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문법의 끝에서, 우리는 같은 말을 했다
처음엔 커피 때문이었다.
윤재가 머그잔을 꺼내며 말했다. "너 오늘 약속 있어?" 별 뜻 없이 던진 말이었다. 진짜로. 냉장고 속 우유가 반 팩밖에 안 남았고, 두 사람 분의 커피를 내리기엔 애매한 양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세상에서 가장 사소한 질문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균열을 건드리기 전까지는.
서진이 소파에서 노트북을 닫으며 올려다봤다. "갑자기?"
"우유가 별로 없어서."
"그거 물어보는 거야, 아니면 나한테 나가 있으라는 거야."
윤재가 멈췄다. 머그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조용한 아침에 유난히 선명하게 울렸다. 도자기가 대리석 위에 닿는 그 짧고 단단한 소리.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침묵이 이상하게 길었다.
"나가 있으라는 게 왜 나와."
"아니, 요즘 네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서진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일부러 감정을 빼낸 평평함이었다. 비어있는 게 아니라 꽉 눌러 담은 것. "아버지 문자 받은 날부터."
그 말이 공중에 뜨는 데 0.5초가 걸렸다. 그 이후의 침묵이 방 전체를 꽉 채우는 데는 그보다 훨씬 짧은 시간밖에 안 걸렸다.
윤재는 돌아보지 않았다. 싱크대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소리로 잠깐 시간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살 수 없었다. 서진이 소파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물소리를 뚫고 들어왔다. 맨발이 마루 위를 밟는 소리. 5년 동안 들어온 그 소리.
"알고 있었어?"
물을 껐다.
"언제부터."
"처음 봤을 때."
"그럼 왜—"
"네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윤재가 돌아섰다.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 그 고요함이 오히려 더 단단하게 공간을 눌렀다. 화가 났을 때보다 훨씬 더 무겁게. "네가 먼저 꺼내야 할 말이었잖아."
서진의 턱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입버릇처럼 "그러니까 내 말은—"을 달고 살았고, 침묵을 견디지 못해 말로 메우는 사람이었다. 설계 도면 위에서도, 낯선 사람과의 자리에서도, 새벽 두 시의 침대 위에서도. 그런 사람이 지금 이 순간 한 마디도 못 하고 있었다.
그게 윤재에게는 확인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물을 필요가 없는 종류의 확인.
"아버지가 뭐라고 했어?"
"직접 봤잖아."
"네 입으로 듣고 싶어."
서진이 손을 들어 목 뒤를 짚었다. 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걸 윤재는 놓치지 않았다. 놓치고 싶었는데 놓치지 못했다. 오래 본 사람의 저주였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들.
"도쿄 건 아직 결정 안 했어."
"서진아."
"진짜야. 나—"
"서진아." 두 번째로 이름을 부르자 서진의 말이 잘렸다. "나한테 설득하려고 하지 마."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서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설득당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더 오래된 것이 올라왔다. 상처가 아니라 분노에 가까운, 그러나 분노라고 부르기엔 너무 고요한 무언가. 오래된 상처가 오래된 방식으로 표면을 밀어올리는 것.
"나 지금 설득하려는 게 아니야."
"그렇게 들렸어."
"내가 말하기도 전에 결론부터 내리지 마." 서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날이 섰다. "그거 네 습관이야. 알아?"
"나는 결론 낸 게 아니야. 나는 지금—" 윤재가 잠깐 멈췄다. 아랫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 버릇이 나오면 감정이 임계점에 왔다는 신호였는데, 서진은 그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 가르쳐준 것들 중 하나. "나는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고 있어."
"그래. 해봐. 솔직하게." 서진이 두 팔을 내렸다. 열어놓은 자세였다. 그리고 그게 윤재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저 사람은 지금도 대화로 풀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믿고 싶었다. 아마 죽는 날까지도 믿을 것이었다. "5년 동안 하고 싶었던 말 다 해봐."
침묵.
그 침묵이 방아쇠였다.
"...너는 항상 그래." 윤재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낮게,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대화로 해결될 거라고 믿어. 말을 하면 다 정리된다고. 그런데 서진아—말로 안 되는 게 있어. 그냥 구조가 다른 거. 언어가 다른 거."
"구조가 다르다는 게 무슨 뜻이야."
"네 아버지가 내 번호로 문자를 보냈어." 드디어. 이 말이 드디어 나왔다. "나한테. 아들 결정하기 어려워하니까 주변에서 잘 얘기해달라고. 서진아, 그거 알아? 나는 그 문자 받은 순간에 네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 알았어. 나는 네 '주변'이야. 잘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 네 인생의 의사결정에 들어올 수 없는."
서진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됐다.
"그건 아버지가 잘못—"
"알아. 아버지가 잘못한 거.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윤재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이제 흔들리지 않았다. 오래 눌러온 것이 마침내 자기 형태를 찾은 소리였다. "중요한 건, 네가 그 문자를 나한테 먼저 말했어야 한다는 거야. 네 아버지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걸. 그런데 너는 말 안 했어. 열하루 동안."
"...말하려고 했어."
"언제."
대답이 없었다.
"타이밍을 못 찾은 거야, 아니면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계산한 거야."
이번에도 서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 자체가 대답이었다.
윤재가 웃었다. 웃음이 아니었다. 그냥 입꼬리가 아주 잠깐 올라갔다가 내려간 것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서진의 가슴을 더 세게 찔렀다. 화가 나거나 실망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냥—이미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훨씬 더 나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서진이 시작했다.
"서진아, 잠깐." 윤재가 손을 들었다. 가볍게. 막는 것도 아니고 공격하는 것도 아닌 그냥 하나의 제스처였는데, 서진이 멈췄다. "나 지금 네가 설명하는 거 듣고 싶지 않아. 진짜로. 나는 지금 네 논리를 원하는 게 아니야."
"그럼 뭘 원해."
"..."
"뭘 원하는지 말해줘야 내가 할 수 있잖아."
"그게—" 윤재가 숨을 들이켰다. "그게 바로 내가 말하는 거야."
서진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처음으로 방어가 무너지는 표면이 보였다. "무슨 말이야. 제대로 말해줘."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내가 말해줘야 하는 관계면, 우리가 5년을 같이 산 게 무슨 의미야." 윤재의 목소리가 이번엔 조금 더 높아졌다. 공격이 아니었다. 그냥 진짜 묻는 거였다. "나는 밥 지었어. 네가 야근할 때 새벽 두 시에 따뜻한 거 먹을 수 있게. 나는 네 설계 마감 전날 아무것도 안 하고 옆에 있었어. 말 한 마디 안 하고. 그게 다 나였잖아."
서진이 입을 열었다. 닫지 못하고 열어놓은 채로 있었다.
"근데 서진아, 너는 그게 보였어?"
"보였어." 목소리가 흔들렸다. "당연히."
"그럼 뭐라고 느꼈어."
"...고마웠어."
"충분했어." 서진이 말을 이었다. 작고 단단하게. "너는 충분했어, 윤재야. 항상."
그 한 마디가 공기를 바꿨다. 윤재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날아온 말이었다. 반박이 아니었다. 인정이었다. 그런데 인정이 이렇게 사람을 더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윤재는 몰랐다.
"고마웠어." 윤재가 그 말을 그대로 받아서 공중에 올려놓았다. 다시. "나는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었던 게 아니야. 나는 그냥—" 처음으로 말이 막혔다. 아랫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다시 나왔다. 이번엔 그것도 모자라서 손이 혼자 주먹을 쥐었다. 허벅지 옆에서. 서진 모르게. 아니, 서진은 봤다. 다 봤다. 오래 본 사람들은 서로의 그런 것을 다 안다. "나는 그게 너한테 당연한 것이 되기를 원했어. 말 안 해도 되는. 고맙다는 말 필요 없는."
"그건 불가능해. 사람이 마음을 표현 안 하면—"
"나는 표현했어. 말로 안 했을 뿐이지." 윤재가 처음으로 서진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근데 너는 말을 원했어. 항상. 확인을 원했어. 나는 그게 틀렸다는 게 아니야. 근데 나는 그 방식으로밖에 사랑을 못 해. 그리고 너는 그 방식으로는 충분히 못 받아. 그게 다야."
"충분했다고 했잖아." 서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방금."
"충분했다고 느끼는 것하고," 윤재가 조용히 받아쳤다. "충분하다고 믿는 건 달라."
서진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래, 아주 오래 윤재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서 뭔가가 조용히 접히는 게 보였다. 말로 만들어지기 전의 것들. 이름 붙이지 못한 채 5년을 버텨온 것들.
그리고 물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해."
그 질문이 방 안에 떨어지고 나서, 두 사람 모두 그것이 어떤 질문인지 알았다.
정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정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던지는, 그러니까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 질문. 네가 뭐라고 대답하든 간에—이 방에서 내가 나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줄 수 있어?
윤재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두 번.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몰라서가 아니었다.
정답이 없어서였다.
서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답을 기다리면서도 고개를 돌렸다. 창가 쪽으로. 바깥이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윤재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자기가 먼저 무너질 것 같아서. 창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구름과 지붕과 가끔 지나가는 사람. 그 평범함이 지금은 이상하게 잔인했다.
"...나 음악 하고 싶었어." 서진이 갑자기 말했다.
윤재가 멈췄다.
"알아?" 서진이 여전히 창가를 보며 말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낮아지면서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건축 대학 입학 원서 쓰던 날, 새벽까지 기타 쳤어. 마지막으로. 그리고 아침에 서명했어. 한 번도 후회한다고 말한 적 없는데—"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가장 슬플 때 가장 환하게 웃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웃지 않았다. 웃음이 나오지 않는 사람을 보는 게 웃음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너 앞에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어. 항상."
윤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이 마지막인 것 같아서." 서진이 계속했다.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이게 끝이면—너한테만은 말하고 싶었어. 나도 결국 못 했지만. 말 못 한 거 너무 많아서, 뭘 먼저 꺼내야 할지도 몰랐어."
윤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진이 돌아봤다. 눈이 빨개져 있었다.
"나도 몰랐어. 선택받고 싶다는 게 뭔지. 너 만나기 전에는." 서진이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이 방 안에서 가장 아픈 소리였다. 울음보다 훨씬 더. "근데 이제 알아버렸으니까—이제 모르는 척을 못 해."
윤재의 가슴이 조여들었다. 사랑이 아직 살아있는 증거였다. 이미 끝나가고 있는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조이는 게, 이미 끝났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한 걸음 다가갔다. 어쩔 수 없이.
그리고 서진의 셔츠 앞섶을 가볍게 쥐었다. 잡아당긴 게 아니었다. 그냥 쥔 것이었다. 손가락 끝에 천의 온도가 느껴졌다. 그 안에 사람의 온도가 있었다. 그 손의 무게가 서진의 심장으로 직선으로 전달됐다.
"서진아."
"응."
"나 너 사랑해."
서진이 눈을 감았다. 천천히. 눈꺼풀이 내려오는 동안 눈가에 맺혀 있던 것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알아."
"근데—"
"알아." 서진이 윤재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 셔츠를 쥔 그 손 위에. 덮는 것처럼. 잡는 것처럼. "나도 그래."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마가 거의 닿을 거리였다. 서진의 호흡이 윤재의 이마 쪽으로 넘어왔다. 따뜻했다. 5년 동안 알아온 그 온도 그대로였다. 계절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은 것.
윤재가 서진의 셔츠에 이마를 댔다.
쿵.
서진의 심장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자기 것만큼. 아니, 어쩌면 조금 더. 서진은 항상 윤재보다 감정이 먼저 몸에 나왔다. 그게 말이 되기 전에 심장이 먼저 떨었다.
서진의 손이 윤재의 뒤통수로 갔다. 끌어당기지 않았다. 그냥 올려놓은 것이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이 천천히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그 상태로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이 두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 두 사람 모두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 포옹이 끝나고 나면.
이 온도가 식고 나면.
무언가가 달라질 것이었다.
서진이 먼저 입술을 움직였다. 아주 낮게. 윤재의 머리카락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끝이야?"
윤재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 단어를 먼저 입에 올리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 게 아니었다.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이 온도가 기억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아직 현재인 동안에는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직 이 사람의 심장 소리가 귀에 직접 닿는 동안에는.
서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묻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진이 윤재의 어깨를 잡고 조금 떼어놓았다. 눈을 마주쳤다. 이 가까운 거리에서 이 눈을 보는 게, 지금 가장 용감한 일이었다. 서진은 늘 그런 사람이었다. 도망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눈을 피하지 않는.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응."
"내가 도쿄 안 가면."
윤재가 숨을 참았다.
"그래도 우리 안 되는 거야?"
그 질문이 공기를 통째로 바꿔버렸다. 사이다처럼 터지는 게 아니었다. 무언가가 조용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깨지는 소리였다. 서진이 처음으로—처음으로 도쿄를 버리겠다는 말을 한 거였다. 5년 동안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카드를, 지금 이 자리에서.
윤재의 눈이 떨렸다.
이 사람이 이 말을 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자기가 왜 기쁘지 않은지.
기뻐야 하는 거 아닌가. 원하던 말이잖아.
아니었다. 그게 아니었다. 원한 건 이 말이 아니었다. 원한 건—묻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이 질문이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 질문 지금 하면 안 돼."
서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왜."
"그 질문은—" 윤재가 서진의 손을 내려다봤다. 아직 자기 손을 잡고 있는 그 손을. "네가 도쿄를 포기하고도 우리가 안 된다는 걸 내가 말하면, 너 그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할 거잖아."
"아니야."
"아니야, 라고 지금 말할 수 있어도—" 윤재가 천천히 서진의 손을 내렸다. 놓는 게 아니라 내리는 거였다. 그 차이가 컸다. "나중에 그게 나한테 올 거야. 반드시. 그 무게가 내 것이 되는 게 싫어. 서진아."
서진이 굳었다.
"그게—그게 무섭다는 거야?"
"응." 윤재가 처음으로 선명하게, 주저 없이 답했다. "무서워."
그 솔직함이 서진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5년 동안 괜찮다고만 하던 사람이, 오늘 처음으로 무섭다고 했다. 그것도 도망치는 방향이 아니라 정면에서. 눈을 내리깔지도 않고,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서진이 윤재의 목깃을 잡았다. 잡아당겼다. 윤재가 저항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다.
거칠지 않았다. 다그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확인이었다. 아직 여기 있다는. 아직 이 온도 안에 있다는. 서진의 입술이 윤재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눌렀다. 깨물 듯, 그러나 깨물지 않는. 그 경계에서 오래 머물렀다. 윤재가 눈을 감았다. 서진의 손이 셔츠 목깃에서 빠져나와 윤재의 뺨 쪽으로 올라왔다. 엄지 끝이 광대 아래 뼈를 따라 천천히 쓸었다. 그 자리가 젖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랐다. 짠맛이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스몄다. 윤재의 것인지 서진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알 필요가 없었다.
서진의 이마가 윤재의 것에 닿았다.
"나는," 서진이 말했다. 입술이 아직 거의 닿아 있는 거리에서. "아직 포기 못 해."
윤재가 눈을 감았다.
"알아."
"그래도 괜찮아?"
윤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늘 가장 긴 문장이었다.
저녁 무렵, 윤재의 핸드폰이 울렸다.
박지호였다.
『야, 서진 도쿄 건. 나 오늘 민율 씨한테 들었는데.』
윤재가 화면을 바라봤다. 길게. 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서 멈췄다.
『차민율이 서진한테 "이번 기회 안 가면 다음은 없다"고 했대. 아버지 쪽 압력이 그냥 부탁이 아니야, 윤재야.』
윤재가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눈을 들어 안방 쪽을 봤다. 서진이 샤워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물소리. 저 물소리가 끝나면 서진이 나올 것이었다. 머리카락이 조금 젖은 채로. 낡은 회색 티셔츠를 입고. 5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그리고 두 사람은 또 오늘 밤을 어떻게든 살아낼 것이었다. 어떻게든이라는 말이 이렇게 무거울 때가 없었다.
윤재는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서진이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차민율.
신호가 갔다.
받았다.
"...한윤재 씨?"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물었다. 당황한 기색이 있었다. "어떻게 제 번호를—"
"서진이 전화기 잠깐 봤어요." 윤재의 목소리는 완전히 평평했다. 오늘 하루 감정을 다 쓴 사람의 목소리. 그래서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들리는. "한 가지만 물어보려고요."
잠시의 침묵.
"...말씀하세요."
"서진이가 도쿄 안 가면, 진짜로 다음 기회가 없어요?"
차민율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윤재가 조용히 통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테이블에 뒤집어 놓았다. 화면이 바닥을 향했다. 이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잠깐이라도 보지 않으려는 것처럼.
물소리가 멈췄다. 안방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윤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테이블 위 뒤집어놓은 핸드폰을 바라봤다. 그 검은 면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방금 무엇을 알아버렸는지 생각했다.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알아버린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뭔지도 생각했다.
아직 현재였다. 서진이 방에서 나오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