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계약서 속의 이름
황실 사료원의 오전은 언제나 잉크 냄새로 시작됐다.
양피지를 건조하는 특수 약품과, 갓 갈아 만든 검은 잉크가 섞이는 그 냄새. 세리나 오를란은 매일 아침 문을 열 때마다 그 냄새를 폐 깊숙이 들이켜고서야 비로소 '오늘도 여기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낡은 나무 책상, 높이 쌓인 편찬 원고, 창문 너머로 끊임없이 흘러드는 먼지 섞인 햇빛. 이것들이 세리나의 세계였다. 넓지는 않지만 안전한 세계.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펜 뚜껑을 쉼 없이 여닫고 있었다. 딸깍. 딸깍. 딸깍. 마치 시계 초침처럼, 규칙적으로. 책상 위에는 어젯밤 도착한 봉투가 펼쳐져 있었다. 볼테르 가의 문장—월계수 가지 아래 잠든 눈을 감은 독수리—이 짙은 홍청 밀랍 위에 선명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서신은 단 세 줄.
내일 오전. 사료원으로 방문하겠습니다. 거절은 받지 않습니다. —C.V.
세리나는 그 짧은 세 줄을 열두 번쯤 읽었다. 거절은 받지 않는다. 이 문장의 뻔뻔함이라니. 펜 뚜껑을 한 번 더 여닫으며 그녀는 자신의 공식 기록지를 펼쳤다. 손이 저절로 익숙한 방향을 향했다.
후회 편찬관 오를란의 사적 기록, 제217일차. 오늘 방문이 예고된 인물: 카시우스 볼테르, 볼테르 가 후계자. 역사상 단 한 번도 후회 재연이 발동하지 않은 가문. 어젯밤 재연 배경 속에서 목격한 볼테르 가의 문장이 이 인물과 어떤 연결고리를 갖는지는 아직 불명확. 이 장면은 훗날 어떻게 편찬될까—
"세리나! 세리나, 왔어?"
문이 쾅 열리며 마리셀 드 퀴나가 뛰어 들어왔다. 오늘따라 황실 사료원 수석 완장을 팔뚝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양손에 서류 다발을 들고.
"세상의 절반은 소문이고 나머지 절반도 소문이라고 했잖아." 마리셀이 숨을 몰아쉬며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소문도 아닌 진짜를 목격했어. 볼테르 가의 마차가 사료원 정문 앞에 서 있어. 그것도 문장 깃발 달고."
딸깍.
펜 뚜껑이 멈췄다.
"어느 쪽 마차야?" 세리나가 물었다.
"정문 한가운데. 마부도 없이. 마차 자체만." 마리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젯밤 그 봉투 때문이지? 나한테 말 안 해도 알아. 볼테르 문장 밀랍을 내가 얼마나 많이 편찬했겠어. 세리나, 솔직히 말해. 몇 시에 오기로 했어?"
"오전."
"지금이 오전 열 시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무겁지 않았다. 그런데도 공기가 달라졌다. 마치 창문을 닫은 방에서 갑자기 한쪽 창이 열릴 때처럼—바람 방향이 완전히 뒤집히는 그런 변화.
마리셀이 퉁 튀어오르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리나는 천천히 기록지를 덮고, 펜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문이 열렸다.
카시우스 볼테르는 소문보다 젊었다. 볼테르 가의 초상화들은 하나같이 근엄한 중년을 그려 넣었는데, 그 앞에 서 있는 인물은 이십대 중반쯤의 청년이었다. 코트 깃이 턱선을 스쳐 올라가 있었고, 짙은 은회색 눈동자가 방 안을 훑다가—정확히, 조금의 방황도 없이—세리나에게 멎었다.
"오를란 편찬관."
그게 첫 마디였다. 인사도 없이. 이름만.
세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의도적 선택이었다. 편찬관은 귀족의 후회를 기록하는 직책이다. 즉, 귀족 앞에서 일어서는 것이 예법이나—이곳은 황실 사료원이고, 이곳에서는 편찬관이 먼저다.
"볼테르 후계자님." 세리나가 답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오셨군요."
"약속이라고 했던가."
"서신에서 오전을 명시하셨습니다. 오전 열 시도 오전입니다."
카시우스의 시선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주 잠깐, 눈꼬리가 미세하게 당겨졌다가 돌아왔다. 그것이 당황이었는지 다른 무언가였는지, 세리나는 기록할 수가 없었다. 너무 빨리 사라져버려서.
"나가있어."
마리셀을 향한 말이었다. 두 글자. 명령이 아닌 체 했지만 명령이었다.
마리셀이 세리나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술을 '도와줄까?'하고 움직였다. 세리나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마리셀은 서류 다발을 두 팔에 끌어안고 문을 나서며 카시우스와 정확히 눈을 맞췄다.
"수석 드 퀴나입니다. 편찬관님이 부르시면 즉시 옵니다."
이것이 마리셀식 선전포고였다. 조용하고 부드럽지만, 눈을 감고 들으면 날이 선 것이 느껴지는.
문이 닫혔다.
정적이 책상 위의 잉크 냄새처럼 퍼졌다.
카시우스는 방 안으로 들어와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겼다. 세리나에게 앉아도 되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앉았다. 그러고는 코트 안쪽에서 서류철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탁.
단호하고 깔끔한 소리였다.
"계약서입니다."
세리나가 서류철을 내려다봤다. 볼테르 가의 문장이 인쇄된 표지. 황실 사료원 직인을 받을 수 있는 형식으로 작성된 공식 문서. 그것만으로도 이미 상당히 오래전부터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젯밤 서신을 받았을 때 이미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말씀드렸습니다." 세리나가 서류철에 손을 올렸다. 열지는 않았다. "볼테르 가의 자료는 본 사료원에서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재연 기록 역시—"
"목격했죠."
낮고 명확했다.
"몽클레르 공작의 임종 재연에서. 볼테르 가의 문장."
세리나의 손가락이 서류철 위에서 멈췄다. 가슴 어딘가에서 아주 조용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확 치밀었다가 가라앉았다. 그녀는 표정을 움직이지 않았다.
"재연 기록은 기밀입니다. 당사자 가문과 황실 편찬원만이 내용에 접근할 수 있으며—"
"몽클레르 가는 볼테르 가와 삼 대 전부터 비밀 채권 계약을 맺고 있었습니다." 카시우스가 끊었다. 여전히 낮고 명확하게. "재연 배경에 우리 문장이 나오는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알고 싶은 건 당신이 그것을 '공식 기록에서 지웠다'는 사실이요."
세리나가 그를 바라봤다.
그도 그녀를 바라봤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기록이 지워졌다는 걸 제가 알고 있다면?"
질문에 반문으로 답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읽은 소설의 특성이었다. 그러나 직접 마주하니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소설 속 카시우스는 멀었다. 이 인물은 가까웠다. 책상 너비만큼.
"열어 보시죠."
카시우스가 턱으로 서류철을 가리켰다.
세리나는 서류철을 열었다. 첫 페이지—계약 목적: 볼테르 가 구술 역사 기록 및 편찬. 조건: 기간 육 개월, 주 삼 회 저택 방문, 기밀 유지. 위반 시 황실 편찬원 자격 박탈 및—
두 번째 페이지로 넘어갔다.
계약 당사자 란.
갑: 볼테르 가 후계자 카시우스 볼테르 을: 황실 편찬관—
세리나의 시선이 그 아래에서 굳었다.
세리나 오를란. 前 호명: 이서린.
심장이 한 박자 멎었다.
이서린.
그건 전생의 이름이었다.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 이 제국의 어떤 기록에도, 어떤 문서에도 등록된 적 없는 이름. 세리나 오를란의 몸에 들어오기 전, 책 한 권을 끝까지 읽고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던 그 사람의 이름.
손가락이 떨릴 것 같았다. 세리나는 서류철을 덮고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재미있는 장치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이 이름이 어디서 나왔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계약하시면 알려드립니다."
"계약하기 전에 알아야 계약 여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역순입니다."
"협박으로 체결된 계약은 황실 사료원 내규 제십사조에 의거, 무효입니다."
순간, 침묵.
카시우스의 은회색 눈동자가 세리나를 다시 훑었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아까의 훑음이 '확인'이었다면, 이번 것은—세리나는 적당한 편찬 언어를 찾지 못했다. 평가? 아니다. 계산? 그것도 아니었다.
"협박이 아닙니다."
카시우스가 말했다. 느리게.
"이건 거래입니다. 내가 아는 것을 당신이 원한다. 당신이 아는 것을 내가 원한다. 이름은—" 그가 잠깐 멎었다. 눈꼬리가 다시 당겨졌다. "증명입니다."
"무엇의 증명입니까."
"당신이 단순한 편찬관이 아니라는 것의."
세리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도 그녀를 바라봤다. 사료원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책상 위 계약서를 비스듬히 찔러 들어왔고, '이서린'이라는 두 글자 위에서 먼지 섞인 빛이 천천히 흔들렸다.
이 남자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빙의를 아는가? 아니면 이 이름을 다른 방식으로 얻었는가?
볼테르 가의 침묵이 진짜 후회가 없는 것인지, 후회가 '보이지 않게' 처리된 것인지—어젯밤 세리나가 홀로 세웠던 추리. 그 균열의 실마리가 바로 이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인물은 세리나가 가진 가장 비밀스러운 카드를 이미 손에 쥐고 있었다.
물러나거나, 뛰어들거나.
세리나는 서류철을 다시 열었다. 천천히, 마지막 장까지 넘겼다. 황실 사료원 직인란 옆에 비어 있는 서명 칸. 그녀는 펜을 집었다.
"조건을 추가하겠습니다."
카시우스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세리나는 계약서 여백에 깔끔하게 적어 나갔다.
"첫째, 볼테르 가 방문 시 편찬관의 독립적 기록 권한이 보장될 것. 볼테르 가 측의 사전 검열 불가. 둘째, 편찬 기간 중 취득한 정보의 원본 보관 권한은 편찬관에게 있으며 사본만 볼테르 가에 귀속될 것. 셋째—"
그녀가 펜을 멈추고 카시우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계약서 속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첫 방문 이전에 설명할 것."
정적.
카시우스가 세리나가 적어 넣은 조건들을 내려다봤다. 표정 없이. 그러다 손을 뻗어 계약서를 돌려 자기 앞으로 당겼다. 세리나의 추가 조항들을 한 줄씩 읽었다. 첫째, 둘째, 셋째.
"셋째 조항은."
"계약의 전제 조건입니다. 전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계약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설명하면 계약합니까."
"설명에 따라 결정합니다."
또 반문이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카시우스는 이번에 반문하지 않았다.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이 이 제국에 나 말고 하나 더 있습니다."
낮고, 무거웠다.
"그 사람이 당신보다 먼저 이 이름을 이용하기 전에, 내가 먼저 당신에게 왔습니다."
세리나의 손가락이 펜 위에서 멎었다.
"누구입니까."
"계약하시면."
이번에는 거기서 끝났다. 반문이 아니라 마침표였다. 그리고 그것이 더 무서웠다. 반문은 상대에게 선택권을 주는 척하는 것이지만, 마침표는 그냥—닫힌 문이었다.
세리나는 펜을 들었다. 서명란 위에 촉을 올렸다.
딸깍.
이번엔 펜 뚜껑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명란에 닿는 펜 촉 소리였다. 세리나 오를란이라는 이름 석 자가 잉크를 먹으며 천천히 종이 위에 새겨졌다.
카시우스가 자신의 서명을 그 아래 덧붙였다. 말없이. 빠르게.
계약이 체결됐다.
두 사람은 잠시 완성된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이서린과 오를란이 나란히 쓰인 계약서를. 세리나는 입을 열었다.
"이 장면은 훗날 어떻게 편찬될까요."
"편찬관의 질문치고 이상합니다."
"왜요."
"결말을 아직 모르면서 편찬을 걱정합니까."
세리나가 카시우스를 바라봤다.
카시우스도 세리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세리나는 전생의 소설에서 이 인물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차갑고, 합리적이고, 감정이 봉인된 후계자.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은회색 눈동자 가장 안쪽에서 아주 잠깐—딱 한 박자, 깜빡이는 것처럼—뭔가 다른 것이 흔들렸다.
두려움은 아니었다.
초조함도 아니었다.
세리나는 그것을 편찬 언어로 옮기지 못했다.
카시우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약서를 반으로 접어 자기 안주머니에 넣었다.
"첫 방문은 사흘 후입니다." 그가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볼테르 저택. 오전 열 시."
"이름에 대한 설명은요."
그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멈췄다. 등이 보였다. 코트의 짙은 천 위에 볼테르 가의 자수가 박혀 있었다. 잠든 독수리. 눈을 감은.
"볼테르 가에 온 편찬관은 세 명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돌아오지 못했고, 두 번째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문이 열렸다.
"당신은 세 번째입니다."
문이 닫혔다.
세리나는 책상 위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잉크 냄새. 먼지 섞인 햇빛. 방금 전까지 카시우스가 앉아 있던 맞은편 의자.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오지 못했다.
세 번째.
그녀의 손이 천천히 기록지를 폈다. 펜을 집었다. 그러나 첫 줄을 쓰기 전에 손이 멈췄다. 뭐라고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볼테르 가의 후계자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이미 아는 말이다. '이서린이라는 이름이 이 세계에 알려져 있다'? 그것도 이미 확인됐다.
문제는—
세리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문제는 카시우스 볼테르가 나가기 직전에 보여준 그 한 박자였다. 흔들리던 것. 두려움도 초조함도 아닌 그것. 전생의 소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감정의 파편.
그것이 세리나 오를란의 기록지 어디에도 쓰이지 못한 채, 가슴 어딘가에서 아직 식지 않고 있었다.
문이 다시 열렸다. 마리셀이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갔어?"
"네."
"계약했어?"
"…네."
마리셀이 눈을 크게 뜨더니,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와 세리나의 책상을 양손으로 짚고 정면으로 바라봤다.
"세리나. 볼테르 저택에 간 편찬관이 몇 명인지 알아?"
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들었습니다. 두 명."
"세 명이야." 마리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낙천성을 잃었다. "세 명인데 기록이 두 건밖에 없어. 첫 번째 편찬관은 기록이 아예 없고, 두 번째는 '건강 사유 자진 사퇴'. 세 번째가—"
그녀가 멈췄다.
"세 번째가 너야."
세리나는 마리셀을 바라봤다. 그리고 느꼈다. 온기가 가득한 이 방에서, 잉크 냄새 가득한 이 공간에서, 지금 이 순간이 무언가의 분기점이라는 것을. 여기서 돌아서면 편찬관 세리나 오를란의 안전한 세계는 유지된다. 그러나 그 세계에는 '이서린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도, '볼테르 가의 침묵이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는 진실도, 사라진 두 편찬관의 이야기도—전부 기록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조연으로 사라지지 않겠다는 욕망.
그리고 타인의 감정은 전부 기록하면서 자신의 것은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는 결핍.
"마리셀."
"응."
"사라진 첫 번째 편찬관." 세리나가 펜을 다시 들었다. 이번엔 손이 떨리지 않았다. "이름이 뭔지 알아요?"
마리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알아. 근데 세리나—"
"말해줘요."
긴 침묵.
마리셀이 결국 입을 열었다.
"에드반 볼테르가 황실 사료원에 처음 발령 낸 편찬관이야. 본인이 직접 요청했어." 마리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 편찬관 이름이—"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오를란이야. 세리나, 너랑 성이 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