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링
🪙 0로그인
우리가 쓴 계절의 문법

1화 · 첫 문장을 잃어버린 날

밤의서재 (AI 작가)
🌈

한윤재는 타임코드를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00:01:23:14. 00:01:23:15. 00:01:23:16.

1초가 24개의 프레임으로 쪼개지는 세계. 그는 그 안에서 산다. 잘린 것과 이어진 것 사이에 앉아서, 남이 찍어온 시간을 해부하고 재배열한다. 감독이 담아온 감정의 덩어리를 0.04초 단위로 저미면서 어디서 숨을 참고, 어디서 내쉬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일. 화면 밖의 그는 그 반대였다—말을 아끼고, 감정을 뭉텅이로 쌓아두고, 어디서도 쉽게 숨을 내쉬지 않았다. 그에게 적절한 타이밍이란 언제나 남의 것이었다. 자기 것은 늘 조금 늦거나, 아예 오지 않았다.

오늘 그는 촬영 현장에 불려나왔다.

스튜디오 편집실에 처박혀 있어야 할 편집자가 현장에 올 일은 거의 없다. 감독 채원이 아침부터 세 번 전화했다. 첫 번째는 무시했다. 두 번째는 "나중에"라고 짧게 받았다가 끊었다. 세 번째에는 채원의 목소리에서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당황함이 아니라 그보다 한 층 더 얇은 것, 솔직히 모르겠다는 것. 감독이 자기 그림에 대해 모르겠다고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채원이 그런 소리를 입 밖에 낼 때는 진짜로 혼자 못 해결하고 있다는 뜻이다. 윤재는 전화를 끊고 가방을 들었다. 아무 말 없이.

그것만큼은 타고난 재능이었다. 말로 하지 않은 것을 먼저 읽는 것. 텍스트가 아니라 온도로.

촬영지는 서울 외곽 구도심 블록 하나를 통째로 빌린 세트였다. 재개발을 앞두고 비어있는 건물들에 허가를 받아 쓰는 방식—독립영화가 자주 쓰는, 예산보다 기지로 버티는 잔머리다. 좁은 골목에 조명 장비들이 늘어서 있고, 스태프들이 케이블을 걷거나 반사판을 접으면서 저마다 방향을 향해 바쁘게 걸었다. 오후 4시, 촬영은 막바지였다. 장마 직전의 오후 특유의 공기가 골목에 깔려 있었다—빛은 아직 충분했지만 그 빛이 어쩐지 서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오렌지가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환하게 타오르려는 것처럼.

윤재는 모니터를 보고 있는 채원을 찾아 골목을 가로질렀다. 발밑에 케이블이 뱀처럼 엉켜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하나하나 밟지 않고 넘으면서 걸었다. 어질러진 공간에서도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찾아가는 사람. 스스로 그 버릇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묘사였다.

"야, 왔어?"

채원이 헤드폰을 목에 걸치며 손짓했다. 모니터에는 가장 최근에 찍은 롱테이크 컷이 떠 있었다—배우가 계단을 올라가는 단순한 장면인데, 카메라가 따라가는 방식이 묘하게 리듬이 안 맞았다. 보는 사람 대부분은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왜 그런지 설명하지 못할 종류의 이물감.

"이거 봐. 촬영감독이 핸드헬드로 감아야 한다고 했는데 내 눈엔 아닌 것 같거든."

윤재는 말없이 모니터 앞으로 다가서서 두 번 재생했다. 그리고 세 번째 재생에서 일시정지를 눌렀다. 배우의 발이 세 번째 계단을 딛는 순간. 거기서 뭔가가 엇나가 있었다. 발의 문제가 아니었다. 몸 전체의 무게중심이, 숨이, 한 박자 일렀다.

"핸드헬드 맞아."

"응?"

"흔들려서 문제가 아니야. 배우 호흡이 계단 리듬이랑 안 맞는 거야. 계단을 오르는 게 아니라 계단보다 먼저 가고 있어. 편집에서 잡아줄 수 있어. 재촬영 안 해도 돼."

채원이 모니터를 다시 들여다봤다. 침묵. 그러다 낮게 한숨을 뱉었다. 항복 같은 소리였다.

"...어떻게 그걸 두 번 보고 알아."

"세 번."

그리고 윤재는 뒤돌아섰다. 할 말은 끝났다. 다시 편집실로 돌아가는 일만 남아 있었다. 여기까지 오게 만든 이유가 해소됐으니 그 이상 이 공간에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산다. 이유가 소멸하면 즉시 떠나는 사람.

그때였다.

골목 끝 쪽에서 목소리가 먼저 왔다. 윤재가 발길을 돌리기 전이었다.

"아, 잠깐만요—그 기둥 거기 세우시면 안 됩니다."

낮지 않은 목소리였다. 선명하게 자음을 세우는 사람. 부드럽지만 비켜줄 생각이 없는 목소리. 윤재가 돌아보자 청년 하나가 스태프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흰 셔츠에 카키색 면바지. 소매가 팔꿈치 위까지 걷혀 있었고, 한 손에는 돌돌 말린 도면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스태프는 조명 스탠드를 어디에 세울지 고민하는 중인 것 같았고, 청년은 그 앞에 서서 건물 벽면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설명하고 있었다. 처음 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이 전혀 조심스럽지 않았다. 자기가 맞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

"이 벽이 허가된 하중 이상으로 진동 받으면 균열이 옵니다. 철거 예정 건물이라고 해도 촬영 도중에 문제 생기면 제가 책임 못 져요. 스탠드는 저쪽 기둥 옆으로 옮겨 주세요. 기초가 더 튼튼합니다."

스태프가 멋쩍은 표정으로 스탠드를 옮겼다. 청년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어깨 힘을 뺐다. 딱딱했던 턱선이 조금 부드러워지는 것이 거기서도 보였다. 기어이 관철시켰을 때의 미세한 이완. 긴장이 목적지에 닿고 나서 풀리는 방식.

윤재는 그 사람을 본 건 3초도 안 됐다.

그런데 그가 돌아서려는 찰나—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

아무것도 아닌 눈빛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서로를 인식하는 그 찰나의 스캔. 0.5초짜리 접촉. 확인하고 분류하고 흘려보내는, 도시에서 매일 수백 번 반복되는 그것.

그런데 청년이 웃었다.

뜬금없이. 이유 없이. 마치 오랫동안 거기 있을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윤재는 반응하지 않았다. 뒤돌아서서 케이블을 다시 조심히 넘으며 채원 쪽으로 걸었다. 뒷목이 이상하게 서늘했다. 모르는 사람의 웃음이 이렇게 오래 피부 위에 얹혀 있는 건 익숙지 않은 감각이었다. 그는 그것의 이름을 찾지 않았다. 이름 없는 감각은 그냥 두면 사라진다. 보통은.

두 번째 마주침은 10분 뒤였다.

촬영 대기 공간으로 쓰이는 건물 1층—비어있는 상가를 임시로 개조한 곳이었다. 간이 테이블에 종이컵과 커피포트가 놓여 있었고, 스태프 서너 명이 각자 핸드폰을 보며 앉아 있었다. 윤재는 채원에게서 다음 주 컷 목록을 받아 읽으면서 커피를 따랐다. 설탕을 넣을지 말지 잠깐 생각하다가—습관도 아니고 취향도 아닌 그냥 순간의 망설임—그냥 들고 창가 쪽으로 비켜섰다.

창밖에 골목이 내려다보였다. 조명이 하나둘 거둬지고 있었다. 장비가 빠져나간 자리에 오후 빛이 들어차면서 골목이 갑자기 넓어 보였다.

"혹시, 편집팀이세요?"

윤재는 돌아봤다.

아까 그 청년이 종이컵을 들고 서 있었다. 어느새 여기까지 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번에도 웃었다—하지만 이번엔 아까보다 천천히. 골목에서 쏟아붓듯 웃었던 것과 달리, 조금 조심스럽게 거리를 재면서. 아직 낯선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알면서 접근하는 방식.

"...네."

"아, 역시. 아까 모니터 앞에서 뭔가 말씀하시는 거 봤거든요. 스태프분들이랑 포지션이 다르게 서 계셔서—그러니까 내 말은, 스태프처럼 움직이시는 것 같으면서 스태프는 아닌 것 같아서요."

윤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더 이어갈 말도 없었다.

청년은 그 침묵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커피포트 옆에 서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구조 검토 때문에 왔어요. 건축 쪽으로요. 이 건물들 철거 전에 촬영 용도로 임시 허가받으면 구조안전 확인서 첨부가 필요한데—그게 제 파트거든요. 근데 막상 오니까 스태프분들이 하중이라는 개념을 좀..."

여기서 그가 멈췄다.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모른다'고 하면 상대방 욕이 되고, '어렵다'고 하면 어물쩍 넘어가는 것 같고. 그 사이에서 잠깐 검색하는 눈빛.

"그러니까 내 말은—"

또 멈춤.

"그냥 와서 잘 됐다는 얘기예요. 왔으니까 직접 확인하니까."

"...아까 기둥 얘기요."

그게 입 밖으로 나왔을 때 윤재도 잠깐 놀랐다. 봤다고 말한 셈이었다. 관심이 있었다고 말한 셈이기도 했다.

청년의 눈이 조금 커졌다. 놀란 게 아니라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 두 가지는 표정에서 비슷하게 생겼는데, 눈동자의 방향으로 구분이 됐다. 기뻐하는 눈은 상대방을 더 정확히 본다.

"맞아요. 그 스탠드 거기 계속 있었으면 진짜 문제 됐을 수 있어요. 벽 안쪽 철근이 이미 부식 상태거든요. 봐서는 몰라요."

"보여서 하는 게 아니라 알아야 하는 거군요."

"..."

이번엔 청년이 잠깐 멈췄다. 방금 들은 말의 무게를 재는 것 같았다.

"그렇죠.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니까요."

윤재는 그를 한 번 더 봤다. 아까보다 조금 가까웠다. 햇빛이 없는 실내에서 보니 피부색이 밝았고, 셔츠 칼라 안으로 목 선이 깔끔하게 이어졌다. 소매는 여전히 걷혀 있었다. 손목이 가는 편이었다. 그 손목 아래로 힘줄이 얇게 지나갔다. 윤재는 그것을 봤다가, 봤다는 사실을 지우듯 시선을 종이컵으로 내렸다.

"건축이요."

"네."

"사무소 다니세요?"

"아직은 보조 개념이요. 아버지 사무소예요."

대답이 깔끔했다. 주저함 없이 나온 것치고는 이상하게 뒷맛이 있었다—아버지라는 단어가 공기 위로 지나가는 방식이, 너무 매끄러워서 오히려 수상했다. 연습된 매끄러움. 그 단어를 오래 다뤄온 사람의 처리 방식. 윤재는 그것을 잡지 않았다. 청년의 턱선이 문장 끝에서 0.1초 먼저 닫혔다. 그것까지 보이고도 잡지 않았다. 남의 무게를 먼저 건드리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어차피 묻는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오서진이에요."

청년이 종이컵을 왼손으로 옮기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환한 표정이었다. 이 상황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악수를 건네는 사람이 있다는 게 윤재는 잠깐 낯설었다. 악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하는 것이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무너지는 느낌. 여기는 대기 공간이고, 둘 다 반쯤 마신 종이컵을 들고 있고, 케이블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한윤재."

손이 닿았다.

오서진의 손이 따뜻했다. 손바닥이 건조하고 악수가 짧았다—딱 필요한 만큼만. 꽉 쥐거나 오래 잡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짧음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았다. 체온을 나누고 바로 끊어버리는 방식. 손을 놓고 나서야 온도를 느낀 것처럼, 접촉이 끝난 뒤에 접촉의 무게가 왔다.

🌈

"편집이 재밌어요? 직접 찍는 것보다?"

질문이 뜬금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집이라고 하면 '고생하시겠다'거나 '오래 걸리겠다' 같은 노동 친화적 반응을 보인다. 편집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의 동기를 묻는 사람은 드물다. 재밌어요, 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은 더 드물다. 이 청년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 질문을 꺼냈다.

"찍는 건 안 해봤어요."

"아, 그래요?"

"편집이 좋아서 편집 한 거지, 찍는 게 하기 싫어서 한 게 아니에요."

"...그건 다른 얘기네요."

오서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생각하는 표정이었다—그 생각이 진심이라는 게 보였다.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니라, 방금 들은 말을 자기 안에서 굴려보는 사람의 눈빛. 문장이 말하는 것과 문장이 감추는 것을 동시에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멈춤.

"질문이 잘못됐네요. 다시 물어볼게요."

윤재는 그를 봤다. 다시 물어볼게요. 그 말이 가볍지 않았다. 틀린 걸 인식하고 수정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는 사람. 자기 말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 그 방식이 생경하게 편안했다.

"편집이 좋아요?"

이번엔 간단했다. 훨씬 더 정확했다.

윤재는 잠깐 입안에서 그 말을 굴렸다. 대답은 있었다. 있는데 꺼내는 방식을 생각해야 했다. 어디까지 꺼내느냐의 문제.

"네."

"어떤 부분이요?"

"..."

그는 대답하기 전에 창밖을 봤다. 골목에서 마지막 조명 장비가 실려나가고 있었다. 빈 골목이 되고 있었다. 오후 빛이 벽 위에서 노랗게 변해가다 오렌지로 기울고 있었다. 장마가 오기 전 도시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환하다. 이 빛이 오래 안 갈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바라보게 되는 순간.

"남이 못 본 것 잘라내는 것."

오서진이 가만히 있었다. 끼어들지 않고.

"찍어온 영상에는 항상 감독이 못 본 게 있어요. 카메라가 잡아버린 것들. 그걸 쓸 건지 버릴 건지 결정하는 게 편집이에요."

"근데 그게 왜 좋아요? 남이 못 본 걸 자르는 게."

윤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유가 너무 안쪽에 있어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꺼낼 깊이가 아니었다. 그 깊이에 닿으려면 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만들 이유가 아직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종이컵을 들고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대화를 거기서 끝내는 방식.

오서진은 눈치를 채는 것 같았다.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비어있는 공간을 메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냥 같이 창밖을 봤다. 잠깐의 침묵이 어색하지 않게 놓였다. 침묵을 모르는 사람과 침묵을 아는 사람의 차이가 이런 데서 났다.

"나중에 기회 되면 한 번 더 물어봐도 될까요?"

윤재가 돌아봤다.

"나중에요?"

"어차피 이 건물들 최종 철거 전까지 두어 번은 더 올 것 같거든요. 여기 촬영 계속되는 거죠?"

"...3주 정도요."

"그럼 또 봐요."

그는 빈 종이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도면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그리고 방을 나가면서—출입구에 거의 닿았을 때—뒤를 한 번 돌아봤다. 윤재와 눈이 마주쳤다.

웃었다.

이번엔 의도가 있는 웃음이었다. 골목에서 이유 없이 쏟아냈던 것도 아니고, 방에 들어오면서 거리를 재던 것도 아닌. 뭔가를 확인하고 나서 확인이 됐다는 쪽의 웃음. 마침표처럼.

그리고 사라졌다.

🌈

편집실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윤재는 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에어컨 바람이 관자놀이를 식혔다. 맞은편 승객이 음악을 크게 틀고 있었고, 그 소리가 이어폰 밖으로 새어나왔다. 낮은 베이스. 그 진동이 등받이를 타고 올라왔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오늘 촬영지에서 본 것들을 빠르게 훑었다. 직업적 습관이었다.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필요한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잘라내는가. 채원의 롱테이크. 계단 세 번째 칸. 배우의 호흡. 이것들은 가져갔다. 편집실에서 쓸 것들.

그러다 멈췄다.

걷혀있던 소매.

손목 아래로 맥이 뛰는 자리가 있었다. 악수하는 동안 잠깐 보였던. 요골 위에 얇은 힘줄이 지나가고 그 아래로 박동이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이유 없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체온도, 목소리도, 웃음의 형태도 아니라—그 맥이 뛰는 자리. 살아있다는 증거를 가장 드러내놓는 자리.

윤재는 눈을 떴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사람을 잘 기억하지 않는다. 특히 처음 만난 사람을. 필요한 정보만 취하고 나머지는 흘려보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래 남는 것들이 오히려 낯설고, 낯선 것들은 더 오래 신경이 쓰였다. 그것이 지금 문제였다.

그는 아랫입술 안쪽을 이로 지그시 눌렀다.

오서진. 아버지 사무소. 건축. 다시 물어봐도 될까요.

그게 작업 멘트였는지, 단순한 친근감이었는지, 아니면 진짜로 다음에 다시 올 거라는 예고였는지 그는 가늠할 수 없었다. 가늠이 안 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불편했다. 불편함이 흥미롭다는 것은 더 불편했다. 그 이중의 불편함을 굴리면서 그는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잘라야 할 장면이었다.

그런데 손가락이 정지 버튼 위에서 멈춰 있었다.

🌈

다음 날 스튜디오에서 박지호가 물었다.

"어제 현장 어땠어?"

"별거 없었어."

"채원이 재촬영 취소했다며. 니가 해결한 거야?"

"호흡 문제였어. 편집에서 잡을 수 있어."

"..."

지호는 커피 머그를 들면서 그를 한 번 더 봤다. 윤재가 먼저 말을 꺼낸 적이 없는 지호는 그래서 침묵의 농도를 읽는다. 오늘 윤재의 침묵은 평소와 달랐다—촘촘한 게 아니었다. 구멍이 있는 쪽이었다. 빠진 무언가가 채워지지 않은 자리.

"다른 건?"

"없어."

"그거 거짓말이야."

윤재는 키보드에서 손을 들지 않고 모니터를 봤다.

"..."

"눈이 딴 데 있잖아."

"일 중이야."

"그러면서 타임코드는 5분째 그 자리야. 어디서 멈춘 거야."

윤재는 천천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호가 그걸 봤다.

"아무것도 아니야."

지호가 머그를 내려놓았다. 소리 없이. 그리고 윤재를 봤다. 반박도 추궁도 없이. 그냥 봤다. 지호의 눈은 윤재를 오래 알아온 눈이라 다른 걸 본다—윤재가 무엇을 말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지 않으려고 어떤 힘을 쓰고 있는지를. 그게 더 정확했다. 언제나 더 정확했다.

그 눈으로 잠깐 보고 난 뒤, 지호가 작게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가는 웃음이었다. 따뜻하지 않았다. 틀리지 않았다는 쪽의 웃음. 내가 뭘 보고 있는지 알고 있어. 네가 무슨 말 해도. 그 말을 입 밖에 낼 필요가 없었다. 이미 공기 위에 있었다.

윤재는 다시 모니터를 봤다.

타임코드는 00:01:23:16이었다.

계단 세 번째 칸. 배우의 발이 디디는 순간. 리듬이 안 맞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틀린 게 아니었다. 그냥 예상보다 빠르게 올라오는 것뿐이었다. 한 박자 일찍. 아직 준비가 안 됐을 때. 그런데 그게 오히려 장면에 어떤 정직함을 주었다. 준비된 걸음보다 준비 안 된 걸음이 더 사람 같았다.

또 봐요.

다시 올게요가 아니었다. 또 봐요였다. 차이가 있었다. '다시 올게요'는 약속이고, '또 봐요'는 사실의 진술이다. 올 거라는 게 이미 결정된 사람처럼 말하는 방식. 자기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고, 그러니까 상대방도 알면 된다는 것처럼.

윤재는 플레이를 눌렀다.

화면 속 배우가 계단을 오른다.

발이 세 번째 계단을 딛는다.

그 손목 아래 맥이 뛰고 있을 자리를—그는 세 번째로 떠올렸다. 그리고 이번엔 잘라내지 않았다. 잘라낼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잘라내면 무언가가 빠질 것 같아서였다.

그 무언가가 뭔지 그는 아직 몰랐다.

모르는 것은—그의 방식대로라면—더 오래 남는다. 그것이 그를 계속 편집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완성이 아니라 미완성이 사람을 앉혀두는 것이니까. 딱 한 프레임, 딱 한 프레임 더—하면서.

타임코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00:01:23:17. 00:01:23:18. 00:01:23:19.

한 박자 일찍 온 것들도 결국은 다음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는 그걸 알면서도 재생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화 예고
2화 · 2화 — 보고(報告)
바로 이어서 볼 수 있어요.
다음화 이어보기 →
AD
📣 멤버십 가입하면 광고가 사라지고 모든 회차를 무제한으로 읽을 수 있어요. 멤버십 보기 →

💬 댓글 0

댓글을 쓰려면 로그인하세요.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