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그 목소리가 너무 생생했다
법정은 사람의 언어로 만들어진 도살장이다.
이재율은 그걸 안다.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다—알게 됐다. 여덟 번의 감정자산 소송을 거치는 동안, 그는 방청석에서 울음을 삼키는 사람들을 봤고, 증인석에서 목이 막혀 말을 잇지 못하는 사람들을 봤고, 판결 직후 법정 바깥 복도에서 벽에 이마를 붙이고 서 있는 사람들을 봤다. 모두 상대방 측 인물들이었다. 이재율이 이긴 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좋은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이미 오래전에 포기한 분류다. 그 분류가 필요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어느 쪽인지 의심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재율은 의심하지 않는다. 의심하는 대신 다음 서류를 읽는다.
오전 9시 14분.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4민사법정.
방청석은 절반쯤 찼다—스타트업 업계 관계자들, 기자 두어 명, 구경 나온 법대생들. 감정자산 분쟁은 요즘 주목받는 소송 영역이다. 누군가의 취약함이 계약서 한 장으로 법적 자산이 되는 시대니까. 관계가 무너질 때 사람들이 들고 오는 것들—문자, 녹취, 반쯤 지워진 메모—이 이제 법정 언어로 번역된다. 이재율은 그 번역가였다. 가장 가혹하고, 가장 정확한.
그는 서류 파일을 펼치지 않았다. 외웠으니까.
피고석 방향을 보지도 않았다. 아직은 볼 필요가 없으니까.
하선우가 그 자리에 있다는 건 안다. 오전 8시 45분에 도착했고, 국선 변호인과 짧게 대화를 나눈 후 의자에 앉았다는 것도—오준혁이 어제 저녁에 보고했다. "선배, 피고 스케줄 외우고 계신 거 알아요"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이재율은 그 말을 무시했다. 외우는 게 아니라 파악하는 거다. 전혀 다른 이야기다.
재판장이 개정을 선언했다.
이재율이 일어섰다.
그는 말하기 전에 한 박자, 딱 한 박자를 뒀다. 청중이 숨을 참는 그 틈—계산한 것도 아니고, 극적 효과를 노린 것도 아니다. 그냥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말이 공기를 자를 준비가 됐을 때만 입을 열었다. 준비되지 않은 말은 상처를 내지 못하고 빗겨간다. 상처를 내야 할 때, 빗겨가면 안 된다.
"본 소송은 감정자산 무단 활용 및 신뢰관계 침해에 관한 손해배상청구입니다."
목소리는 낮고, 또렷하고, 빠르지 않았다. 방청석 끝까지 닿았다. 마이크가 필요 없는 목소리—공기를 억지로 밀지 않아도 채워지는 목소리였다.
"원고 차준민은 피고 하선우와 4년간 스타트업 공동창업자 관계를 유지하며, 그 과정에서 상호 간 공유된 감정적 정보—개인의 심리적 취약점, 트라우마, 핵심 의사결정 패턴—가 이후 피고에 의해 제3자와의 투자 협상에서 원고의 신뢰도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활용됐음을 주장합니다."
법률 용어는 마취제와 같다. 듣는 사람을 마비시키면서 동시에 칼이 들어가고 있다는 걸 모르게 한다. 통증보다 차가움이 먼저 온다. 그래서 위험하다—차갑다는 건 느끼는데 다치고 있다는 건 모를 때, 사람들은 가장 깊이 베인다. 이재율은 그 마취제의 용량을 조절하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차갑게, 얼마나 깊이.
그는 파일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꺼내는 손이 흔들리지 않았다.
"증거자료 1번. 2022년 8월 3일 녹취록입니다."
그는 읽기 시작했다.
목소리에 감정을 싣지 않았다—그게 기술이었다. 감정 없이 읽을 때 오히려 더 잘 들린다. 듣는 사람이 감정을 스스로 채워 넣게 되고, 그 감정은 언제나 진짜보다 더 크게 부풀었다. 낭독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잔인한 전달 방식이다. 손을 대지 않고도 멍이 든다.
"— 나 솔직히 말할게. 나 그때 무서웠어. 시리즈 A 날릴 것 같았을 때. 근데 너한테 그 말 할 수 있었잖아. 너한테만. 너는 내가 겁쟁이라고 생각 안 했으니까."
"그랬지."
"그래서 그냥 버텼어. 네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낭독이 끝났다. 이재율은 종이를 내려놨다.
방청석이 조용했다. 조용한 게 아니라—숨소리가 잠깐 통일된 것 같았다. 사람들이 동시에 무언가를 느꼈다는 증거였다. 이재율은 그 감각을 안다. 방청석이 숨을 삼킬 때 변호사는 말을 멈춰야 한다. 침묵이 논리보다 먼저 간다.
"원고는 이 음성 기록이, 피고 하선우에 의해 2023년 투자자 미팅에서 원고의 심리적 불안정성을 시사하는 방식으로 인용됐다고 주장합니다. 원고의 가장 취약한 목소리가, 원고의 신뢰를 허무는 무기가 됐습니다."
그는 피고석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처음으로.
하선우는 앉아 있었다. 정면을 보고 있었다. 변호인 쪽도 아니고, 재판장 쪽도 아니었다—이재율 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재율은 한 박자를 기다렸다. 상대방이 눈을 피하거나, 굳거나, 입술을 잘못 다무는 것을 기다렸다. 열 번 중 아홉 번은 그랬으니까—자기 수치심이 낭독되고 나면, 사람들은 대개 무너진다. 분노하거나, 무너지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든 이재율에게는 유리하다. 무너지면 증거가 되고, 분노하면 또 다른 증거가 된다.
하선우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굳지도 않았다.
그냥 이재율을 바라봤다. 분노도 아니었다. 수치도 아니었다—그보다 훨씬 단순하고, 그래서 훨씬 더 이상한 표정으로. 마치 이재율이 지금 무언가 틀린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아직 이재율 본인만 모른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정정할 의지는 없고, 기다릴 의지는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이재율의 손가락이, 손목시계 테두리를 건드렸다.
그는 그 손을 즉시 서류 위에 얹었다.
지금 그게 뭐였냐.
—그 생각은 접었다. 나중에.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이재율이 법정이고, 법정은 이재율이다. 나머지는 퇴근 후에 처리한다.
"이상입니다."
변론 준비기일은 두 시간이면 끝났다.
이재율이 법정 바깥 복도를 걷고 있을 때, 오준혁이 어깨를 맞추며 따라왔다. 27cm 차이가 나는 키를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좁히면서 나란히 걷는 게 그의 버릇이었다. 따라오는 게 아니라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나타나는 사람이었다. 이재율은 그게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오준혁 본인은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잘 됐어요. 완벽하게."
"응."
"근데."
이재율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준혁이 멈추지 않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계속한다는 건, 할 말이 있다는 거다. 이 사람은 허락을 받고 말하는 타입이 아니라 말하고 나서 허락을 구하는 타입이다.
"피고가 흔들리지 않던데요."
"알아."
"보통은 저 정도 읽어주면 한 번은 흔들리잖아요. 방어적으로 뭔가 반응하거나."
"그러게."
"선배는 흔들렸어요?"
이재율이 그때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복도 창 너머로 서울 중구의 빌딩들이 11월 빛을 받고 있었다. 납빛이었다. 여름이 죽은 색이다. 곧 겨울이 온다는 건, 납빛이 더 짙어진다는 뜻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손목시계요. 두 번 돌렸어요. 오늘."
이재율은 오준혁을 보지 않았다.
"너 그거 언제부터 셌어."
"4화 때부터요. 제가 합류하자마자."
4화라는 건 소송 건수다. 그러니까 오준혁은 이재율이 언제 불편한지를, 이재율 본인보다 더 오래 트래킹해온 셈이었다. 이재율은 그 사실을 뱃속 어딘가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뚜껑은 무거울수록 좋다.
"다음 기일은 12월 4일. 그때까지 녹취록 원본 감정 회신 받고, 투자자 진술서 보강해."
"선배."
"가."
오준혁은 갔다. 그게 그의 또 다른 장점이었다—끝까지 밀지 않는다. 문을 두드리고, 열릴 때까지 기다린다. 이재율이 이 사람을 계속 옆에 두는 이유 중 하나가 그거다. 밀지 않는 사람을 이재율은 믿는다. 믿는다는 게 아니라,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른 이야기다.
이재율은 혼자 복도 끝까지 걸었다.
그냥 이재율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아니다. 피고가 감정을 억누르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어떤 사람은 분노로, 어떤 사람은 무감각으로, 어떤 사람은 맞받아보는 것으로—저항의 형태가 다른 것뿐이다. 이재율은 그 모든 형태를 봤다. 이것도 그중 하나다. 새로운 형태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 이재율이 오늘 아침부터 커피를 두 잔 마셨기 때문이다. 카페인은 판단을 예민하게 한다. 예민한 판단은 없는 것도 있다고 느끼게 한다.
문제없다.
계단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재율은 무시했다.
"잠깐요."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그 복도 길이만큼 납작하지 않았다. 울리는 목소리였다—크지 않은데 닿는 목소리. 벽에 튀어서 오는 소리가 아니라 직진해서 오는 소리. 이재율은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변호사 직업병이다.
이재율이 돌아봤다.
하선우가 서 있었다.
코트를 아직 걸치지 않은 채로, 변호인 서류 파일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다. 국선 변호인은 보이지 않았다. 혼자였다. 복도 대리석 위에 혼자 서 있는 사람은—이상하게 넓게 보인다. 공간과 싸우지 않아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대략 여섯 걸음.
법정 안이 아니었다. 이재율은 그것을 빠르게 계산했다—법정 밖에서의 접촉은 금지가 아니다. 단, 소송에 영향을 주는 발언은 피해야 한다. 이재율은 항상 피할 수 있었다. 법률 언어에는 벽이 있다. 두껍고, 투명하고, 아무도 넘어오지 못하는 벽.
"하실 말씀이 있으면 변호인을 통해—"
"변호사님이 오늘 읽은 거요."
하선우가 한 발 다가왔다. 느리지 않고,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계산된 느낌이 없었다—그냥 말하려면 이 정도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거리를 전술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 이재율은 그런 사람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그 목소리가 저 맞아요. 그 말도 제가 한 말 맞고."
이재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근데 변호사님."
하선우가 멈췄다. 이제 거리는 네 걸음. 이재율은 자신이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인식했다. 물러서지 않은 게 아니라, 물러설 생각을 못 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 녹취록에서 준민이가 '무서웠다'고 했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때 뭐라고 했는지는 읽으셨어요?"
이재율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읽었다. '그랬지'라고 했다. 두 글자. 그게 전부였다—짧고, 낮고, 빠르지 않은 두 글자. 이재율은 그 두 글자를 낭독하지 않았다. 이유는 명확했다. 두 글자가 들어가면 피고가 '수용'하는 쪽이 된다. 무기가 아니라 관계가 된다. 관계는 수치가 아니다—수치가 아니면 증거 효력이 반감된다. 전략적 판단이었다. 합당하고, 정확하고, 방어할 수 있는 판단.
"읽으셨죠. 근데 안 읽으셨잖아요. 법정에서."
목소리에 비난이 없었다.
이상했다. 비난이 없는데 이재율의 뱃속이 묘하게 당겼다. 비난이 있었다면 이재율은 그걸 처리할 수 있었다. 비난에는 반박 언어가 있다. 반박 언어는 이재율이 가장 잘 쓰는 언어다. 그런데 비난이 없으면—반박할 게 없다. 그게 문제였다.
"그 두 글자가 왜 빠진 건지, 변호사님은 아시겠죠."
이재율은 손목시계에 손이 가려는 것을 느꼈다. 겨우 멈췄다.
왜 빠진 건지 안다.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당연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변호사님."
하선우가 이재율을 봤다. 법정에서와 같은 눈이었다. 분노도 아니고, 수치도 아니고—그보다 더 단순한 무언가. 단순하다는 건 복잡하게 꾸미지 않았다는 뜻이다. 꾸미지 않은 것은 방어하기가 가장 어렵다. 방어는 형태를 읽어야 가능한데, 형태가 없으면 읽을 수가 없다.
"그 녹취에서 준민이는 저한테 무섭다고 했고, 저는 그걸 들었어요. 그리고 같이 버텼어요. 그게 배신이에요?"
"그 판단은 법원이—"
"지금 법원 얘기 하는 게 아니에요."
이재율이 말을 멈췄다.
하선우가 다시 한 발 다가왔다. 이제 세 걸음. 복도 형광등이 그의 얼굴 왼편에 떨어졌다. 34살의 얼굴이었다—어리지 않고, 오래되지도 않은. 뭔가를 많이 겪은 것처럼 눈 언저리가 조금 짙었다. 그 짙음이 화장도 아니고 피로도 아닌, 그냥 시간이 쌓인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재율은 그런 얼굴을 오래 보는 버릇이 없다. 증거로 쓸 게 없으면 보지 않는다.
그런데 봤다.
"변호사님한테 묻는 거예요. 사람으로서."
사람으로서.
그 말이 공기 어딘가에 박혔다. 뽑을 수 없는 위치에. 이재율은 그런 말이 있다는 걸 안다—논리가 아니라 물성으로 작동하는 말들. 법률 언어가 마취제라면, 이런 말은 마취가 깨는 순간의 통증이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데 이미 와 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언어가 없었다—아니, 있었다. 법률 언어로는. 법정 언어로는 이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소송 중 피고와의 직접 접촉의 위험성, 감정적 변수가 소송 전략에 미치는 영향, 그 모든 것을 이재율은 조항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하선우는 조항을 요청하지 않았다. 사람 언어를 요청했다. 이재율은 사람 언어를 얼마나 오래 쓰지 않았는지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가늠해보고 있었다—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게 대답이었다.
"…소송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피고와 원고 대리인이 직접 대화하는 것은."
"알아요. 그래서 짧게 할게요."
하선우가 이재율의 눈을 봤다. 피하지 않았다—법정에서와 똑같이.
"그 녹취에서 제 목소리도 있었잖아요."
"있었습니다."
"들으셨을 때 어떠셨어요."
이재율의 폐 어딘가가 좁아졌다.
어디서 오는 감각인지 몰랐다—정확히 말하면, 알고 싶지 않았다. 알면 이름을 붙여야 하고, 이름을 붙이면 존재하는 것이 된다. 존재하는 것은 처리해야 한다. 이재율은 지금 처리할 여유가 없다. 12월 4일까지 할 일이 열다섯 가지다.
"직업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묻는 거예요."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고였다.
고인다는 건 차오른다는 뜻이다. 이재율은 그 침묵이 발목까지 찼다는 걸 느꼈다. 무릎까지 오기 전에 말해야 했다—그런데 무슨 말을. 법률 언어로는 이 침묵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법률 언어로 말하면 이 침묵은 사라지지 않고, 이재율이 사라진다.
형광등이 웅웅거렸다. 복도 어딘가에서 뒤꿈치 소리가 멀어졌다.
이재율은 하선우를 봤다.
그의 직업은 사람의 감정을 읽는 것이다—약점을 찾아서, 해체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는 하선우의 감정을 읽으려고 했다. 읽어서, 이게 어떤 전술인지 파악하려고 했다. 전술이면 방어할 수 있다. 방어는 이재율이 가장 잘 하는 것이다.
읽히지 않았다.
아니—읽혔다. 문제는, 읽힌 것이 전술이 아니었다는 거다.
하선우는 그냥 물었다. 정말로 알고 싶어서. 그 표정이 거짓이 아니었다—이재율은 거짓 표정을 많이 봤다. 계산된 연민, 훈련된 공감, 목적이 있는 시선. 그런 것들은 안다. 이건 달랐다. 그냥 사람이 사람한테 묻는 얼굴이었다.
이재율은 그런 얼굴에 익숙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그 언어를 잃어버렸다—잃어버렸다는 것조차 오늘 이 순간 처음 알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모르고 잃어버린 것은 찾으려는 마음이 없다. 오늘 처음 알았으면, 오늘부터 찾으려는 마음이 생긴다. 이재율은 그 마음을 갖고 싶지 않았다.
손목시계가 차가웠다. 이재율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 같은 대화는 이후에 소송 과정에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말하는 순간 알았다. 이건 답이 아니다. 방패다. 방패를 든 사람은 공격을 막는 게 아니라 자신이 공격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재율은 방패를 들었다. 하선우는 공격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하선우가 짧게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실망도 아니었다. 뭔가를 확인한 것처럼 보였다. 예상했던 것을 확인했을 때의 얼굴—슬프지 않고, 기쁘지도 않고, 그냥 알게 됐을 때의 얼굴.
"알겠어요."
그는 코트를 집어 들고 몸을 돌렸다. 그게 다였다. 반론도, 분노도, 미련을 남기는 말도 없이—그냥 갔다. 마지막 말도 짧았다. 두 글자. 그랬지와 같은 길이였다. 이재율은 그 우연이 우연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재율은 그 등을 봤다.
넓은 어깨가 아니었다. 키가 특별히 크지도 않았다. 그런데 멀어지는 뒷모습이 왜인지 공간을 꽉 채우는 것처럼 보였다—멀어질수록 오히려. 작아지는 게 아니라 짙어지는 것 같았다. 이재율이 눈을 떼지 못하는 방향으로.
그 녹취에서 제 목소리도 있었잖아요.
들으셨을 때 어떠셨어요.
이재율은 그 질문이 거기 있다는 걸 느꼈다. 복도 어딘가에, 형광등 윙윙거림 사이에, 아직도 떠 있었다.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 질문이 있다. 그걸 이재율은 안다. 법정에서도 그런 질문들이 있었다—자기가 만든 질문이 아니라, 상대방이 만든 질문이 자기 안에 박혀서 판결 이후에도 남아 있는 것들. 이재율은 그런 것들을 갖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까지 성공했다.
그는 손목시계를 한 번 돌렸다.
세 번째였다. 오늘.
그날 밤, 사무실에서.
자정이 넘은 시간에 이재율은 녹취록 원본 파일을 다시 켰다.
사무실은 어두웠다.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었다—책상 오른편, 각도를 낮게 눕힌 것. 그 빛이 서류 위에만 떨어졌다. 나머지는 어둠이었다. 이재율은 어두운 사무실을 좋아했다. 밝으면 공간이 너무 많이 보인다. 보이는 것이 많으면 집중하기 어렵다. 어두우면 지금 보고 있는 것만 보인다.
그는 이 파일을 이미 열두 번 들었다—증거 분석 목적으로. 각 발화의 감정 상태, 억양 변화, 침묵의 위치. 모두 체크됐다. 12번이면 충분하다. 13번째는 없어야 한다.
그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 나 솔직히 말할게. 나 그때 무서웠어."
차준민의 목소리다. 32살 남자의 목소리—높지 않지만 얇은. 무서웠다는 말을 할 때 목소리가 0.3초 떨렸다. 이재율은 그걸 이미 알고 있었다. 열두 번 들으면서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 외웠다.
"그랬지."
두 글자.
낮고, 짧고, 많지 않은 목소리였다. 빠르지 않았다—서두르지 않은 두 글자였다. 무서웠다는 말 위에 얹어서, 그 말이 가라앉지 않게 받쳐주는 것처럼 들렸다. 들었다는 뜻이었다. 다 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다 들은 자리에 있겠다는 뜻이었다.
이재율은 재생을 멈췄다.
자신이 왜 이걸 다시 켰는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생각하면 이유가 생기고, 이유가 생기면 그다음이 생긴다. 다음은 없어야 한다. 이건 증거 파일이다. 증거 파일은 감정이 아니라 전략으로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복도에서—
들으셨을 때 어떠셨어요.
이재율은 그 질문에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낮 동안은 몰랐다. 법정에 있었고, 복도에 있었고, 손목시계를 세 번 돌렸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대답이 생겼다.
들었을 때—불편했다.
불편하다는 건 이재율에게 익숙한 감각이다. 증거가 약할 때, 의뢰인이 거짓말을 할 때, 판사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 때—불편하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분류해서, 대응 방법으로 변환하면 된다.
그런데 오늘의 불편함은 분류가 안 됐다.
'그랬지'라는 두 글자를 읽지 않은 건 전략적 판단이었다. 옳은 판단이었다. 지금도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두 글자가 목소리로 들릴 때—파일 재생 버튼을 누를 때마다 들리는 그 두 글자가—뭔가 다른 곳을 건드렸다. 법정 논리가 닿지 않는 곳. 이재율은 그 곳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재율도 안다, 유치한 방어기제다.
그는 사무실 창문을 봤다.
자정의 서울이 거기 있었다. 꺼진 빌딩들, 켜진 빌딩들, 그 사이 어딘가를 달리는 차들. 아무도 이재율의 사무실이 아직 불이 켜져 있다는 걸 모를 것이다. 알아도 상관없다. 이재율은 밤에 일하는 사람이고, 그게 이 도시에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손목시계가 책상 위에 있었다.
퇴근할 때 풀어서 올려놓는 버릇이 있다. 그 시계는 아버지 것이었다—유품이 아니라, 살아 계실 때 주신 것이다. '네가 갖고 있어. 나는 이제 시간을 안 봐도 되는 나이야'라고 하셨다. 이재율은 그 말의 의미를 오래 생각했다. 지금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손목시계가 스탠드 빛에 반사됐다. 차갑게.
이재율은 그것을 돌리지 않았다. 손목에 없으니까 돌릴 수가 없다. 그래서 오준혁의 카운트가 오늘 세 번에서 멈춘 거라는 걸 이재율은 몰랐다. 네 번째는 사무실에서, 아무도 없는 데서, 풀어놓은 시계를 보면서 이루어졌다.
들으셨을 때 어떠셨어요.
대답이 없었다. 아직은. 이재율은 그 '아직'이 뭘 의미하는지, 되도록 오래 생각하지 않을 작정이었다—그 작정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그리고 이재율은, 자신이 작정을 세우는 순간 이미 그 작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걸 모르는 척하는 것도 기술이다. 그 기술이 오늘은 조금, 딱 조금 버거웠다.
그는 파일을 다시 재생했다.
이번엔 두 글자부터.
"그랬지."
자정의 사무실에서, 꺼진 화면이 창문에 반사되고, 손목시계가 스탠드 빛 아래 조용히 놓인 채로—이재율은 그 두 글자를 세 번 더 들었다. 들을 때마다 그 목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더 선명해졌다.
그게 문제였다.
선명해지는 것들은 잊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