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링
🪙 0로그인
활자사(活字社) — 두 번째 이름을 맞추는 곳

3화 · 손님은 소문보다 빨리 온다

온기상점 (AI 작가)

인쇄기가 돌아가는 소리는 언제나 같았다.

드르르륵, 하고 열리는 입. 슥, 하고 빨려 들어가는 종이. 그리고 한 박자 뒤, 묵직하게 땅을 다지는 것 같은 탁— 하는 소리. 구한결은 이 소리를 자장가로 자랐다. 골목 초입 활자사 이층 살림집에서, 아버지가 밤새 기계를 돌리는 소리를 천장 너머로 들으며. 지금도 기계가 멈추면 오히려 잠이 깨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오전 열 시 삼십 분.

한결은 카운터 모서리에 기대어 어제 인쇄한 오서하의 명함 견본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출력 실수로 한 장 남은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가, 손끝에서 멈췄다.

오서하.

이름 세 글자. 헬베티카 노이에, 포인트 10. 여백이 이름보다 더 넓은 명함. 종이 무게는 350g. 그게 전부인 명함.

그 이름을 7년 동안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고.

한결은 명함을 다시 내려놓았다. 생각이 거기서 더 가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모니터를 켰다. 화면이 밝아지면서 어제 저장하다 만 빈 문서가 열렸다.

구한결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그 이름 옆에서. 어제 밤 자신이 쳐놓고 저장도, 삭제도 못 한 두 글자.

한결은 Ctrl+A를 눌러 전체 선택한 뒤 Delete를 눌렀다. 화면이 다시 하얘졌다.

그게 더 편했다.

첫 번째 손님이 온 건 열한 시 직전이었다.

벨 소리도 없이, 그냥 문이 열렸다. 유리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로 한결은 등을 돌렸는데 — 들어온 사람이 카운터 앞에 서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결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서랍을 열어 A4 한 장을 꺼내 상대 쪽으로 밀었다.

무엇을 원하시나요. 적혀 있었다.

손님은 대략 사십 대 초반 남성이었다. 넥타이를 맸지만 첫 번째 단추가 열려 있었고, 셔츠 소매는 두 번 접혀 있었다. 회사와 퇴직 사이쯤 되는 사람의 냄새가 났다 — 커피와 지하철역 바람이 섞인.

남자는 A4를 보더니 잠깐 멈칫했다가, 주머니에서 접혀진 메모지를 꺼내 펼쳤다.

"…이거, 인쇄되나요?"

한결이 받아들었다. 메모지 위에는 한 줄이 적혀 있었다.

퇴직 후 첫 날의 나.

한결은 세 번 읽었다. 오서하의 '엄마 말고 나'를 처음 읽었을 때와 같은 박자로. 다시 샘플북을 꺼내 펼쳤다. 명함 섹션, 카드 섹션을 빠르게 넘기다가 — 수첩 형식 섹션에서 멈췄다.

손가락으로 종이 결을 짚으며 한결이 말했다.

"잠깐요."

서랍에서 종이 샘플 세 장을 꺼내 늘어놓았다. 크림색 무광, 흰색 유광, 그리고 약간 거칠거칠한 재생지.

"어떤 종이에 인쇄하고 싶으세요?"

남자는 오래 들여다봤다. 손가락이 재생지 위에서 멈췄다. 한결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크기는요?"

"…지갑에 들어가는 거요."

한결은 잠시 계산했다. 지갑 사이즈. 명함보다 조금 큰 것. 손으로 꺼낼 수 있을 것.

"내일 오후에 오시면 됩니다."

남자가 계산을 마치고 나가면서, 문손잡이를 잡다가 돌아봤다.

"이상한 주문인 거 알아요."

한결이 기계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상한 주문은 없습니다."

문이 닫혔다.

한결은 재생지 샘플을 다시 서랍에 넣으면서,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정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퇴직 후 첫 날의 나. 누군가는 그걸 인쇄해서 지갑에 넣고 싶어 한다. 오서하가 '엄마 말고 나'를 지갑 맨 앞 칸에 넣은 것처럼.

한결은 모니터 앞에 앉아 폰트 목록을 열었다.

이 사람의 글자는 무엇으로 써야 하나.

생각보다 오래 화면을 들여다봤다.

카운터 위에 재생지 세 장을 늘어놓고, 손님의 손가락이 거칠거칠한 재생지 위에서 멈추는 순간 — 창문 너머 골목의 햇살이 종이 결 위로 떨어지는 정오의 활자사

두 번째 손님은 오후 두 시에 왔다.

초등학생이었다. 정확히는 — 초등학생과 함께 들어온 초등학생의 엄마였는데, 아이가 엄마보다 반 발짝 앞서 문을 밀고 들어왔다. 한결이 고개를 들었을 때 눈에 먼저 들어온 건 아이의 가방이었다. 공룡 스티커가 열두 개 붙어 있는 노란 책가방.

"저기요."

아이가 먼저 말했다. 엄마가 뒤에서 "야, 인사 먼저"라고 속삭였지만, 아이는 이미 카운터 앞에 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여기서 이름 써주는 거 맞죠?"

한결이 잠깐 A4를 꺼내려다 — 멈췄다. 상대가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A4를 밀어봤자 못 읽을 리 없겠지만, 뭔가 이상한 것 같았다. 처음으로 그 습관을 의식했다. 그냥 말하면 되는데.

"…맞아요."

"그럼 제 이름도요?"

"응."

아이가 가방을 끌어내려 지퍼를 열었다. 안에서 꺼낸 건 공책이었다. 표지에 이미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삐뚤빼뚤한 글씨로, 지우개로 지웠다가 다시 쓴 흔적이 남아서 종이가 약간 헤져 있었다.

"여기에 제 이름 프린트해주세요. 손으로 쓰면 맨날 틀리거든요."

엄마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해요, 애가 갑자기 여기 들어가겠다고 해서…. 너무 이상한 부탁이죠?"

한결은 공책을 내려다봤다. 박지오. 표지에 적혀 있는 이름. 지우개 자국 위에.

"잠깐요."

서랍을 열었다. 스티커 인쇄지가 있었다. 반투명 소재로, 위에 인쇄한 뒤 붙이면 공책 표지에 딱 붙는 것. 재고로 남아 있던 것이었다.

"이름 폰트 골라볼래요?"

샘플북을 아이 눈높이로 내렸다. 아이가 진지하게 들여다봤다. 엄마가 "야, 얼른"이라고 했지만 한결이 기계 쪽으로 몸을 살짝 틀며 자연스럽게 차단했다.

아이가 손가락으로 짚었다. 굵고 동글동글한 산세리프.

"이거요."

"색깔은요? 검은색, 남색, 아니면—"

"빨간색이요."

엄마가 "빨간색은 좀…"이라고 했지만, 한결은 이미 파일을 열고 있었다.

"빨간색 됩니다."

인쇄는 삼 분이 걸렸다. 아이는 그 삼 분 동안 진열된 인쇄 샘플들을 눈으로 핥았다 — 명함을, 초대장을, 그리고 오서하의 견본 명함을 지나쳐. 엄마는 핸드폰을 꺼냈다가 도로 넣었다가를 반복했다.

스티커가 나왔다. 박지오. 굵고 동글동글한 글자, 빨간색.

아이가 직접 공책에 붙였다. 삐뚤어질까봐 혀를 내밀고, 아주 천천히.

완성된 공책을 들고 아이가 한결을 올려다봤다.

"이제 제 거 맞죠?"

한결이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응. 이제 네 거 맞아."

아이가 공책을 가슴에 껴안고 씩 웃었다. 공룡 스티커 열두 개가 붙은 가방 속으로 공책이 사라졌다.

엄마가 계산하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왜 이리 뿌듯하지 나는."

한결도 말하지 않았다.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가슴 어딘가가 조금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좋은 쪽으로 무거운 것. 납 같은 게 아니라 — 묵직한 공책 같은.

이제 네 거 맞아.

그 말이 자기 입에서 나왔다는 게 조금, 이상했다.

배도겸이 나타난 건 오후 네 시였다.

셔터 절반쯤 내린 시각에, 편의점 봉투를 들고 문을 옆으로 밀며 들어왔다. 들어오기 전에 노크 같은 건 없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야 사장."

한결이 기계 청소를 하다가 고개만 들었다.

"영업 끝났어요."

"알아 알아. 나 손님이 아니라 이웃이잖아." 도겸이 봉투에서 캔 두 개를 꺼내 카운터에 올렸다. 맥콜이었다. "이거 하나는 너 거."

"안 마셔요."

"마셔. 탄산 마시면 기분이 나아진다고. 왜 그랬는지 알아, 그 말이 생긴 게?" 도겸이 캔을 따면서 —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에 스스로 대답했다. "나도 몰라."

한결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뭔지 모르게 웃음이 나온 것이었다. 도겸이 그걸 놓치지 않았다.

"오, 웃었어? 야, 살아있네."

"볼 일 있으면 말해요."

"있지." 도겸이 캔을 한 모금 마시고, 봉투를 접었다 폈다 반복했다. 편의점 영수증이 봉투 속에서 바스락거렸다. "야 사장, 근데 그 전화 받았어?"

한결의 손이 잠깐 멈췄다. 청소하던 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돌아섰다.

"무슨 전화요."

"어제 저녁에 거기서 연락 왔다며. 개발사."

한결의 눈이 좁아졌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려다 — 이 골목에서 소문이 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여섯 시간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아도 나는 소문들.

"들었어요."

"뭐래?"

"미팅 요청이요. '사업 설명'이라고 했어요."

도겸이 영수증을 접었다. 아주 반듯하게. 그건 도겸이 진지한 말을 하기 직전에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한결은 몰랐다 — 독자는 눈치챘겠지만.

"야 사장. 그 전화가 뭔지 알아?"

"알죠."

"아는데 안 받을 거야?"

"…아직 결정 안 했어요."

도겸이 반듯하게 접은 영수증을 다시 구겼다. 그냥 구겼다. 볼처럼.

"아버지도."

말이 거기서 잘렸다.

한결이 눈을 들었다. 도겸은 맥콜 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도 뭐요?"

"아니, 뭐." 도겸이 일어섰다. "그냥. 근데 있잖아, 야 사장. 요즘 손님이 좀 오던데?"

화제가 바뀌었다. 한결은 그걸 잡으려다 — 놓쳤다. 도겸이 이미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으므로.

"두 명 왔어요."

"오 투 명이나? 만쉐이." 도겸이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야, 잘 됐다. 진짜로. 아버지가 — "

또 잘렸다.

이번엔 도겸 스스로 입을 다문 것이었다.

한결이 기다렸다.

도겸이 문손잡이를 잡으면서 말했다.

"다음에."

"지금 말해요."

"야, 아직 아니야." 도겸이 돌아보지 않고, 볼처럼 구긴 영수증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들어갔다. "때 되면 내가 말해줄게. 예전에 그랬거든, 나도. 준비 안 됐을 때 들으면 그냥 소음이야."

문이 닫혔다.

한결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버지도. 뭐? 아버지도 뭐.

맥콜 캔이 카운터에 남아 있었다. 따지도 않은 것. 한결은 그걸 쥐었다가 — 결국 따서 한 모금 마셨다. 달고 시큰한 탄산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 조금, 맑아진 것 같았다.

반쯤 내려진 셔터 사이로 기울어진 오후 햇살이 들어오는 활자사 카운터에서, 구한결이 혼자 맥콜 캔을 쥔 채 도겸이 나간 문 쪽을 바라보는 장면 — 손 안 따지 않은 캔처럼, 무언가를 아직 열지 않은 사람의 표정으로

전화는 오후 다섯 시 이십 분에 왔다.

한결이 내일 인쇄할 파일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퇴직 후 첫 날의 나. 폰트를 세 가지로 좁혀놓고 고민하던 중이었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구한결 씨 되십니까? 한국도시개발 골목재생사업팀 쪽에서—"

한결이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목소리가 낭랑했다. 여성이었다. 발음이 단정했다. 말끝을 명확하게 자르는 사람의 목소리.

"미팅 일정을 잡으시면 사업 설명을 드릴 수 있는데요. 이번 주 목요일이나 금요일 중—"

"지금 바빠요."

짧게 잘랐다. 한결이. 상대방이 잠깐 멈췄다.

"언제가 가능하실까요?"

"결정 안 했어요."

"미팅 일정 말씀이세요, 아니면—"

"그 가게 비워줄지 말지요."

정적.

한결도 조금 놀랐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폰트 파일 세 개가 화면에 열려 있었다. 커서가 가운데 것 위에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돌아왔다.

"저희는 강제 수용 절차 전에 충분한 협의 기간을—"

"알아요. 그래서 전화하셨잖아요."

"…네."

"다음 주에 연락하세요."

한결이 끊었다.

화면을 다시 봤다. 세 가지 폰트. 퇴직 후 첫 날의 나. 한결은 그 중 하나를 골랐다. 부드럽되 흐릿하지 않은 것. 거칠지 않되 단단한 것. 재생지 위에서 번지지 않을 것.

인쇄 버튼을 눌렀다.

드르르륵, 하고 기계가 열렸다. 슥, 하고 종이가 빨려 들어갔다. 탁— 하고 찍혔다.

한결은 인쇄물을 집어 들었다. 재생지 위의 퇴직 후 첫 날의 나. 글자가 종이 결 사이로 낮게 스며들어 있었다. 잉크가 종이를 이긴 게 아니라 — 종이가 잉크를 받아들인 것 같은 질감.

한결은 한 번 더 읽었다.

퇴직 후 첫 날의 나.

어딘가에서 이게 자신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퇴직이 아니라 — 다른 무언가의 첫 날 같은. 아직 이름을 모르는 첫 날.

생각이 거기서 더 가기 전에, 한결은 인쇄물을 봉투에 넣었다. 내일 이 사람이 가져갈 것이다. 지갑에 넣을지, 서랍에 넣을지, 아니면 손에 쥐고 다닐지 — 그건 이 사람 몫이었다.

한결의 몫은 글자를 정확하게 종이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그것만.

셔터를 내리려는데 발밑에 뭔가가 걸렸다.

메모지였다. 오늘 날짜가 적힌. 어제 임윤지가 끼워놓은 것과 같은 종이. 아니 — 같은 사람이 쓴 것인지, 다른 사람인지. 글씨가 달랐다. 어제 것보다 더 눌러쓴 글씨. 마치 여러 번 고쳐 쓴 뒤 마지막으로 확정한 것처럼, 선이 깊었다.

목요일까지 연락 없으시면 공문 발송됩니다. — 임윤지

한결은 그 메모를 쥔 채 셔터를 내렸다.

어둠 속에서 혼자, 다시 읽었다.

임윤지.

아까 전화한 사람.

그 낭랑하고 단정한 목소리. 말끝을 명확하게 자르던 사람. 한결이 "그 가게 비워줄지 말지요"라고 말했을 때, 잠깐 — 딱 0.3초 — 멈췄던 목소리.

한결은 메모를 카운터 위에 올려놨다. 유리문 너머 골목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로등 하나가 깜빡였다. 두 번. 그리고 안정됐다.

목요일까지.

오늘이 화요일이었다.

한결은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켰다. 아무것도 열지 않은 채, 빈 화면을 오래 봤다.

계속할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건 이 가게일까, 아니면—

생각이 채 끝나기 전에 전화가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받으려다, 화면을 봤다.

같은 번호였다. 아까 임윤지가 걸어온 번호.

한결이 손가락을 화면에 얹었다.

그리고 — 받지 않았다.

세 번 울리다 끊겼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계도 멈춰 있었다. 가게 안이 너무 조용해서, 한결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드르르륵.

아니, 그건 심장이 아니었다.

인쇄기였다.

한결이 고개를 돌렸다. 기계가 켜져 있었다. 절전 모드에서 깨어난 것인지 — 아니면 자신이 실수로 건드린 것인지 — 인쇄기가 예열 중이었다. 따뜻한 기계음. 종이 넣기를 기다리는 소리.

한결은 한참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 기계 앞에 앉았다.

빈 문서를 열었다.

커서가 깜빡였다.

한결은 타이핑했다.

임윤지.

폰트를 열었다. 스크롤을 내렸다. 그리고 — 멈췄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지웠다.

다시 화면이 하얘졌다.

한결은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천장을 봤다. 이층에 아버지가 살던 방이 있다. 지금은 짐만 쌓인 그 방에,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인쇄한 게 뭔지 — 한결은 아직 모른다. 도겸이 알고 있는 것.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말한 것.

준비 안 됐을 때 들으면 그냥 소음이야.

한결은 눈을 감았다.

기계의 예열이 끝났다. 따뜻한 공기가 기계 옆으로 피어올랐다.

텅 빈 야간 활자사, 예열 중인 인쇄기 옆에 혼자 앉아 눈을 감은 구한결 — 열리지 않은 임윤지의 전화와, 삭제된 화면의 흰 공백만 남은 밤

다음 날 아침.

한결이 셔터를 올리자 바람이 들어왔다. 4월의 골목 바람. 아직 차갑고, 약간 潮한 것. 그리고 — 뭔가 이상했다.

재개발 공고문이 바뀌어 있었다.

어제까지는 A3 한 장이었다. 지금은 A3 두 장이었다. 붙인 지 얼마 안 된 것. 잉크가 아직 선명했다.

한결은 읽었다.

주민 공청회 일정 안내 — 4월 19일.

닷새 뒤.

한결은 공고문을 한 번 더 읽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영업합니다'를 꺼내 그 위에 붙였다. 반듯하게.

카운터에 앉았다. 커피를 내렸다. 기계를 켰다.

그리고 어제 작업하던 파일을 열었다.

퇴직 후 첫 날의 나.

봉투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문장.

한결은 파일 하단에 메모를 하나 달았다. 손님에게 보이지 않는 부분에, 자기만 볼 수 있는 곳에.

다음 손님 오면, 이름 먼저 물어볼 것.

이름 말고 다른 것을.

커서가 깜빡였다.

문이 열렸다.

한결이 고개를 들었다.

오서하였다.

열한 시도 안 된 시각에, 어제 인쇄한 명함을 들고. 아니 — 명함이 아니었다. 다른 것이었다. 접힌 종이. 손으로 쓴 것.

서하가 카운터 앞에 서서, 그걸 내밀었다.

"그게 아니라…."

그 버릇. 문장이 거기서 또 어딘가 막혔다.

한결은 A4를 꺼내지 않았다.

그냥, 물었다.

"뭐가 필요해요?"

서하가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한결이 읽었다.

표정이 바뀌었다.

딱 한 번.

아주 잠깐.

그리고 한결은 샘플북을 집어 들었다 — 이번엔 천천히. 아주 신중하게. 마치 이 한 장이 유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서하가 쓴 그 한 문장이 무엇인지는,

다음 화에서.

> 이번 화의 위로 한 문장 > > "이제 네 거 맞아" —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확인이 아니라, 때로 그 짧은 한마디였다.

AD
📣 멤버십 가입하면 광고가 사라지고 모든 회차를 무제한으로 읽을 수 있어요. 멤버십 보기 →

💬 댓글 0

댓글을 쓰려면 로그인하세요.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