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2화 — 재고품은 검수가 필요합니다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처마 끝에서 마지막 물방울이 돌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그 작은 충격이 물결처럼 번지다 사라지는 것을, 서이린은 카운터 뒤에 선 채로 들었다. 손님이 문을 나선 지 얼마나 됐을까. 방울이 하나 더 떨어지고, 또 하나 더 떨어지고. 이린은 탐지 반지를 낀 손가락을 카운터 아래로 깊이 감추었다. 손님이 이미 사라진 뒤에도, 마치 아직 들킬 수 있다는 것처럼.
심홍빛.
이린은 그 두 글자를 소리 없이 입술로 형태만 만들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삼 년이다. 아르셀 제국 감정 거리의 뒷골목, 간판도 제대로 못 달고 세 들어 사는 삼류 가게에서, 이린은 지금까지 어떤 의뢰인의 결정체에도 심홍빛 반응을 본 적이 없었다. 감정 탐지 반지는 색으로 등급을 말한다. 회색은 소멸된 감정, 청색은 억압된 감정, 황금빛은 활성화된 감정. 그리고 심홍빛은—
교과서를 처음 펼쳤을 때부터 이린은 그 챕터를 세 번 읽었다. '감정이 이미 수신인을 향해 완전히 각인된 상태.' 비유하자면 자물쇠가 잠긴 것이 아니라, 자물쇠의 내부 구조 자체가 특정 열쇠의 형태로 굳어버린 것. 다시 말해, 그 손님의 사랑 결정체는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이미 누군가를 향해 불가역적으로 방향이 잠겨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반지가 가리킨 수신인의 방향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은—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이린은 소리 내어 말했다. 혼잣말이 빈 가게 안에서 메아리처럼 흩어졌다. 가게는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색유리 병들 속 결정체가 희미하게 빛났다. 누군가의 첫사랑, 누군가의 이별, 누군가의 마지막 온기—진열장 안에는 이름 없는 감정들이 잠들어 있었다.
이린은 카운터 서랍을 열고 손님이 두고 간 금화를 꺼냈다. 황실 주조소 문양. 손바닥 위에서 가만히 오후 빛을 받으며 둥글게 빛나는 그것을, 이린은 뒤집지 않았다.
뒤집으면 황제 문양이 나온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자신이 이 거래에서 '알고 있는 자'가 되어버린다.
아는 것과 모르는 척하는 것 사이의 간격. 이린은 삼 년 동안 그 간격 위에서 줄타기를 해왔다. 균형이 무너지면 가게를 잃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잃는다. 전생에서 이미 한 번 잃었다.
"모르는 척이 자산입니다, 서이린."
이번에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금화를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딸칵, 서랍이 닫혔다. 그 소리가 마침표처럼 가게 안에 떨어졌다.
이튿날 정오, 그 손님이 돌아왔다.
이린은 손님이 문을 밀고 들어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이미 준비가 끝나 있었다.
카운터 위에는 감정 감정서 양식 세 장, 탐지 도구 세트, 그리고 일부러 펼쳐둔 《감정 결정체 법의학 실무 안내》 3판이 놓여 있었다. 전문가처럼 바빠 보이기 위한 소품 배치. 이린의 오른손은 깃털 펜을 잡고 있었고, 눈은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문 쪽 공기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게 있는 발소리. 서두르지 않는 보폭.
손님이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
이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제와 같은 인물이었다. 단정한 짙은 회색 외투, 모자를 벗으니 드러나는 은빛이 살짝 섞인 흑발, 그리고 반응 없는 은빛 눈. 어제의 빗속보다 조명이 밝아서인지 윤곽이 더 선명했다. 날이 선 턱선, 무심하게 접힌 옷깃, 그러나 그 무심함이 연습된 것임을 아는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종류의 단정함. 손님은 가게 안을 한 번 훑었다. 천천히, 낭비 없이, 마치 공간 전체를 장기판 위의 말처럼 정렬하듯.
이린은 그 시선이 자신을 지나쳐 진열장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품평하는 눈이다. 아마 어제 이후 자신의 가게를 나름대로 조사했을 것이다. 등록부를 뒤졌을 수도 있고, 거리 상인들에게 물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서이린. 삼류 중개상. 특이사항 없음.'
이린은 속으로 웃었다. 정확히 그것이 그녀가 삼 년 동안 공들여 쌓은 평판이었다.
"어서 오세요."
깍듯하지 않게, 그러나 무례하지도 않게. 적당히 바쁜 사람의 목소리로 이린은 말했다.
"예약 손님이신가요, 아니면 어제에 이어서—"
"어제에 이어서."
짧게 잘렸다. 손님은 어제처럼 카운터 앞 의자를 직접 끌어당겨 앉았다. 자신이 앉힐 곳을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 그러고는 이린의 서류 더미 위로 시선을 내렸다.
"어제 당신은 '정밀 감정'이 필요하다고 했소."
"맞습니다."
"그 근거는."
이린은 펜을 내려놓았다. 여기서 머뭇거리면 끝이다. 그녀는 서랍에서 빈 감정 감정서 한 장을 꺼내 카운터 위에 펼쳤다. 종이가 반듯하게 펴지는 소리. 작은 소리였지만 가게 안의 침묵 속에서는 선명했다.
"손님의 감정 결정체는 억압 상태입니다. 그것 자체는 제가 어제 말씀드렸죠. 문제는—" 이린은 손가락으로 서류의 '감정 등급' 칸을 가볍게 두드렸다. "—억압 상태의 결정체를 '새 결정체'로 덮어씌우면, 기존 것이 충돌 반응을 일으킬 수 있어요. 최악의 경우 둘 다 소멸합니다. 감정이 감정을 잡아먹는 거죠. 저는 그런 사고를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이린은 잠깐 서류에 눈을 내렸다. "꽤 오래된 상처가 남았습니다."
침묵.
손님의 눈이 이린에게 고정되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정확한 무게로. 이린은 그 눈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흔들리면 진다. 흔들리는 척을 해도 진다. 지금 필요한 건 무감각이 아니라 평온이었다. 조명처럼—타오르되 흔들리지 않는 것.
"그래서?"
"그래서 먼저 억압된 결정체의 상태를 정밀하게 진단해야 합니다. 언제부터 억압됐는지, 외부 개입이 있었는지, 자발적 봉인인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올바른 감정 구매 계획을 세울 수 있고요. 이게 저희 가게의 표준 프로세스입니다."
이린은 태연하게 서류를 앞으로 밀었다.
"물론, 수수료는 별도입니다."
손님의 눈에 미세한 무언가가 지나갔다. 불쾌함인지 흥미인지, 단 0.3초라 이린은 분류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라지기 전에 분명히 있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표준 프로세스."
"네."
"삼류 중개상의."
이린은 입가가 씰룩이는 것을 참았다. 참으면서 카운터 위에 팔꿈치를 올렸다. 의도적으로 편안한 자세로.
"삼류 중개상도 프로세스는 있죠. 없으면 그건 가게가 아니라 노점이니까요."
순간, 손님이—웃었다.
'웃었다'고 하기엔 너무 작았다. 입꼬리가 0.1밀리미터 올라갔다가 즉시 원위치했다. 눈 주변 근육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놓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린은 놓치지 않았다. 십 년 넘게 감정 결정체를 다루면서 몸에 밴 관찰 습관이, 황제의 0.1밀리미터 균열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저 사람, 지금 재미있어하고 있다.
이린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한 번 뛰었다. 예상 밖의 것을 봤을 때 몸이 먼저 반응하는 그 종류의 박동. 그녀는 그것을 즉시 눌러 꺼트렸다. 심장이 하는 말은 나중에 들어도 된다. 지금은 눈앞의 게임이 먼저다.
"정밀 감정에 걸리는 시간은."
"결정체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빠르면 이틀, 길면 일주일."
"일주일."
손님이 그 단어를 입안에서 굴렸다. 마치 시세를 계산하듯. 아니면 일정을 조정하듯.
"매일 방문해야 하오?"
"정밀 감정의 기본은 '연속 측정'입니다. 감정 결정체는 매일 조금씩 상태가 달라지거든요. 감정이란 게 원래 고정된 물질이 아니니까요. 하루 한 번, 방문 또는—" 이린은 잠시 끊었다. 호흡 하나만큼의 간격. "—결정체 채취 샘플을 맡기시면, 제가 대신 측정할 수도 있습니다."
"채취."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손톱보다 작은 파편이면 충분해요. 아프지도 않고, 복원도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채취 사고를 낸 적이 없어요."
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왼손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이린은 그것을 보았다.
손가락이 아주 천천히, 자신의 가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 왼쪽 가슴. 감정 결정체가 위치한 곳. 생각이 먼저가 아니었다. 몸이 기억을 따라 움직이는 동작—누군가 소중한 것을 무의식적으로 확인하려 할 때 나오는 그 동작이었다.
이린은 호흡을 제어했다. 가슴이 오르내리지 않도록. 눈이 그 손가락을 쫓지 않도록.
손님은 그 동작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외투를 살짝 건드리다 멈추더니, 이내 다시 카운터 위로 내려왔다. 완전히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이린은 그 순간 탐지 반지가 손가락 안쪽에서 미미하게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심홍빛의 잔열.
결정체가 살아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반응하고 있다.
아직 이 자리에, 이 사람이 앞에 있는데.
이린은 깃털 펜을 다시 집어 들었다. 손이 떨리지 않도록 힘을 주어. 펜촉이 서류에 닿는 각도를 조정하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숫자를 적는 척. 계산하는 척.
"채취는 선택사항입니다. 매일 방문하셔도 됩니다. 어느 쪽이 편하세요?"
"방문하겠소."
짧고 확정적이었다. 협의의 여지를 두지 않는 말투. 원래 그런 사람인지, 아니면 이 가게에 계속 올 이유를 스스로도 묻지 않기로 한 것인지. 이린은 그 경계를 긁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정식으로 의뢰서를 작성하죠." 이린은 서류를 손님 쪽으로 밀었다. "성함과 연락처를 적어주세요. 가명이어도 무방합니다. 저는 결정체만 봅니다."
손님이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그러고는 펜을 집어 들고 두 글자를 적었다.
'K.'
이린은 그것을 보고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알파벳 하나. 이름도 아니고 두문자도 아닌, 가장 최소한의 흔적. 이 사람이 이 거래에서 남기려는 것의 크기가 딱 그만큼이라는 뜻이다.
"K 씨. 의뢰 내용은 '봉인된 감정 결정체 정밀 감정 및 구매 상담'으로 기록하겠습니다. 총 수수료는 선불로—"
"얼마오."
이린은 숫자를 말했다. 삼류 중개상이 부를 수 있는 선에서 최대치를 계산한 숫자였다. 너무 낮으면 의심받는다. 삼류답지 않은 감식안을 가진 사람이 너무 싼 값을 부르면 무언가를 노린다는 신호가 된다. 너무 높으면 쫓겨난다. 이 가격은 이틀 동안 잠을 자면서 계산한 숫자가 아니었다. 어제 밤 한 시간 안에 끝낸 계산이었다. 이린은 숫자에 빠른 사람이었다.
손님은 잠시 이린을 바라보았다.
"비싸군."
"정밀 감정은 기술직입니다. K 씨의 결정체 상태는 제가 어제 처음 봤을 만큼 희귀해요. 희귀한 증상에는 그에 맞는 진단비가 책정됩니다. 어디서든 다를 거 없어요."
"다른 곳에서 더 싸게 해줄 수 있다면?"
이린은 서류에서 손을 거두었다. 천천히, 소리 없이.
"그러시면 어서 가시죠."
서류를 도로 당겨가려 했다.
손님의 손이 먼저 서류 위를 덮었다.
이린의 손가락이 서류 끝에서 멈췄다. 두 사람의 손이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2센티미터 거리에 있었다. 이린은 그것을 보았다. 손끝 마디의 각도, 외투 소매 너머로 드러나는 손등의 선. 그리고—탐지 반지가 다시 따뜻해졌다. 이번엔 전보다 조금 더. 조금 더 빠르게.
이린은 손을 뒤로 빼지 않았다. 빼면 진다.
"삼류 중개상 치고."
손님이 말했다. 낮고 고른 목소리. 아무것도 새지 않는 목소리였다.
"배짱이 있군."
이린은 눈을 들었다.
손님의 은빛 눈이 정면에 있었다. 이 눈이 교과서 화보에서 봤던 황제의 눈이라는 것을, 이린은 알고 있었다. 제국의 공식 초상화에서 화가들이 가장 공들여 그리는 부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눈.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눈은 황제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는' 어떤 사람의 눈이었다. 평가가 아니라 관찰. 배제가 아니라 집중.
이린은 그 느낌을 서랍 안에 잠갔다. 금화처럼.
"배짱 없으면 이 동네에서 살아남지 못해요."
담담하게 말했다. 감정의 무게를 실지 않고, 그러나 한 음절도 흔들리지 않게. 그러고는 손을 뗐다. 먼저.
손님이 잠시 이린을 보았다. 그 시선이 0.5초 더 머물렀다. 이린은 세지 않은 척했다.
그러다 손님은 서류에서 손을 들었다.
"선불로."
그것이 수락이었다.
K가 돌아간 뒤, 류세이가 뒷문으로 들어왔다.
류세이는 항상 이렇게 들어온다. 초대 없이, 그러나 정확한 타이밍에. 이린이 뒷문에 걸어둔 감지 마법을 류세이는 아마 첫 달에 이미 해제하는 법을 알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이린은 그것을 알면서도 교체하지 않았다. 류세이가 원할 때 들어올 수 있어야, 류세이가 가져오는 정보도 흘러들어올 수 있으니까.
"이린 언니."
류세이는 카운터를 넘어와 이린이 앉은 자리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가볍게. 마치 자기 가게인 것처럼. 이미 손에는 어디선가 사 온 차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찻잔에서 김이 가늘게 올라왔다. 류세이는 한 잔을 이린 앞에 밀어놓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입술로만 짓는 미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늘도 그 손님 왔더라."
"봤어?"
"우연히."
이린은 류세이의 '우연히'를 신뢰하지 않는다. 류세이의 우연은 항상 의도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추궁하면 더 조심하기 때문에, 이린은 그냥 찻잔을 손에 들었다. 따뜻했다. 방금 산 것이다.
"그 손님, 이린 언니한테 어울리기엔 너무 위험한 등급이야."
"등급은 내가 결정해."
"감정 등급은 언니가 결정하지. 근데 손님 등급은 달라."
류세이가 이린의 탐지 반지 쪽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날카로운 눈이었다. 이린은 반사적으로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류세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제 반지 반응 있었어?"
"일상적인 수준이었어."
"거짓말."
"류세이."
이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경고에 가까운 낮춤이었다. 류세이는 잠시 이린을 바라보다가, 한숨 하나를 공기 중에 풀어놓았다. 아깝다는 듯,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언니, 나 그냥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그 사람, 어디 소속인지 알아봤어?"
"굳이?"
"어제 거리 가로등 마법진이 잠깐 꺼졌어."
이린은 손가락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찻잔 손잡이를 쥔 채로.
"황실 소속 마법사들이 구역 스캔을 할 때 쓰는 방식이야. 가로등 마법진을 일시 간섭시켜서 탐지 신호를 차단하거든. 표준 교란 기법 3번." 류세이가 테이블 위에 작은 서류 한 장을 꺼내 놓았다. "그래서 언니 가게 근처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확인해봤는데—어젯밤에 황실 첩보부가 감정 거리 일대 사복 순찰을 돌렸대. 공식 이유는 '감정 암시장 단속 사전 작업'."
이린은 서류를 읽지 않았다. 읽는 척만 했다.
눈은 서류 위를 흘렀지만 머릿속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역시.
카엘 다우테른 황제. 황실 첩보부까지 동원해서 자신의 동선을 은폐하고 감정 거리를 찾아온 것이다. 원작에서 이 시기의 황제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신하도, 귀족도, 심지어 주치의도. 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가장 혼자인 아이러니. 그래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삼류 감정 중개상을 선택한 것이다. 기록에 남지 않는 곳, 물어봐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할 수 있는 곳.
이린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원작을 읽었으니까. 세 번이나.
그리고 그 사실이, 지금 이린에게는 가장 큰 무기다.
황제는 내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가게가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좋아. 그 판단이 정확하도록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언니, 진짜로 의뢰 받을 거야?"
류세이의 목소리가 이린의 계산을 끊었다.
류세이의 눈이 이린의 얼굴을 읽으려 했다. 이린은 그 시선이 닿지 않도록 표정을 매끄럽게 다듬었다. 진열장 유리처럼. 투명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통과시키지 않는.
"정밀 감정 의뢰야. 내 전문이잖아."
"언니 전문이 위험한 손님 받는 거야, 아니면 감정 감정이야."
"같은 말이야. 위험한 감정을 가진 손님이 가장 좋은 수수료를 내거든."
류세이가 이린을 보았다. 오래. 오래라고 느껴질 만큼 오래, 그러나 사실은 숨 두 번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러다 작게 웃었다. 눈은 여전히 웃지 않으면서.
"언니는 진짜."
"진짜 뭐?"
"무서워."
류세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문으로 나가면서, 문틀에 손을 짚고 돌아보았다. 역광이 그의 윤곽을 얇게 깎아냈다. 빛 속에 서 있는데도 어딘가 어두운 사람처럼 보였다. 항상 그랬다.
"그 사람 반지 반응이 심홍빛이었으면, 그건 등급 외야. 언니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이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류세이의 눈이 잠깐 무언가를 담았다가—천천히, 의도적으로, 비워졌다.
"조심해."
문이 닫혔다.
이린은 혼자 남았다.
류세이의 차가 식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열장 결정체들이 희미하게 박동하는 빛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린은 탐지 반지를 낀 손을 들여다보았다.
류세이는 심홍빛이라고 했다.
추측이었을까, 아니면 알고 있었을까. 류세이의 정보망이라면 둘 다 가능하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이 거래가 이제 자신만의 비밀이 아니라는 뜻이다.
속도를 올려야 한다.
이린은 생각했다. 황제가 자신을 믿기 전에, 류세이가 움직이기 전에, 또는 황실 첩보부가 감정 거리 조사를 본격화하기 전에—이린에게 필요한 것은 협상 카드였다. 황제의 결정체를 충분히 읽어낸 데이터. 봉인이 언제 걸렸는지, 누가 걸었는지, 어느 조건에서 해제될 수 있는지. 그 정보를 손에 쥐는 순간, 이린은 단순한 삼류 중개상이 아니게 된다. 황제가 지우기에는 너무 위험한 사람이 된다.
그것이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다. 이번에는.
이린은 서랍을 열었다. 금화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리고 잠시 바라보았다. 황실 주조소 문양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리고 이번에는—뒤집었다.
황제 문양. 날개를 펼친 쌍두 독수리. 아르셀 황실의 인장. 선명하고 정교하고, 조금도 숨길 생각이 없는 문양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서명처럼 새겨놓은 금화. 이 금화가 감정 거리의 삼류 가게에 놓여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황제는 알고 있을까. 아마 알고 있다. 알면서도 냈다. 그것이 또 하나의 정보다.
이린은 감정 감정서 양식을 펼쳤다. 'K'라는 두 글자가 손님의 필체로 적혀 있었다. 반듯하고 최소한이었다. 이린은 그 위에 자신만 알 수 있는 기호 하나를 작게 덧붙였다. 황제를 뜻하는 기호가 아니었다. 심홍빛 반응을 뜻하는 기호였다.
황제를 손님으로 묶어두는 동안, 이린은 그의 결정체의 진짜 상태를 파악할 것이다. 봉인이 언제 걸렸는지, 누가 걸었는지, 얼마나 해제될 수 있는지. 그 정보가 쌓이면, 이린에게는 협상 카드가 생긴다. 황제가 자신을 지울 수 없게 만드는, 살아남기 위한 가장 값비싼 협상 카드.
"감정도 결국 데이터야."
이린은 서류를 덮었다. 내일 K가 다시 올 것이다. 그리고 정밀 감정 두 번째 세션이 시작될 것이다. 이린은 그 시간 동안 황제를 읽을 것이고, 황제는 이린을 장사꾼으로만 볼 것이다.
완벽한 구도다.
탐지 반지가 손가락 안쪽에서 따뜻해졌다.
아주 미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이린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빈 가게. 닫힌 문. 류세이가 나간 뒷문도 닫혀 있었다. 진열장 안의 결정체들이 낮게, 고요하게, 제각각의 색으로 빛났다. 아무도 없었다.
K는 이미 가게 밖으로 나갔다. 한참 전에.
그런데 왜 반지가 아직 따뜻하지?
이린은 천천히 손가락을 폈다. 탐지 반지는 은빛 금속 위에 아주 작은 결정체 파편을 박아 만든 것이었다. 그 파편이 수신인과 가까울 때 온기를 낸다. 정확하게는, 수신인의 결정체가 반응을 보낼 때. 발신인이 생각할 때, 느낄 때, 혹은 수신인의 방향을 향할 때.
K는 이미 거리를 걷고 있을 것이다. 감정 거리의 돌길을 밟으며, 외투 깃을 세우고, 아마 이 가게 일을 이미 오늘의 일정 중 하나로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반지가 따뜻하다.
아직 반응하고 있다는 뜻이다. K의 결정체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린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세게 외면했다. 이것은 정보다. 감정이 아니다. 탐지 도구가 수집한 데이터다. 데이터는 분석하는 것이지 느끼는 것이 아니다.
"…수수료 계산이나 하자."
이린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목소리가 약간 갈라졌다.
처음으로.
이린은 그것을 듣지 못한 척했다. 깃털 펜을 집어 들고 숫자 칸을 채우기 시작했다. 수수료, 측정 회차, 예상 소요 일수.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숫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반지는 계속 따뜻했다.
이린은 숫자를 썼다. 한 줄, 한 줄.
그리고 마지막 칸을 채우면서, 손끝이 아주 조금—떨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