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1화 — 죽지 않은 자의 유언
세상에는 두 종류의 침묵이 있다.
아직 할 말이 남은 침묵과,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침묵.
이한결은 열 번째 세션을 마친 뒤 볼펜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그 둘을 구분할 수 있게 된 것. 그것이 이 직업에서 얻은 유일한 소득이라고. 어쩌면 유일한 손해이기도 했다. 딸깍. 딸깍. 딸깍. 볼펜 클립을 세 번 누르는 버릇은 세션이 끝날 때마다 도드라졌다. 마치 문장 끝에 마침표를 세 번 찍는 것처럼. 아니면 작은 관 뚜껑을 세 번 두드리는 것처럼.
오후 네 시 이십 분.
을지로 4가 뒷골목, 지하 1층. 간판은 작고 글씨는 낡았다. '이한결 유언장 대필 사무소'라고 새겨진 동판은 이미 두 군데 녹이 슬었지만 이한결은 교체할 생각이 없었다. 낡았다는 건 오래됐다는 뜻이고, 오래됐다는 건 여기서 꽤 많은 사람의 끝을 받아 적었다는 뜻이니까. 끝이 쌓이면 무게가 생긴다. 그 무게가 동판 녹 사이에 스며 있었다.
오늘의 마지막 의뢰인은 78세 여성이었다. 폐암 3기. 아들 둘, 딸 하나. 재산은 아파트 한 채와 적금 2,300만 원이 전부였지만 그녀가 가장 오래 고민한 건 냉장고에 붙어 있는 손자 사진을 어느 아들에게 넘길 것인가였다. 두 아들 모두 그 사진을 원하고 있다는 걸 알았고, 두 아들 모두 서로가 원한다는 걸 몰랐다. 어머니만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혼자 알고 있었다.
이한결은 그것도 받아 적었다.
전부 다.
그는 서랍에서 봉투를 꺼내 세션 파일을 밀어 넣었다. 공증 의뢰는 내일 오세린 변호사 쪽으로 넘기면 된다. 봉투 뒤에 날짜와 이름을 썼다. 손목을 돌려 시계를 확인하는 순간—
노크 소리가 났다.
딱.
딱.
두 번. 조용하지만 빈틈이 없는 소리였다. 허락을 구하는 노크가 아니었다. 이미 들어갈 것을 알고 치는 소리. 노크라기보다 선언에 가까웠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남자는 육십 대 초반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나이의 사람들이 흔히 풍기는 것—묵직함, 피로감, 삶이 조금씩 깎여나간 흔적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회색 캐시미어 코트는 주름 하나 없이 어깨에 걸쳐져 있었고, 구두 코가 형광등 빛을 단정하게 반사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서류도, 가방도, 핸드폰조차도.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이한결은 그걸 한 번에 알아봤다. 임종자를 수십 명 봐온 눈은 정교했다. 눈 아래 그늘이 없었고, 숨은 고르게 쉬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 남자의 시선은 방 안 모든 것을 단번에 꿰뚫었다. 파일 더미, 벽에 붙은 일정표, 이한결의 오른손. 그 순서로 빠르게, 그리고 무표정하게.
"예약 없이 오셨네요."
"없습니다."
목소리가 낮고 속도가 일정했다. 강물처럼—막히는 데가 없는 소리. 빠르지 않고 느리지 않았다. 정확히 들을 수 있는 속도였다.
"저는 임종을 앞두신 분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멀쩡합니다." 남자가 말했다. 잠시, 딱 한 박자. "지금은."
이한결의 손가락이 볼펜 위로 갔다. 딸깍. 딸깍. 딸깍.
지금은. 그 두 글자가 공기 중에 잠시 걸려 있었다. 단서처럼. 아니면 경고처럼.
"앉으시겠습니까."
남자가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등받이에 기대지 않았다. 허리가 곧게 펴졌다. 의자에 앉은 게 아니라 의자 위에 위치한 것 같은 자세였다.
"이름을 여쭤도 될까요."
"강선오입니다."
순간이 정지했다.
이한결의 볼펜이 멈췄다.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숨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머릿속은 달랐다. 강선오. 하성그룹 전략실장 출신. 창업주 옆에서 30년을 보낸 남자. 업계에서는 '왼손'이라고 불렸다—오른손은 사인하지만 왼손이 방향을 정한다는 뜻으로. 재계 사람들은 하성그룹의 모든 결정에 강선오가 있다고 했다. 두 달 전 전략실장직을 전격 사임했다는 기사가 났을 때, 재계 전체가 술렁였다.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공식 입장도 없었다. 그냥—사라졌다.
그 사람이 지금 이한결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기록해두시겠습니까."
강선오가 말했다.
이한결이 눈을 들었다.
"저는 제 유언을 남기고 싶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임종—"
"환자에게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법적 규정은 없습니다." 강선오는 끊지 않았다. 그냥 다음 문장을 이었다. 막힘 없이. 강물처럼. "이한결 씨 사무소 약관 어디에도 '임종자에 한함'이라는 조항은 없더군요."
딸깍. 딸깍. 딸깍.
볼펜이 세 번 울렸다.
"확인하셨습니까."
"당연히 확인했습니다." 강선오가 말했다. "제 유언을 받아 적을 사람을 찾는 데 3개월이 걸렸거든요."
3개월. 그 말이 공중에 잠시 떠 있었다. 이한결은 그 무게를 가늠했다. 하성그룹 전략실장 출신이 3개월을 들여 찾았다. 아무 변호사나 공증인이 아니라, 을지로 뒷골목 지하 1층 사무소를.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방문이 아니었다. 도착이었다.
이한결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파일을 꺼냈다. 표준 유언장 기초 서류. 펜을 들었다가—내려놨다.
"거절하겠습니다."
강선오가 처음으로 미세하게 눈을 좁혔다.
"이유를 여쭤도 됩니까."
"이유는 없습니다." 이한결이 말했다. "직업적 판단입니다."
"직업적 판단."
"네."
한 박자의 침묵.
"그렇군요." 강선오는 잠시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았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트 단추 하나를 잠갔다. 한 손으로, 천천히, 눈을 내려다보지 않고. "그럼 딱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이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선오가 이한결의 눈을 정확히 보았다. 이한결은 그 시선에서 분노도, 애원도, 협박의 열기도 읽지 못했다. 그냥 사실이 있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말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제 장남이 오늘 밤 사고를 당할 겁니다. 제가 막을 수 있지만, 막지 않을 겁니다." 짧은 정지. "그것도 제 유언의 일부입니다."
문이 닫혔다.
딱, 소리 하나.
노크처럼. 선언처럼.
이한결은 30초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녹차 향이 났다. 강선오가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았는데. 아니—코트에서 났다. 그 남자의 코트에서 녹차 향이 났다. 이한결은 그제야 그 사실을 의식했다. 녹차 향. 찻잔은 없었다. 코트만 있었다. 누군가가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같은 공간에서 같은 차를 마셨을 때 몸에 배는 종류의 냄새였다.
제가 막을 수 있지만, 막지 않을 겁니다.
그건 예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내려진 결정을 통보하는 문장이었다. 오늘 밤 일어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강선오가 그 일을 알고 있었고, 막을 힘이 있었고,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 결정을 이한결에게 알렸다.
왜.
이한결은 핸드폰을 들어 오세린에게 전화했다.
두 번 신호가 가자마자 통화가 연결됐다.
"캔커피 두 개 들고 올 수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오세린의 목소리가 즉각 날카로워졌다. "목소리에 뭔가 묻어 있는데."
"나중에요."
"그거 민법상 설명 의무 위반 아닌가요?"
"변호사와 의뢰인 관계도 아닌데요."
"그래요. 그게 문제예요." 전화 저편에서 자판기 동전 소리가 났다. 이한결은 그 소리가 익숙했다. 오세린이 1층 복도 자판기 앞에 있다는 뜻이었다. 아직 퇴근하지 않은 거였다. "10분 후."
통화가 끊겼다.
이한결은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창밖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세린은 캔커피를 두 개 들고 왔다. 하나는 자기 손에, 하나는 이한결의 책상 위에 던졌다. 이한결은 잡지 않았다. 캔이 굴러서 파일 더미에 부딪혀 멈췄다.
"던지면 탄산 빠진다고."
"저는 탄산커피 안 마시거든요. 이건 무가당 블랙."
"저도 블랙인지 어떻게 알고."
"10년째 거래하는데 모르면 이상하잖아요." 오세린은 의자를 거칠게 당겨 앉았다. 서른다섯. 전직 공증 변호사. 지금은 프리랜서 법무 컨설턴트 겸 이한결의 공증 협력자. 단발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면서 책상 위 파일을 훑었다. "근데 왜 이렇게 분위기가 장례식이에요. 이미 이 사무실이 원래 그렇긴 하지만."
이한결은 대답 대신 말했다.
"강선오가 왔다 갔어요."
오세린의 손이 멈췄다.
그 멈춤은 짧았지만 완전했다. 눈도, 입술도, 숨도.
"하성그룹 강선오요?"
"네."
"살아 있는?"
"살아 있는."
오세린이 캔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천천히. 뭔가를 계산하는 눈빛으로. 변호사가 말하기 전에 먼저 계산하는 표정이었다.
"유언 부탁하러요?"
"네. 거절했어요."
"당연히 거절했겠죠."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의문이 뒤따랐다. "근데 왜 저한테 전화한 거예요?"
이한결은 서랍을 열어 메모지를 꺼냈다. 강선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남긴 말을 그대로 적어서 오세린 앞에 밀었다.
제 장남이 오늘 밤 사고를 당할 겁니다. 제가 막을 수 있지만, 막지 않을 겁니다.
오세린이 읽었다. 두 번 읽었다.
캔커피를 내려놓는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이거 협박이에요, 아니면 예고예요?"
"모르겠어요."
"강선오 장남이 나준혁이죠? 하성그룹 관련 회사 세 군데 등기이사로 올라가 있는."
"맞아요."
"오늘 밤." 오세린이 시계를 봤다. "지금 여섯 시 사십 분이에요."
이한결은 볼펜을 들었다. 딸깍. 딸깍. 딸깍.
"법적으로 어떻게 해석돼요, 저 말이."
"예고된 위해를 알면서 신고하지 않으면 불고지죄 성립 가능." 오세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변호사가 법을 설명할 때의 얼굴이 아니었다. 답이 없는 것을 인정하는 얼굴이었다. "근데 실제 사고가 일어나야 입건이 되는 거라서요. 지금 경찰에 가봤자 '헛소리 마세요' 소리 들어요."
"그럼요."
"그러니까." 오세린이 이한결을 봤다. "뭘 하려는 거예요?"
이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캔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쓴맛.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을지로 뒷골목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는 것이 창문 아래로 보였다.
"강선오가 유언장을 쓰려는 데는 이유가 있겠죠."
"그야 당연히."
"임종자가 아닌데도. 멀쩡히 살아서."
"네."
"그 이유가 뭔지, 저는 모르고." 이한결이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나한테 모르는 채로 알게 만들려고 했어요."
오세린이 잠시 멈췄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거 민법상 동기의 착오라고요. 이유 모르는 채로 계약하는 거."
"저는 아직 계약 안 했어요."
"아직."
두 글자가 공기 중에 떴다. 오세린이 그 두 글자를 다시 한번 보는 것 같았다. 이한결도 봤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한결은 볼펜을 책상에 내려놨다. 딸깍, 한 번.
"지켜보죠."
밤 열한 시 삼 분.
이한결의 핸드폰이 울렸다.
뉴스 알림이 아니었다. 오세린이 보낸 링크였다. 제목 다섯 글자만 쳐놓고 링크를 붙였다.
났다. 봐요.
[속보] 하성 계열사 전무 나준혁 씨, 강남구 모처에서 교통사고 — 차량 전파, 본인은 경상.
이한결은 기사를 세 번 읽었다.
경상. 죽지 않았다.
강선오가 사고를 예고했고, 사고는 정확히 일어났으며, 그래도 아들은 살아 있었다. 막을 수 있지만 막지 않겠다고 했다. 그 말의 의미가 지금 비로소 선명해졌다. 막지는 않되, 죽게도 두지 않은 것이다. 사고의 규모까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설계했다는 뜻이었다.
이한결은 창문을 올려다봤다. 을지로 뒷골목. 늦은 밤의 골목은 조용했다. 어딘가에서 편의점 냉장고 모터 소리가 웅웅 울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소리가 이상하게 고요하게 들렸다.
강선오는 아들이 사고를 당하는 걸 알면서 막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이한결에게 미리 알렸다. 왜 알렸는가. 이한결이 그것을 알게 하려고. 이한결이 알고 나서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아니면—이한결이 알고 나서 전화를 하게 만들려고.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이한결을 앉히기 위한 설계였다.
그는 서랍을 열었다. 강선오가 놓고 간 게 없는지 다시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서랍 안쪽, 뒤쪽 구석에서 뭔가가 손끝에 닿았다. 작고 딱딱한 것. 꺼내서 봤다.
명함이었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 '강선오'라는 이름 아래 전화번호 하나만 적혀 있었다. 직함도, 회사명도, 이메일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과 번호만. 마치 유언 끝에 서명만 남기는 것처럼.
언제 넣었는지 몰랐다. 자리에 앉으면서? 일어나면서? 코트 소매로, 아무도 모르게. 이한결은 그 서랍을 오늘 세션 전에 열었다. 강선오가 오기 전에. 그때는 없었다.
확실히 없었다.
이한결은 명함을 들고 30초를 기다렸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 갔다.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네." 강선오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놀라지 않았다. 늦은 밤에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이 통화를 알고 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기록해두시겠습니까."
이한결의 손가락이 볼펜으로 갔다.
딸깍. 딸깍. 딸깍.
"내일 오전 아홉 시. 와주십시오."
전화를 끊었다.
이한결은 파일을 펼쳤다. 새 용지를 꺼냈다. 맨 위에 날짜를 적고, 그 아래 세 글자를 적었다.
강선오.
볼펜을 내려놨다. 딸깍, 한 번만.
마침표.
아직 시작도 안 한 유언장의 첫 마침표였다.
다음 날 오전 아홉 시 정각.
문이 열렸다.
강선오가 들어왔다. 오늘도 회색 코트였다. 오늘도 녹차 향이 났다. 오늘도 허리가 곧았다. 마치 어제와 오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들이 사고를 당한 밤을 그냥 통과한 것처럼. 그 고요함이 오히려 이상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이한결을 보았다.
이한결이 볼펜을 들었다.
"시작하시죠."
강선오가 입을 열었다.
"기록해두시겠습니까." 짧은 정지. 숨 한 번의 길이만큼. "저는 30년 전에 한 사람의 인생을 지웠습니다."
이한결의 손이 멈췄다.
볼펜이 용지 위에 닿은 채로. 첫 획을 긋지 못한 채로.
"그 사람의 아들이—" 강선오가 이한결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어제와 같은 눈빛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말하는 사람의 눈빛. 분노도, 죄책감도, 아무것도 없는. 그냥 사실만 있는. "지금 제 앞에 앉아 있습니다."
볼펜이 책상 위로 굴러 떨어졌다.
딸깍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