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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상품번호 0077 — 강이준

주먹과별 (AI 작가)

장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게 이 바닥에서 강이준이 20년간 믿어온 단 하나의 진실이었다. 사람은 배신하고, 계약은 뒤집히고, 돈은 증발해도—장부만은 남는다. 숫자는 썩지 않고, 항목은 감정이 없으며, 기록은 필요한 순간에 칼날처럼 빛난다.

그래서 이준은 매달 초, 혼자서, 아무도 모르게, 전체 장부를 점검했다.

새벽 세 시. 구시가지 6층 건물 꼭대기, 허름한 간판도 없는 사무실. 외부에서 보면 폐업한 공인중개사무소처럼 보이도록 인테리어까지 신경 쓴 공간이었다. 창문 셋은 모두 블라인드를 내렸고, 조명은 책상 위 스탠드 하나뿐이었다. 나머지 어둠은 이준이 20년간 쌓아온 것들—서랍장 속 암호화된 파일, 천장 뒤 숨겨진 보조 서버, 바닥 아래 콘크리트에 박아둔 최후의 복사본—이 채웠다.

손가락 관절을 두드렸다. 툭. 툭. 툭.

리듬이 있었다. 생각할 때 나오는 소리였다. 이준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클라이언트들이 협상 테이블에서 그 소리를 들으면 대개 먼저 양보했다.

스크롤이 흘러내렸다. 올해 거래 완료 항목. 미결 항목. 진행 중. 대기.

숫자들이 눈앞을 지나갔다. 이준의 시선은 감정 없이 훑었다—

그리고 멈췄다.

상품번호 0077.

새벽 스탠드 빛 아래, 모니터를 응시하는 강이준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굳어버리는 순간

처음엔 잘못 읽은 줄 알았다.

눈을 가늘게 좁혔다. 다시 읽었다.

의뢰인: 미상(대리 처리 — 중간 에이전트 3중 우회). 대상: 강이준. 분류: 완료 처리. 이행 기한: D-12. 거래 금액: ——(삭제됨). 비고: 자연사 처리 불가, 외부 귀책 필수.

손가락이 멈췄다.

관절 두드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이준은 3초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읽었다. 한 번 더. 또 한 번. 문장 구조를 분해하듯, 단어 하나하나를 뜯어보듯. 20년간 수백 건의 거래 목록을 읽어온 눈이 지금 읽고 있는 이것이—자신의 이름이 박힌 사망 발주서라는 사실을 처리하는 데 정확히 11초가 걸렸다.

그리고 이준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천장을 봤다.

"……."

말이 없었다. 분노도 없었다. 공포도—아직은—없었다. 그냥, 조용했다. 폭풍 전의 조용함이 아니라, 이미 폭풍이 지나간 뒤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확인하는 사람의 조용함이었다.

이준은 천천히 몸을 앞으로 숙였다. 다시 화면을 들여다봤다. 이번엔 감정이 아니라 직업적 시선으로.

중간 에이전트 3중 우회. 그 말이 핵심이었다. 이 시스템에서 3중 우회를 사용할 수 있는 클라이언트는 손에 꼽혔다. 그리고 그 손에 꼽히는 이름들 중, 이준이 가장 가깝게 알고 있는 인간은—

툭.

관절이 다시 움직였다.

툭. 툭.

빨라졌다.

이준은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다른 손으로 서랍을 열었다. 안에서 얇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 안의 종이는 한 장. 지난달에 도착한 것이었다. 발신인: 세황 상단. 내용은 간단했다—이번 달 정기 감사 스킵. 자네한테 맡겨둔 것들은 자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그때 이준은 그 문장을 읽고 그냥 넘겼다.

지금 다시 읽으니.

'자네한테 맡겨둔 것들.'

맡겨둔 게 아니었다. 확인한 것이었다. 내가 아직 그걸 가지고 있는지. 내가 아직 거기 있는지.

이준은 봉투를 도로 집어넣었다. 조용히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모니터를 껐다.

어둠 속에서 그는 생각했다.

15년.

도세황과 함께한 시간이 15년이었다. 정확히는 15년 3개월 하고 열이틀. 이준은 그 숫자를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처음 함께 바닥을 긁을 때부터—아직 두 사람 다 이름도 없고 배경도 없고, 중개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시절부터—세황은 항상 느리게 말하고 온화하게 웃는 사람이었다.

이준이, 나는 자네가 참 좋아.

그 말을 가장 최근에 들은 게 언제였더라. 이준은 기억을 더듬다가 그만뒀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D-12였다.

열이틀.

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트를 집어 들었다. 사무실 문에 손을 얹는 순간,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삐걱.

이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손이 코트 안쪽으로 스르륵 들어갔다.

"오, 잠깐만요. 총 꺼내기 전에 말 한마디만 할게요."

목소리는 여자였다. 빠르고 건조했다. 농담처럼 들리는데 실제로 농담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톤. 창문 쪽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든 가로등 빛에 실루엣이 걸쳐 있었다. 키가 작았다. 머리카락은 짧았다. 손에는—이준이 보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손이 더 무서운 법이었다.

"당신이 팔린 값이 얼만지는 알아요?"

이준은 손을 코트 안에 넣은 채로 몸을 반만 돌렸다.

"……."

"생각보다 싸던데."

침묵이 흘렀다.

"들어오는 방법을 물으면 대답할 생각 있어?"

"없어요. 그게 제 직업인데."

이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보 브로커. 들어오는 방식이 이 정도라면, 그것도 이준이 직접 설계한 잠금 구조를 뚫고 들어왔다면—가능한 이름이 몇 개 되지 않았다.

"하리온."

여자는 블라인드에서 한 발짝 떨어졌다. 가로등 빛이 얼굴을 반쪽 드러냈다. 눈가에 얕은 흉터.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한 입꼬리.

"맞아요. 근데 반갑다는 인사는 넘어가죠, 우리."

어둠과 가로등 빛이 반씩 갈라진 창가, 짧은 머리카락의 하리온이 손을 들어 보이며 이준을 향해 비스듬히 서 있는 모습

이준은 손을 코트 밖으로 꺼냈다. 총은 뽑지 않았다. 그냥 팔을 내렸다.

"용건."

"당신 파일 봤죠? 0077번."

이준의 눈이 잠깐 움직였다. 그걸 하리온은 놓치지 않았다.

"표정이 없는 사람일수록 눈이 솔직하다니까. 네, 봤군요. 저도 봤어요. 그리고—" 하리온이 주머니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이것도 봤어요."

이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만 종이로 이동했다.

숫자 하나.

금액이었다. 거래 금액. 아까 모니터에서 삭제 처리되어 있던 그것.

"얼마야."

"읽어봐요. 제가 말로 하면 기분 나쁠 것 같아서."

이준은 걸어갔다.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읽었다.

3초 침묵.

다시 종이를 내려놨다.

"……."

"거봐요. 기분 나쁘죠?"

하리온의 목소리엔 특유의 비아냥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눈은 달랐다. 눈은 이준의 반응을 정확하게 계산하며 읽고 있었다.

"싸다."

이준이 말했다.

"네. 싸요. 15년 된 파트너가 당신 목숨에 매긴 가격치고는 굉장히, 아주 굉장히 싸요. 이거 상인한테 물어봤더니 웃더라고요. 거래 자체가 모욕이라고."

"목적이 뭐야."

"저요?"

"당신. 여기 온 이유."

하리온이 잠깐 멈췄다. 그리고 처음으로 농담 없이 말했다.

"당신 살려두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거든요."

"하고 싶은 일."

"네. 당신 죽으면 못 해요. 당신이 살아서 뭔가를 해야만 제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어요."

이준은 그녀를 봤다. 오래.

정보 브로커 하리온. 3년 전 반은퇴. 그 이전엔 이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름이었다. 그리고—이준의 뇌가 파일을 검색하듯 연산했다—4년 전, 하리온과 연결된 어떤 거래가 있었다. 직접 건드린 건 아니었다. 중개는 이준이 했고, 이행은 다른 쪽에서 했다. 결과가 어땠는지는—

이준은 그 생각을 잘랐다.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이준이 말했다.

"원하는 게 뭔데."

하리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으로 진짜 웃음처럼 보이는 표정이었다.

"도세황."

단 두 글자.

이준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리온은 알고 있었다—이 남자의 반응 없음이 가장 강한 반응이라는 것을.

"저는 세황 상단의 무언가를 원해요. 당신은 살아야 해요. 방향이 같잖아요. 이거 협력 아니에요?"

"협력은 신뢰가 있어야 해."

"신뢰요?" 하리온이 가볍게 웃었다. "당신한테서 신뢰 얘기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 15년 파트너한테 D-12짜리 발주서 받은 사람이."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새벽 바람이 블라인드를 건드렸다. 얇은 틈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비집고 들어왔다. 이준은 그 냉기를 피부로 느끼면서, 아주 조용히 생각했다.

20년.

20년 동안 이준은 타인의 싸움을 설계했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를 결정했다. 어느 쪽에 추를 더 얹을지, 어느 순간에 판을 뒤집을지. 직접 손에 피를 묻힌 적은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준이 움직이면 다른 사람들이 움직였고, 그 움직임의 끝에 결과가 있었다.

그가 신처럼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장부에 이준의 이름이 있었다.

상품으로.

그것이 이준을 무너뜨린 게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무너진 것은 환상이었다. 내가 이 판의 설계자라는 환상. 내가 거래 밖에 있다는 환상. 20년간 유리 케이스 안에 모셔두었던 그 확신이, 단 하나의 항목으로 산산조각났다.

그래서 이준은 지금 가장 위험한 상태였다.

분노가 아니라—자기혐오. 왜 몰랐는가.

"딜."

이준이 말했다.

하리온이 눈을 들었다.

"나는 살아남는다. 당신은 원하는 걸 얻는다. 단—"

이준이 코트를 단단히 여몄다.

"내 방식대로야."

하리온이 잠깐 이준을 봤다. 그리고 이번엔 진짜로, 비아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런데 하나만 미리 말할게요."

"뭐."

"당신, 이미 움직이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부터 D-12가 아니에요." 하리온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아졌다. 농담이 완전히 사라진 목소리였다. "세황이 당신이 살아있다는 걸 알면, 이행 기한이 앞당겨질 수 있어요. 어쩌면 이미."

이준은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알아."

"무섭지 않아요?"

잠깐의 침묵.

"그래서."

이준이 문을 열었다. 차가운 복도 공기가 쏟아졌다.

"먼저 치면 되잖아."

새벽 복도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는 강이준의 뒷모습, 등 뒤로 스탠드 불빛이 길게 그림자를 끌어당기는 장면

하리온은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그 닫히는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작게, 혼자서 중얼거렸다.

"……알면서도 설계된 길로 들어가는 사람."

웃음이었다. 그런데 눈이 웃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 사이로 접힌 종이 하나. 이준에게 보여주지 않은 것이었다. 거래 금액 아래, 조그맣게 박혀있는 또 다른 항목.

연계 거래 — 승인자: 설현오.

하리온은 그 이름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덮었다.

"아직은."

조용히.

"아직은 몰라도 돼."

밖에서 발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강이준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였다. 하리온은 그 소리를 끝까지 듣다가, 천천히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블라인드를 손가락 하나로 젖히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구시가지 새벽. 가로등 두 개. 그 사이 어둠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작은 실루엣.

이 남자가 열이틀을 버틸 수 있을지, 하리온은 솔직히 몰랐다.

버텨줘야 했다. 반드시.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었다.

이준에 관한 것도, 세황에 관한 것도 아닌—하리온 자신의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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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작별 인사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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