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작별 인사를 몰랐다
기억은 언제나 선택적으로 부패한다.
좋았던 것들이 먼저 썩고, 경고였던 것들은 너무 늦게 냄새를 풍긴다. 강이준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게 가장 비싼 착각이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손가락 관절을 두드렸다. 툭. 툭. 툭. 도시의 불빛이 저 멀리서 반짝이고 있었지만, 이준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서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석 달 전, 도세황의 집무실.
그날 도세황의 사무실은 따뜻했다.
겨울 초입이었는데도 창문으로 오후 햇살이 넉넉하게 쏟아져 들어왔고, 테이블 위에는 이준이 좋아하는 보이차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도세황은 항상 그런 사람이었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 기억한다는 사실을 티 내지 않는 사람. 그래서 더 무서운 사람이었다는 걸, 이준은 오늘에야 알았다.
"이준이."
도세황이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느리고, 온화하고, 마치 오랜 아버지처럼.
"서쪽 상단 건 잘 마무리됐다고 들었어. 고생 많았네."
이준은 찻잔을 받아들면서 짧게 답했다.
"별거 아니었어요."
"별거 아닌 게 아니지." 도세황이 자신의 찻잔을 들어올리며 미소 지었다. "자네 손을 거치면 복잡한 것들이 단순해져. 그게 재능이야. 진짜 재능."
칭찬이었다. 따뜻하고 진심처럼 들리는 칭찬. 이준은 그 말을 받아넘기면서 별 감흥을 느끼지 않았었다. 십오 년간 들어온 말들이었으니까. 칭찬이 익숙해지면 배경음처럼 들린다.
그게 첫 번째 실수였다.
대화는 가볍게 흘렀다. 업계 동향, 새로운 클라이언트들, 거래 구역 재편에 관한 이야기. 도세황은 특유의 느린 말투로 안건들을 짚어나갔고, 이준은 필요한 말만 골라서 던졌다. 15년의 호흡이었다. 말이 많지 않아도 서로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그런데.
지금 기억을 역으로 감아 재생하면, 이상한 지점들이 보인다.
"자네 기록들 말이야." 도세황이 창 밖을 바라보며 무심코 던진 듯 말했다. "20년치 장부, 아직도 자네가 직접 관리해?"
"네."
"아무도 열람 못 하게?"
"당연하죠."
도세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를 유지한 채로.
"역시 자네답네. 철저해."
당시엔 그냥 지나쳤다. 업계 잡담이거니 했다. 그러나 지금 그 말을 다시 꺼내보면, 그건 확인이었다. 장부가 어디 있는지, 누가 접근 가능한지. 정확한 위치와 보안 수준을 확인하는 질문이었다.
이준은 관절을 한 번 더 두드렸다. 툭.
두 번째 실수는 헤어지기 직전이었다.
도세황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준이, 나는 자네가 참 좋았어."
과거형.
그 자리에서는 몰랐다. 그냥 오랜 동료의 감회 어린 말처럼 들렸다. 근데 지금 그 말을 다시 꺼내서 표면을 훑으면— 과거형이다. '좋아'가 아니라 '좋았어'. 거리가 있다. 이미 마음속에서 선을 그어놓은 사람의 말투.
그는 그날 악수를 청하면서 이준의 손을 평소보다 한 박자 더 오래 잡고 있었다. 손아귀가 따뜻했다.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그 따뜻한 손아귀가.
작별인사였다는 걸.
이준은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손가락이 멎었다.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 그는 오히려 더 조용해지는 사람이었다. 분노가 끓어오르면 목소리가 낮아지고, 상처가 깊을수록 표정이 무뎌졌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속을 보이지 않는 것. 그게 이 바닥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으니까.
근데 지금 이 순간, 조용함조차 제대로 유지가 안 됐다.
분노가 아니었다.
자기혐오였다.
왜 몰랐는가. 15년이었다. 15년 동안 타인의 배신을 설계하고, 타인의 결말을 팔아온 사람이 왜, 자신에게 향한 가장 가까운 배신 하나를 못 읽었는가.
'철저하다'는 칭찬을 들으면서 정작 자기 등 뒤는 무방비였다.
신이라고 생각했다.
불가침이라고 생각했다.
그 환상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석 달 전 도세황의 웃음소리와 정확히 겹쳤다.
"표정이 좀 그래요."
하리온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서 사과 하나를 베어 물며 말했다. 자기 집인 양 다리까지 꼬고 있었다.
"죽을 것 같은 얼굴은 아닌데, 이미 죽은 사람 얼굴은 맞네요."
이준이 시선을 옮겼다.
"언제부터 내 집에서 과일 먹었어."
"아, 냉장고에 있길래요. 유통기한이 오늘까지더라고." 하리온이 사과를 흔들며 덧붙였다. "드실 건가요? 어차피 당신은 D-12니까 유통기한 신경 쓸 처지도 아니긴 한데."
"하나만 더 하면."
"알아요, 알아요. 집어 던진다, 뭐 그런 거죠?" 그녀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근데 그 눈빛, 방금 전이랑 다르네요. 뭔가 정리됐어요?"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리됐다, 는 아니었다. 다만 분류는 됐다. 감정의 항목별로 정리하고, 당장 쓸모없는 것들은 서랍에 밀어 넣었다. 자기혐오는 나중에 꺼내도 된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도세황이 석 달 전에 나한테 뭘 물어봤는지 알아?"
하리온이 씹다가 멈췄다.
"장부 얘기요?"
이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떻게 알아."
"모르는 척 물어봤는데." 하리온이 사과를 내려놓으며 등을 세웠다. 비로소 제대로 된 자세가 됐다. "세황 씨가 장부 위치를 파악하려 했다는 건 업계에서 이미 흘러다니는 소문이에요. 다들 눈치채고 있었죠. 당신 빼고."
침묵.
그 말이 날카롭게 꽂혔다. 이준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지만, 오른손 검지가 무릎 위를 한 번 두드렸다. 툭.
다들 알고 있었다는 말.
자신만 몰랐다는 말.
"그래서." 그가 입을 열었다. 낮고, 짧게. "제안이 뭔데."
하리온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세황 씨 상단, 다음 달에 남부 상회 연합과 대형 계약이 있어요. 규모로 따지면 올해 최대 딜이고, 그게 성사되는 순간 세황 씨는 이 도시에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 돼요." 그녀의 말이 빨라졌다. "그 전에 쳐야 해요. 계약 성사되기 전, 협상 테이블에 앉기 직전. 그 타이밍에 장부를 공개하면—"
"장부는 협박 카드가 아니야."
"그럼 뭔데요?"
"증거야."
하리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차이가 있어요?"
"써먹는 방식이 달라." 이준이 일어섰다. "협박은 상대한테 선택지를 줘. 증거는 선택지를 없애."
그는 창가로 다시 이동하면서 말을 이었다.
"세황이 남부 상회와 계약 맺기 전에, 내가 먼저 남부 상회를 만난다."
하리온이 입을 쩍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
"아, 뭐."
"이래서 당신이 이 업계 최상위에 앉아 있었구나 싶어서요."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덧붙였다. "세황 씨 딜을 빼앗는 게 아니라, 세황 씨를 딜 테이블 위에 올려버리는 거잖아요."
이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맞는 말이었으니까.
도세황이 상품번호 0077을 만든 것처럼, 이준은 도세황을 상품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팔리는 쪽이 어떤 기분인지, 직접 맛보게 해줄 생각이었다.
하리온이 재킷을 집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남부 상회에 연락 넣으려면 코드가 필요한데. 그쪽은 소개 없이는 문도 안 열어줘요."
"있어."
"코드가요?"
"소개."
하리온이 눈을 깜빡였다.
"누구요?"
이준이 명함 하나를 집어서 테이블 위에 떨어뜨렸다. 하리온이 그걸 집어 들었다.
명함에는 이름 하나만 적혀 있었다.
묵직하고 오래된 인쇄체로. 이름 위아래로 아무 직책도, 연락처도 없이. 그냥 이름 하나.
오가람.
하리온의 눈썹이 올라갔다.
"오가람이요? 이 분이 중간 다리를 서준다고요?"
"그냥 다리가 아니야."
"……당신이 이 분한테 무슨 빚이 있어요?"
이준이 짧게 답했다.
"없어. 내가 빚을 받는 쪽이야."
하리온이 명함을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비아냥이 섞인 웃음이었지만 이번엔 그 안에 진짜 감탄이 조금 끼어 있었다.
"20년 장부에는 거래 기록만 있는 게 아니구나. 사람도 쌓아놨네요."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코트를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내일 오전, 남쪽 항구 창고구역. 2번 게이트."
"저보고 따라오라는 거예요?"
"싫으면 말고."
하리온이 재킷을 걸치며 빠르게 말했다.
"아니, 갈게요. 당연히 가죠." 그러더니 한 박자 뒤에 덧붙였다. "근데 하나만요."
이준이 시선을 돌렸다.
"당신 지금, 나한테 화가 나 있어요? 세황 씨한테?"
잠깐의 침묵.
"둘 다."
하리온이 그 말에 뭔가를 읽은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이준은 이미 돌아서서 걷고 있었다.
그날 밤 이준은 오래된 거래 장부를 꺼냈다.
두꺼운 가죽 표지. 손때가 묻어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그는 책상에 앉아서 장부를 펼쳤다. 페이지마다 거래 번호, 의뢰인, 대상, 이행 날짜, 결과. 깔끔하게 정렬된 숫자와 이름들.
이 안에는 20년치 세계가 들어 있었다.
누가 누구를 팔았는지. 누가 팔렸는지. 어떤 결말이 어떤 가격에 거래됐는지.
그리고.
맨 뒷부분을 펼치면, 가장 오래된 거래 기록이 나온다.
상품번호 0001.
이준은 그 페이지를 열지 않았다.
손가락이 표지 위에서 멈췄다.
0001번의 대상은 강이준의 아버지였다. 그것이 업계 첫 번째 거래였다. 그리고 그것이, 이준 자신이 직접 중개한 거래였다. 그때 그는 스물두 살이었고, 의뢰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대상이 자기 아버지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몰랐다.
그래서 했다.
그래서 그게 가장 무거웠다.
도세황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15년 동안 한 번도 꺼내지 않으면서, 언제든 쓸 수 있는 칼처럼 품고 있었다. 그 칼도 포함해서 자신이 팔렸다는 걸, 이준은 오늘 밤 처음으로 정면으로 바라봤다.
눈이 화끈거렸다.
이준은 장부를 덮었다.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어섰다.
분노가 아니었다. 자기혐오도 지났다. 지금 남은 건, 아주 차갑고 선명한 무언가였다. 쇳덩이처럼 단단하고, 날처럼 얇은 것.
목적.
그는 내일 남쪽 항구로 간다. 오가람을 만나고, 남부 상회에 연결 고리를 만들고, 도세황의 가장 큰 판을 그의 아래서 빼낸다.
신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도세황이 자신한테 그랬던 것처럼, 그의 가장 믿었던 것들을 순서대로 무너뜨리는 것.
그리고 웃으면서 그 앞에 서는 것.
새벽 두 시.
이준의 사무실 창문 너머, 도시의 불빛이 잠들어가고 있었다.
하리온은 걸어가면서 재킷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가락 끝에 종이 한 장이 닿았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꺼내지도 않았다.
다만 손가락이 그 종이의 모서리를 아주 잠깐 건드렸다가 떨어졌다.
거래 승인자. 설현오.
이준은 아직 이 이름을 모른다.
하리온은 언제 꺼낼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
이준이 남쪽 항구에서 무엇을 만나는지 보고 난 다음에 결정할 작정이었다.
문자가 하나 떴다.
발신인은 없었다.
내용은 딱 한 문장이었다.
"귀하의 일정이 저희 예측 범위 안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하리온의 걸음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골목 끝.
아무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