호 수신 이후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그 흔적이 먼저 생기고, 신호가 온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복도의 형광등이 윙 하고 떨렸다.

서율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3층. 물리 보관실. 25년 전 자료.

아직 루프는 닫히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있었다.

얼마나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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