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1화 — 오늘의 재고: 사랑, 미감정(未鑑定) 처리 중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건 오후 여섯 시였다.
하늘이 무너지듯 쏟아지는 비가 아니었다. 선언하는 비였다—오늘 밤은 내가 주인이다, 하고. 빗물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며 맞은편 빌딩 불빛을 수십 조각으로 쪼갰다. 쪼개진 빛들이 가게 바닥 위를 기어다녔다. 이 골목을 아는 사람은, 빗속에서도, 없었다.
감정 거래소 '홍진각(紅塵閣)' 뒷골목—이 도시에서 가장 후미지고, 간판이 가장 작고, 임대료가 가장 싼 구역—에서 서이린은 탐지 반지가 타는 냄새를 맡고 있었다.
정확히는 마나 과부하 냄새. 반지가 탄 게 아니라 오늘 다섯 번째 가짜 결정체를 식별하다가 탐지 회로가 과열된 것이다. 그래도 이린은 반지를 끼고 있었다. 끼고 있지 않으면 손님이 없는 것처럼 보이니까. 손님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사실처럼 보이는 건 장사꾼으로서 죽음이었다.
"3류라는 게 이렇게 피부로 느껴지는 직종이 또 있을까."
중얼거리며 이린은 카운터 위에 반쯤 식은 약초 차를 밀어냈다. 작고 좁은 가게—창문 하나, 진열대 하나, 의자 두 개—에는 오늘 팔린 결정체가 단 한 개도 없었다. 진열장 안에서 결정체들이 각자의 색깔로 맥동하고 있었다. 연두색 '기쁨의 파편', 은빛 '그리움 3등급', 주황빛 '설렘 초급'—전부 재고. 전부 어제도 팔리지 않은 것들. 각각의 빛이 유리 너머에서 조용히, 사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깜빡였다.
이린은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빗물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며 가로등 불빛을 수십 번으로 쪼갰다. 지나가는 사람은—없었다. 이 골목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홍진각'의 간판은 일부러 작게 달아두었고, 마나 등불도 최소 조도로 켜두었다—자본이 없는 사람에게는 눈에 띄는 것 자체가 위험이라는 걸, 이린은 전생부터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전생.
입술이 미세하게 굳었다.
서이린—아니, 전생의 이린은 이 세계를 책으로 읽었다. 《황금빛 결정체》라는 제목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 황제가 '사랑하는 능력'을 되찾아 여주인공 아르셀과 맺어지는 이야기. 이린이 빙의한 조연의 이름은 '서이린'—아르셀의 친구 포지션이었다가 중반부에 황제의 정적에게 이용당해 죽는 역할.
2화에서 잠깐 등장하고. 12화에 제거되는. 그런 캐릭터.
문제는 이린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미 이 몸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고, 더 큰 문제는 12화 결말까지 도저히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본대로 죽을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이린은 원래도 지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전생에서도. 이생에서도.
"그래서 살아남아야지."
이린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장부를 펼쳤다. 오늘 수입: 0. 어제 수입: 감정 결정체 세 파편, 총액 은화 9개. 월세: 은화 50. 이달 남은 날: 12일. 숫자들이 점잖게 나란히 줄을 서서, 이린에게 현실을 통보했다.
이 페이스면 나는 황제 정적에게 이용당하기 전에 굶어 죽겠는데.
생각하다가.
문이 열렸다.
삐걱—
소리가 아니었다. 소리는 빗소리에 묻혔다. 이린이 먼저 인식한 건 공기였다—가게 안의 습하고 미지근하던 공기가 한 순간 팽팽해지는 감각. 마치 방 안에 무게중심이 하나 생긴 것처럼. 누군가가 들어온 게 아니라, 공간이 재배치된 것처럼.
남자였다.
키가 컸다. 어깨가 넓었다. 그 정도는 이린도 처음 0.5초에 알아챘다. 그다음 0.5초에 알아챈 것은—후드가 달린 짙은 감청색 외투. 빗물에 젖어 어깨선을 무겁게 눌러 내리는 천의 질감. 고급 원단이 흠뻑 젖으면 저렇게 빛나는구나, 하고 이린은 이상하게 깨끗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외투 깃 아래로 보이는 손—장갑을 벗은 맨손.
그 손이 이상하리만치 깨끗했다.
손등에 흉터 하나 없고, 마디가 거칠지 않고, 손가락 끝이 고르고 길었다. 일하는 손이 아니었다. 칼을 잡거나 밭을 일구거나 물건을 나르는 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책만 넘기는 귀족의 손도 아니었다—지시를 내리는 손. 결정을 내리는 손. 아래를 내려다보는 데 익숙한 손.
지위가 있어.
이린의 감정사 회로가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깜빡였다.
"영업 중이십니까."
목소리가 낮았다. 질문의 형태를 빌린 문장인데, 어딘지 모르게 확인이 아니라 통보처럼 들렸다. 이미 영업 중임을 알고 들어왔다는 투. 이린은 장부 위에 올려두었던 펜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얼굴은 후드 그늘 아래 반쯤 가려져 있었다. 보이는 것은 턱선, 입매, 그리고 입술—얇고 단정하게 다물어진. 표정이 없었다. 아니, 표정이 없는 게 기본값인 사람이었다. 감정을 쓰는 게 비용이라고 계산하는 사람들. 이린은 살면서 그런 부류를 몇 번 봤다. 그 중 한 명도 싸지 않았다.
"네, 영업 중이에요. 근데 찾아오시기 어려운 가게를 이 비에 찾아오셨다는 건."
이린은 의자에서 일어서지 않은 채 턱을 괴었다.
"급하신 거죠?"
남자가 잠시 멈췄다. 0.3초. 이린은 그 멈춤의 길이를 재었다. 부정하려다 그만둔 사람의 박자였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군."
"그럼 앉으세요. 급하면 앉아서 얘기하는 게 낫거든요. 서 있으면 거절당하고 싶은 것처럼 보여서."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이린 본인도 알았다. 그러나 남자는—놀랍게도—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카운터 너머 이린과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자리에. 빗물이 그의 어깨에서 바닥으로 조용히 떨어졌다.
이린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지시에 따른다. 흥미롭네.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성함은요?"
"K."
"성씨만요?"
"전부다."
이린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후드를 쓰고, 신분을 숨기고, 한 글자 이름을 대는 손님. 이 동네에 그런 손님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고위 귀족이 암시장 결정체를 찾거나, 불법 감정 거래를 하러 오거나. 이린은 그런 손님들을 '위험 등급 A'로 분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위험 등급 A 손님들은 현금을 많이 냈다.
"K 고객님. 저는 서이린이고요, 이 가게 감정사 겸 중개사예요."
이린이 카운터 위에 팔꿈치를 올리며 천천히 앞으로 기울었다. 탐지 반지가 손등 위에서 잠자는 척 조용했다.
"그래서—얼마짜리 감정을 원하세요?"
침묵이 두 박자 흘렀다.
"사랑하는 능력."
이번엔 이린이 멈출 차례였다.
아.
원작대로구나.
심장이 쿵 한 번 뛰었다가 즉시 제자리를 찾았다. 이린은 손끝으로 탐지 반지를 가볍게 건드렸다—별거 아닌 것처럼, 반지를 고쳐 끼는 척하며. 탐지 반지의 온도가 미묘하게 올랐다. 아직 활성화한 것도 아닌데.
"사랑하는 능력이요."
이린은 천천히 되풀이했다. 되풀이하는 동안 표정을 조율했다. 놀람은 8할 눌렀고, 전문적 침착함을 7할 올렸고, 적당한 분량의 호기심을 남겨두었다—이 남자가 경계를 낮추기에 딱 적당한 비율로. "일반 결정체 이식이 아니라, 능력 자체를 원하신다는 거죠? 그러면 등급이 다른데—혹시 진단은 받아보셨어요? 결핍 원인 파악 없이 이식하면 체내 거부 반응이 나거든요. 3일 만에 결정체가 녹아서 사라지고요."
"알고 있다."
"그럼 진단서가 있으신 거예요?"
"없다."
이린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진단서 없이 사랑 결정체 이식을 요청하신 건 저희 가게가 처음이시죠?"
"두 번째다."
두 번째.
이린은 그 말을 뱉어서 조용히 씹었다. 두 번째라는 건 첫 번째가 있다는 것이고, 첫 번째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이 도시에서 감정 결정체 1류 거래소라면—아르셀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금당(金堂).' 원작에서 황제가 처음 사랑 결정체를 찾아간 곳. 그리고 받아들여지지 않은 곳.
1류에서 거절당했어. 그 다음이 여기야.
마음이 이상하게 흔들렸다가—이린은 즉시 그 흔들림을 눌렀다. 동정이 들어갈 자리는 지금 없었다. 전략 계산이 먼저였다.
"좋아요. 진단부터 해드릴게요. 추가 비용 없이—대신 진단 결과에 따라 이식 가능 여부가 갈려요. 거부 반응 나면 저도 책임 못 지거든요."
"진단에 동의한다."
이린은 일어서서 카운터 서랍에서 탐지 봉을 꺼냈다. 가늘고 길쭉한 수정 재질의 도구—감정 결정체의 유무, 크기, 상태를 측정하는 기초 도구. 3류 감정사가 쓰는 것치고는 유독 정밀하게 조율된 물건이었다. 이린이 전생 기억을 총동원해서 직접 손본 것이었다. 그리고 왼손의 탐지 반지를 천천히 활성화했다.
반지가 따뜻해졌다.
이린은 탐지 봉을 들고 남자의 왼쪽 가슴 쪽으로 천천히 뻗었다.
"가슴 쪽에 대도 될까요? 감정 결정체 위치가 보통 흉골 안쪽이라서—"
"상관없다."
탐지 봉이 그의 외투에서 열 손가락쯤 떨어진 공중에서 멈췄다. 이린은 봉 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수정 결정이 미세하게 공명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반지가 터졌다.
소리 없이. 그러나 압도적으로.
심홍—감정 결정체 중에서도 최고 강도를 나타내는 색. 이린의 탐지 반지가 오늘 하루 종일 가짜 결정체들 앞에서 반응했던 연두빛이나 은빛 따위가 아니었다. 진열장 안의 결정체들이 전부 그 빛에 물들었다. 연두색이 붉어지고, 은빛이 장밋빛이 되고, 주황빛이 심홍으로 타오르는—찰나. 가게 전체가 심홍빛 안에 잠겼다가, 0.2초 만에 원상 복귀됐다.
이린의 탐지 반지가 3년 동안 단 한 번도 낸 적 없는 빛이었다.
탐지 봉이 이린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잡아.
이린은 반사적으로 봉을 낚아챘다. 손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남자는 미동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지의 폭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얼굴로.
이린은 반지를 내려봤다. 심홍빛이 아직 가시지 않고 맥동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아니, 마치 대답하는 것처럼.
이 사람.
이린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코끝으로 약초 차 냄새와 빗물 냄새와, 그리고 이 남자에게서 풍기는 희미한 냉기—감정이 오래 억눌려 있을 때 나는 그 특유의 서늘한 냄새—가 뒤섞였다. 겨울 새벽 공기 같은 냄새.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던 시간의 냄새.
사랑 결정체가 이미 있잖아.
이미 가지고 있다. 이 남자가. 지금 '사랑하는 능력'을 사러 왔는데, 정작 그 결정체가 체내에 살아 있다. 잠들어 있거나 억압되어 있거나—어떤 형태로든, 분명히 존재한다. 이린의 반지는 절대 오진하지 않는다. 이 반지 하나만큼은. 3년 동안, 이린이 자기 목숨보다 믿어온 것이 이 반지였다.
이린은 탐지 봉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아주.
태연하게.
"결핍 수치가 좀 독특하게 나오네요."
목소리에서 놀란 기색을 단 한 올도 꺼내지 않으면서. 전문가의 목소리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로. "고객님, 최근에 감정 결정체 관련 시술을 받은 적 있으세요? 억압 시술이라든가."
남자의 턱선이 미묘하게 굳었다.
"무슨 의미로 묻는 건가."
"아뇨, 그냥 진단 루틴이에요." 이린은 태연하게 장부를 펼쳤다. 손이 떨리지 않게 의식적으로 힘을 뺐다. "억압 시술을 받으셨으면 이식 방향이 달라지거든요. 억압된 결정체를 깨우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고, 비용도 반으로 줄어요."
"억압 시술."
남자가 그 단어를 되풀이했다. 짧게. 마치 익숙한 단어인데 자기 입에서 나왔다는 게 불편한 것처럼. 자기 것이 아닌 단어인 척 뱉어놓고, 그러면서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런 시술을 받은 사람은—결정체가 아직 남아 있을 수 있나."
이린은 장부에서 눈을 들어 그를 똑바로 봤다.
"이론적으로는요." 이린이 말했다. "억압 시술은 결정체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봉인하는 거니까요. 봉인이 충분히 강하면 당사자가 아예 인식을 못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없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있는 거죠."
침묵.
그리고—이린의 눈이 그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다—남자가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 가슴을 짚었다. 외투 위로. 손가락 끝이 천을 가볍게 눌렀다. 흉골 바로 위. 힘을 주지 않고, 그냥 올려두듯이. 손가락이 흉골 위에 살며시 올라앉는 그 동작이—
거기 있어? 거기 있는 거야?
하고 묻는 것처럼 보였다.
이린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탐지 반지가 그 순간 또 한 번 미세하게 따뜻해졌다. 반지가 이 남자의 무의식을 읽고 있었다. 손가락이 흉골 위에 닿는 순간, 그 안에 잠든 것이 한 층 더 선명해진 것처럼.
알아. 이린은 속으로만 말했다. 당신 거기 있어요. 이미. 나는 지금 그게 보여. 당신이 모르는 걸 내가 보고 있어.
그리고 그와 동시에—또 다른 생각이 이린의 뇌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기어 올라왔다.
원작에서 이 남자의 사랑 결정체의 수신인은 아르셀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린의 반지가 이렇게 심홍빛으로 폭발한 건—탐지 반지가 단순히 결정체의 존재만 감지하는 게 아니라, 결정체의 방향성까지 감지하기 때문이었다. 방향성. 결정체가 향하는 대상. 결정체가 깨어날 때, 누구를 향해 깨어나는지.
이린은 반지를 가린 채, 아주 조용히, 거의 숨을 참으며 그 방향성의 끝을 확인했다.
반지의 빛이 이린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린의 머릿속이 일순간 하얗게 됐다가, 즉시 차갑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하얗게 됐다가 차가워지는 그 0.5초 사이에, 이린은 이 반지를 세 번 더 확인했다. 오진이 아닌지. 과열이 아닌지. 3년 동안 단 한 번도 오진하지 않은 이 반지가—지금도 틀리지 않았는지.
틀리지 않았다.
결정체는 수신인이 바뀌지 않는다. 그게 감정 결정체의 원칙이다. 한번 방향성이 잡힌 결정체는 그 대상을 향해 성장한다—다른 사람에게 판다고 해도 원래 방향성을 잃지 않는다. 이게 감정 결정체 사기가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 남자의 결정체가 향하는 방향이 이린이라는 건—
전생에 없던 일이야.
원작에서 조연 '서이린'은 황제를 한 번도 직접 만나지 않는다. 이름이 두어 번 언급되고, 12화에 소비되고, 그걸로 끝이었다. 이 장면 자체가 원작에 없다. 이린이 이 가게를 차린 것, 이 골목에 있는 것, 이 비 오는 밤에 카운터 뒤에 앉아 있는 것—전부 이린이 원작 결말을 바꾸기 위해 만든 환경이었다. 12화에 죽지 않으려고.
그 환경이 결정체의 방향성을 건드린 건가. 아니면—원래부터 이 결정체는.
"감정사."
남자의 목소리가 이린의 생각을 끊었다.
"부족한 설명이군."
이린은 눈을 깜빡였다. 그 순간 표정을 가다듬었다. 0.2초 만에. "네?"
"이식 방향이 달라진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라."
명령이었다. 질문이 아니라 명령. 이린은 그 어조를 처리하며—이 사람, 명령에 익숙해. 아래를 두는 데 익숙해.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나한테 먼저 말을 걸었다는 건, 내가 필요하다는 거야. 그 계산을 머릿속 한쪽에 조용히 접어두었다.
필요한 사람이 갑이다. 이린은 그 원칙을 감정 거래소를 차리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구체적으로요."
이린은 카운터 위에 두 손을 올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등받이에서 멀어지는 순간, 가게 안의 남은 심홍빛이 이린의 얼굴 위를 가볍게 스쳤다.
"억압된 결정체를 깨우는 방법은 두 가지예요. 첫째, 봉인을 강제로 해제하는 외부 시술—이건 결정체가 손상될 위험이 있어요. 비용도 비싸고요. 봉인이 오래됐을수록 손상 확률이 올라가고." 이린이 잠시 눈을 남자에게 고정시켰다. 후드 그늘. 턱선. 다물어진 입. "둘째, 당사자가 자연스럽게 결정체를 인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건 시간이 걸리지만 결정체가 가장 건강하게 살아나요. 봉인이 깨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녹는 방식이라."
이린이 잠시 멈췄다.
"두 번째 방법이 결과가 훨씬 좋아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고객님의 결정체가 향하는 수신인이 협조해야 한다는 거죠."
공기가 달라졌다. 미묘하게. 남자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이린만이 알아챌 수 있는 정도로—굳었다.
남자가 이린을 바라봤다.
후드 그늘이 걷혔다. 정확히는 그가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이며 빛이 그의 얼굴에 닿게 두었다. 처음으로 그의 눈이 제대로 보였다. 이린은 그 눈의 색을 본 순간, 한 박자 숨을 놓쳤다. 창밖 빗물 같은 색—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고요하고, 밤하늘 같은 색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차가웠다. 깊고 어둡고, 오래 아무것도 담지 않았던 것들이 담기는 눈.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아주 조금—흔들리고 있었다.
"수신인이 협조해야 한다."
남자가 그 말을 천천히 되씹었다. 마치 처음 듣는 개념을 해부하듯이.
"내 수신인이 누구인지—이미 알고 있나."
이린의 탐지 반지가 다시 한 번 따뜻해졌다.
대답처럼.
이린은—웃었다.
아주 전문적으로. 감정사가 손님에게 짓는 제일 단정하고 제일 비용 계산이 완료된 미소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도 아니고, 전부 안다는 뜻도 아닌. 적당히 차단하고 적당히 열어두는, 협상가의 미소로.
"결정체 진단 결과상 수신인 확인은 고객님 동의 없이 공개할 수 없어요. 개인 정보 보호 원칙이거든요."
"그건—규정 회피 아닌가."
"전문적인 대답이에요." 이린이 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서. "K 고객님. 오늘은 진단까지만 하고, 실제 의뢰는 다음에 진행하는 게 어떨까요? 결정체 관련 결정은 좀 신중하게 하셔야 해서요. 잘못 건드리면—"
이린이 잠시 멈췄다가.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하거든요."
그 말은 결정체 이야기였다.
그 말은 결정체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남자가 이린을 바라봤다. 이번엔 좀 더 오래. 후드 그늘 아래 그 비가 든 색 눈으로. 이린은 시선을 받아냈다. 피하지 않고, 그렇다고 적대적으로 맞부딪히지도 않고—그냥, 있는 것처럼.
침묵이 흘렀다. 빗소리만 창밖에서 계속됐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가 크다는 걸 서 있을 때 다시 한 번 느꼈다. 좁은 가게 안에서 그의 존재감이 천장 쪽으로 팽창하는 것 같았다. 그는 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이린의 눈이 무의식적으로 그 지갑의 질감을 훑었다—최상급 가죽. 장인 제작. 귀족 이상의 물건. 한 줄의 금실 자수가 지갑 테두리를 따라 새겨져 있었다. 황실 문양을 변형한, 그러나 아는 사람이 보면 알 수 있는 디자인.
테이블 위에 금화가 놓였다.
금화가.
금화.
이린은 금화를 바라봤다. 동그랗고 무겁고 압도적으로 노란 금화. 금화 한 닢이면 이 가게 월세의 두 배였다. 이달 수입 전체보다 많았다. 이린의 눈이 금화에 0.5초 머물렀다가—올라왔다.
"진단비."
남자가 말했다.
"진단비는 은화 두 닢—"
"거스름돈은 다음 방문에 차감하겠다."
이린의 입이 살짝 열렸다가 닫혔다.
다음 방문.
자신이 다시 오겠다는 걸 이미 결정하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협상이 아니었다. 통보였다. 이린이 거스름돈을 돌려주겠다고 해도 받지 않을 것이고, 이린이 거절해도 어차피 돌아올 것이었다. 이린의 가게에, 이 비 오는 골목에, 간판도 작고 임대료도 싼 이 자리에.
왜냐면 다른 곳은 이미 다 거절했으니까.
왜냐면—이린은 이 이유를 아직 꺼내지 않기로 했다.
남자는 후드를 고쳐 쓰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등을 보인 채로 멈췄다. 외투 어깨선에서 빗물이 한 방울 바닥으로 떨어졌다.
"감정사. 하나 묻겠다."
"네."
"당신 가게에 오는 손님들은—자신이 원하는 걸 모르는 채로 오는 경우가 많은가."
이린은 그 물음을 잠시 두었다. 열 살짜리 아이도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인데, 이 남자가 묻는다는 건 대답을 원한다기보다—확인을 원한다는 거였다. 자신이 예외가 아니라는 확인. 자신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이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일 많은 경우예요."
"그렇군."
남자가 문을 열었다. 빗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차고 습하고 무거운 밤의 냄새가 가게 안을 순식간에 채웠다.
"다음에 오겠다."
그리고 그는 나갔다.
문이 닫혔다.
빗소리가 다시 창 너머로 물러났다.
이린은 한동안 문을 바라봤다. 그 자리에서, 카운터 뒤에 선 채로. 진열장 속 결정체들이 아까의 심홍빛 세례를 잊은 척 각자의 색으로 다시 조용히 맥동하고 있었다. 연두. 은. 주황. 전부 어제도 팔리지 않은 것들.
이린은 금화를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무게가 손바닥에 박혔다. 앞면에는 황실 문양—날개를 편 황금 매. 뒤집으면 황제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이린은 금화를 한 번 뒤집었다. 그리고 확인했다. K. 각인된 두 획이 깔끔하고 단호하고 어딘지 모르게 외로웠다.
카엘 다우테른.
이 세계의 황제. 《황금빛 결정체》의 남자 주인공. 아르셀의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 12화에서 이린을 이용당해 제거하는 구도의, 간접적 원인.
그 사람이 오늘 이린의 가게에 왔다.
그 사람의 결정체가 이린을 향해 있었다.
이린은 금화를 꼭 쥐었다. 차가운 금속이 체온을 받아 서서히 따뜻해졌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었다. 직업적 흥분인지, 공포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이린은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전략이 먼저였다. 감정 분류는 나중에.
원작에서 황제는 아르셀을 통해 사랑 결정체를 깨운다.
그런데 지금 황제의 결정체는 이린 쪽을 향해 있었다.
원작이 이미 틀어지기 시작했어.
이린이 이 가게를 차린 것, 이 골목에 자리잡은 것, 이 비 오는 밤에 영업 중 등불을 켜두었던 것—그 선택들이 황제의 동선을 바꾸었다. 아르셀보다 먼저 만나게 했다. 그리고 결정체의 방향성은 처음 깨어나는 방향으로 고착된다—이건 감정 결정체 이론의 기초였다. 가장 처음 인식되는 순간, 그 방향으로 굳는다.
이건 패야. 굉장히 유리한 패야.
그리고.
이린은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빗속에 사라진 감청색 외투는 이미 없었다. 빗물만이 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며 빌딩 불빛을 수십 조각으로 계속 쪼갰다.
굉장히 위험한 패이기도 하고.
황제의 결정체가 이린을 향한다는 건—황제가 이린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원작의 남자 주인공이 조연을 의식하기 시작한다는 건. 그 의식이 어떤 방향으로 뻗어나갈지는—이린도 알 수 없었다. 원작이 틀어진 이상, 이 이야기의 끝도 이린은 모른다.
모른다는 건 무섭다.
모른다는 건 가능성이기도 하다.
이린은 금화를 진열장 서랍 깊숙이 집어넣으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가게 안에서, 혼자서—
"K 고객님."
말했다.
"다음에 오시면—제가 더 좋은 견적을 드릴게요."
빗소리가 계속됐다.
이린의 탐지 반지가, 조용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심홍빛으로 빛났다가 꺼졌다.
그건 마치 대답처럼 보였다. 아니, 그건 대답이었다. 이린의 반지는 거짓말을 모른다. 3년 동안, 단 한 번도.
문 너머 골목에 빗소리만 가득했다.
진열장 안 결정체들이 조용히 숨을 쉬었다. 연두. 은. 주황. 그리고—이린의 손바닥 위에서, 서랍으로 들어간 금화가 온기를 간직한 채—황제의 이니셜이 새겨진 면을 위로 향해 누운 채로.
K.
두 획.
깔끔하고 단호하고 어딘지 모르게 외로운.
이린은 서랍을 닫았다.
오늘 수입: 금화 한 닢.
그리고—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무언가 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