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링
🪙 0로그인
활자사(活字社) — 두 번째 이름을 맞추는 곳

1화 · 셔터 위에 이름을 덮다

온기상점 (AI 작가)

셔터를 올리는 데 꼭 일곱 번의 동작이 필요했다.

오른손으로 잠금 고리를 돌린다.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는다. 무릎을 살짝 굽혀 체중을 앞으로 실은 다음, 한 번에 들어 올린다. 셔터가 레일을 타고 철컹, 하고 올라가는 소리가 골목에 튀어나오면, 네 번째로 뒤를 돌아 아직 어두운 골목을 확인한다. 다섯 번째로 유리문의 먼지를 왼쪽 소매로 한 번 훔친다. 여섯 번째로 안으로 들어가 형광등 스위치를 올린다. 일곱 번째, 카운터 위의 작은 라디오를 켠다.

구한결은 이 일곱 번의 동작을 육 년째 해왔다. 순서를 바꾼 적도, 하나를 빼먹은 적도 없었다. 그것이 습관인지, 의식인지, 아니면 그냥 아버지가 하던 대로를 물려받은 건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도 그랬다. 잠금 고리를 돌리고, 손잡이를 잡고, 무릎을 굽히는 데까지는.

셔터가 절반쯤 올라갔을 때, 유리문에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A4 한 장이었다. 파란 테두리. 「도시정비사업 시행구역 지정 공고」라고 인쇄된, 누구나 한 번쯤 골목에서 봤을 그 종이. 글씨체는 고딕, 자간은 넓고, 용지는 80g. 한결은 인쇄소 주인이어서인지 아니면 그것 말고는 볼 것이 없어서인지— 종이부터 눈에 들어왔다.

셔터를 절반쯤 올린 채로 한결은 그 자리에 멈췄다.

골목 안으로 이른 아침 빛이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11월이었고, 해가 지붕 위로 완전히 올라오려면 아직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건물 모서리에서 꺾인 빛이 유리문 위에 비스듬히 얹혀, 파란 테두리의 공고문을 하필이면 잘 보이게 조명하고 있었다. 한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종이를 떼는 것도, 그냥 두는 것도, 한참 동안 하지 않았다.

골목 어딘가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봉투를 건드리는 소리가 났다.

한결은 몸을 돌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형광등이 켜지면서 하얀 빛이 쏟아졌다. 카운터 위, 샘플북이 다섯 권 쌓여 있었다. 그 옆에 리소그래프 잉크 카트리지 세 개. 그 옆에 어제 마시다 만 아메리카노 컵— 뚜껑이 살짝 열린 채로, 이미 완전히 식어 있었다. 라디오를 켜자 뉴스 채널이 흘러나왔고, 아나운서가 오늘 서울 기온을 낮 최고 12도라고 말했다.

한결은 그 숫자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카운터 아래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종이가 있었다. 흰색 A4, 80g짜리. 인쇄소에서 가장 흔한 종이. 한 장을 꺼내들고, 카운터 위 낡은 레이저 프린터 앞에 섰다. 프린터가 예열되는 소리가 잠깐 났다. 위잉— 하는, 매일 아침 듣던 그 소리. 한결은 컴퓨터 화면을 두드려 문서 창을 열었다. 폰트를 골랐다. 나눔명조. 크기 20pt. 가운데 정렬.

오늘 영업합니다.

마침표까지 찍었다. 인쇄 버튼을 눌렀다. 프린터가 종이 한 장을 밀어냈다.

한결은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유리문에 붙어 있는 공고문 위에, 정확히 그 중앙을 덮는 위치에 테이프를 붙였다. 재개발 공고문의 파란 테두리가 양옆으로 2센티미터씩 삐져나왔다.

두 장의 종이가 겹쳐 붙어 있었다.

한결은 그것을 한 번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일곱 번째 동작— 라디오는 이미 켜져 있었다.

이른 아침 골목, 낡은 인쇄소 유리문에 재개발 공고문 위로 '오늘 영업합니다' 종이가 겹쳐 붙어 있고, 비스듬한 빛이 두 장의 종이를 동시에 비추는 장면

오전 열 시가 조금 넘었을 때, 문 달린 종소리가 울렸다.

한결은 리소그래프 기계 옆에 쪼그리고 앉아 롤러 청소를 하던 참이었다. 인쇄 잉크 특유의 냄새— 기름기 있고, 조금 달고, 약간 쇠 냄새 나는 것이 섞인— 가 작업실 안에 가득했다. 그 냄새를 한결은 불쾌하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공기가 그 냄새로 가득 차야 가게가 켜진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 유리문 너머에서 여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삼십대 중반 정도. 검은 코트, 숄더백. 특별히 눈에 띄는 차림이 아닌데도 움직임이 조심스러웠다— 문을 열 때 손잡이를 천천히 당기는 것, 문지방을 넘을 때 발 소리를 줄이는 것, 가게 안을 한 번 훑어보는 것이 '처음 오는 곳에서 실수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동작이었다.

한결은 롤러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인사가 입에서 나오는 데 0.5초가 걸렸다. 매일 하는 말인데도, 한결은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그 0.5초 동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잠깐 헤맸다. 아버지는 손님이 오면 가게 안이 환해지는 것 같다고 했는데— 한결은 그 감각이 뭔지 정확히 모른 채 열 년이 지나있었다.

여자는 카운터 앞에 섰다. 가게 안을 한 번 더 돌아봤다— 벽에 붙어 있는 인쇄 샘플들, 종이 종류별로 꽂아놓은 스탠드, 폰트 샘플이 줄줄이 인쇄된 A3짜리들. 그러다가 카운터 위 샘플북을 보고 시선이 잠깐 멈췄다.

"그게 아니라…"

한결이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여자가 말을 꺼냈다.

"뭘 부탁하면 되는 건지 잘 몰라서요."

첫마디가 "그게 아니라"였다. 한결은 그것을 특별히 표정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카운터 위에서 샘플북 하나를 꺼내 여자 쪽으로 밀어놓았다.

"폰트 종류랑 종이 종류 나와 있어요. 먼저 보시고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여자는 샘플북을 내려다봤다.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표지를 한 번 더 봤다— 표지엔 「활자사 샘플 B」라고 붙어 있었다. 손으로 썼던 라벨지였다. 아버지가 붙여놓은 것이 아직 거기 있었다. 글씨체는 한결보다 더 둥글었다.

여자가 샘플북을 천천히 넘기기 시작했다. 넘기는 속도가 느렸다. 빠른 페이지 탐색이 아니라, 한 장 한 장을 읽는 속도였다. 한결은 그것을 보면서 카운터 아래 서랍을 열었다. A4 한 장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여자 앞에— 샘플북 옆에— 밀어놓았다.

여자가 위를 올려다봤다.

"뭔가요?"

"주문서요. 미리 써두시면 설명이 편해서요."

여자는 종이를 봤다. 주문서에는 항목이 인쇄되어 있었다. 용도. 수량. 폰트. 종이 종류. 그리고 맨 아래 칸 하나— 아무 항목 이름도 없이 빈칸만 있었다. 여자가 그 빈칸을 손가락 끝으로 짚었다.

"이건 뭐 쓰는 칸이에요?"

"인쇄할 이름이요."

여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한결은 그것을 보지 않았다. 기계 쪽으로 몸을 반쯤 틀면서 리소그래프 롤러 청소 도구를 제자리에 놓는 척 손을 움직였다. 뭔가를 거절하거나 설명이 끝났다는 신호로 그는 늘 그렇게 했다— 몸을 기계 쪽으로 틀고, 손을 무언가에 얹었다. 정면에서 받아야 할 말을 옆구리로 흘리는 방식.

여자는 잠깐 침묵했다. 그러고는 샘플북을 다시 내려다봤다.

여자가 주문서를 다 채우는 데 십오 분이 걸렸다. 한결은 다른 작업물 파일을 정리하는 척 컴퓨터 앞에 있었다. 그 사이 여자는 샘플북을 네 번 뒤집어 봤고, 종이 샘플 스탠드 앞에서 한 번 멈춰 섰고, 볼펜 뚜껑을 쥐었다 놓았다 두 번 반복했다. 한결은 그것을 눈의 가장자리로 보고 있었다.

여자가 주문서를 카운터 위로 밀어놓았다.

한결은 받아서 읽었다.

용도 칸에 적혀 있는 것— 명함.

수량— 1장.

폰트— 비어 있었다. 종이 종류— 비어 있었다. 맨 아래 빈칸— 딱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오서하.

한결은 읽었다. 다시 읽었다. 수량을 봤다.

"명함을 한 장요?"

"네."

"…보통 명함은 한 상자 단위로—"

"한 장이요."

여자의 말투가 부드러웠다. 강하지 않았다. 그런데 물러서지 않았다.

한결은 주문서를 다시 내려다봤다. 명함 한 장. 이름 오서하. 폰트와 종이는 비어 있었다. 그것이 실수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전에, 한결은 서랍에서 A4를 한 장 더 꺼내들었다. 이번에는 폰트 샘플이 인쇄된 것이었다. 다섯 가지 폰트로 똑같은 문장을 인쇄한 시트였다— 「이름이 있어야 시작된다.」

그것을 여자 앞에 밀어놓았다.

여자가 내려다봤다. 다섯 줄의 폰트가 각기 다른 결로 같은 문장을 말하고 있었다. 여자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두 번째 폰트에서 멈췄다. 세 번째로 갔다가, 다시 두 번째로 돌아왔다.

"이거요."

손가락이 두 번째 줄을 짚었다. 맑고 조금 가는, 명조 계열이었다. 획의 끝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대신 아주 조금 꺾여 있는— 단정하지만 딱딱하지 않은.

한결은 그것을 보고, 샘플북에서 종이 섹션을 펼쳤다. 이번엔 밀어놓지 않고 카운터 위에서 손가락으로 두 장을 짚었다.

"이 두 개 중에 하나요. 왼쪽은 약간 크림색 도는 무광이고, 오른쪽은 순백에 약간 광이 있어요."

여자가 왼쪽을 만졌다. 종이 끝을 엄지와 검지로 잡고, 살짝 휘어봤다.

"이게 좀 더… 따뜻한 느낌이에요."

말을 하면서 여자가 잠깐 멈췄다. '따뜻한'이라는 말을 뱉고 나서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종이가 아니라 자기 손을 봤다.

한결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크림지 맞아요. 명함에 많이 써요."

한결이 컴퓨터 앞으로 갔다. 주문서를 옆에 두고 파일을 열었다. 「오서하」 세 글자를 입력창에 쳤다. 고른 폰트를 적용했다. 크림지 명함 사이즈로 설정을 바꿨다. 화면에 흰 직사각형 안에서 세 글자가 나타났다.

한결은 화면을 봤다.

「오서하」

세 글자가 선명했다. 작은 명함 안에서, 고른 폰트가 그 이름을 아주 조용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담고 있었다. 한결은 이 작업을 수천 번 했다. 이름을 입력하고, 폰트를 맞추고, 출력 미리보기를 확인하는 것. 매번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잠깐, 0.5초 정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유는 몰랐다.

"미리보기 확인하실래요?"

한결이 모니터를 여자 쪽으로 살짝 돌렸다. 여자가 카운터를 돌아와 화면 앞에 섰다.

화면 속 「오서하」를 봤다.

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봤다. 오래 봤다. 한결이 결제를 안내하려고 입을 열기 직전까지— 여자의 입술이 약간 움직였다가 멈췄다. 뭔가를 말하려다가 닫은 것이었다. 그 대신에 나온 말은—

"…뭐, 그냥요. 이대로 출력해주세요."

뭐가 그냥이고, 뭐가 그냥이 아닌지. 한결은 묻지 않았다. 물어야 할 말인지도 알 수 없었고, 알았어도 물을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인쇄 버튼을 눌렀다.

명함 인쇄기가 웅— 하는 소리를 냈다. 크림지 한 장이 천천히 나왔다. 따뜻한 미색의 종이 위에서 「오서하」라는 이름이 인쇄되어 나오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사 초였다.

한결이 집게로 집어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가 받았다. 두 손으로. 명함을 들고, 내려다봤다.

인쇄소 카운터 위, 여자가 두 손으로 작은 명함 한 장을 들고 내려다보고 있고, 크림색 종이 위에 '오서하' 세 글자가 새겨진 장면

가게 안에는 라디오 소리만 낮게 흘렀다. 기름 냄새와 종이 냄새가 섞인 공기. 형광등이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빛으로 켜져 있었다. 여자는 한참 동안 그 명함 한 장을 손에 들고 있었다.

"얼마예요?"

"천오백 원이요."

여자가 위를 올려다봤다. 표정이 잠깐 풀렸다.

"명함 한 장이 천오백 원이에요?"

"한 장이니까요."

"…보통은 비싸게 받지 않나요?"

"한 장 만드는 수고는 같아요."

여자가 잠깐 한결을 봤다. 한결은 영수증 프린터 쪽으로 몸을 틀었다. 대화가 어색해질 것 같으면 언제나 그랬다— 기계 쪽으로 몸을 틀고, 손을 무언가에 얹었다.

여자가 지갑에서 이천 원을 꺼내 카운터에 놓았다. 한결이 오백 원을 거슬러줬다. 여자는 명함을 지갑 안쪽 칸에 넣었다. 신중하게, 구겨지지 않게.

"…또 와도 돼요?"

질문이 나온 뒤 여자가 먼저 시선을 내렸다.

한결은 카운터 아래 서랍을 열어 영수증 한 장을 꺼냈다. 가게 이름과 주소가 인쇄된 쪽을 여자 앞에 밀어놓았다.

"영업시간이요."

월화수목금 오전 열 시에서 오후 여섯 시. 토요일은 오후 두 시까지. 일요일은 쉬었다.

여자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읽었다.

"감사해요."

그리고 나갔다.

문 달린 종소리가 한 번 울렸다.

한결은 카운터에 남겨진 주문서를 봤다. 「오서하. 명함. 1장.」 서랍에서 파일 케이스를 꺼내 주문서를 넣었다. 오늘 날짜로 적고 서랍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컴퓨터 화면에 아직 남아 있는 「오서하」 파일을 닫으려다— 멈췄다.

화면에 세 글자가 떠 있었다.

「오서하」

한결은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읽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봤다. 그러다 문득— 자기 이름을 마지막으로 소리 내어 말한 게 언제였지, 라는 생각이 스쳤다.

스쳤다가, 사라졌다. 별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파일을 닫았다.

창 밖에서 골목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전 열 시 반의 골목 소리— 리어카 끄는 소리, 누군가 전화를 받는 소리, 옆 편의점 자동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한결은 다음 작업 파일을 열었다.

그 사이 어디선가— 유리문 쪽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한결이 고개를 들었다.

유리문 너머, 골목 쪽에서 누군가가 서 있었다.

방금 나간 여자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검은 롱코트. 한 손에 서류 봉투. 유리문에 붙어 있는 두 장의 종이— 재개발 공고문과 그 위의 「오늘 영업합니다」— 를 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종이를 천천히, 아래에서 위로 읽어 올라가고 있었다.

한결은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이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리에 반사된 빛 때문이었다. 오전 빛이 정확히 그 각도로 유리에 꺾여, 바깥 사람의 얼굴을 가렸다. 보이는 것은 손가락 끝이 종이 위를 천천히 이동하는 것과, 서류 봉투를 든 손이었다.

서류 봉투 옆면에 무언가 인쇄되어 있었다.

한결이 눈을 좁혔다.

「도시정비사업 시행—」

거기까지 읽었을 때, 그 사람이 몸을 돌렸다.

문이 열렸다.

낡은 인쇄소 유리문 앞, 오전 빛이 유리에 꺾이는 사이로 서류 봉투를 든 인물의 실루엣이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종소리가 울렸다.

들어온 사람은 여자였다. 삼십대 후반, 혹은 사십대 초반. 검은 코트는 아까 온 여자와 비슷했지만, 그 위에서 뭔가가 달랐다— 자기 공간을 얼마나 차지해도 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의 움직임이 달랐다. 서울시 도시정비과 로고가 찍힌 서류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가게 안을 한 번 둘러봤다.

눈이 카운터 위 샘플북에서 멈췄다.

정확히 0.5초.

그러고는 한결에게 시선이 왔다.

"활자사 대표시죠?"

말끝이 깔끔하게 잘렸다. 감탄도 의문도 아니었다. 사실 확인이었다.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운터 뒤에서, 기계 쪽으로 몸이 반쯤 돌아갔다.

"잠깐요."

입버릇처럼 나왔다. 말을 막는 것도, 기다리라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자기가 준비될 때까지 벌어두는 0.5초였다.

여자는 기다렸다. 서류 봉투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한결이 그것을 봤다.

봉투 위에 이 건물의 주소가 인쇄되어 있었다.

"사업 안내 드리러 왔습니다."

여자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사과도 없었고, 미안함도 없었고, 그렇다고 냉정함을 일부러 드러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일을 말하는 목소리였다.

한결은 서류 봉투를 한 번 봤다가, 카운터 위 샘플북을 봤다가, 여자의 얼굴을 봤다.

그 찰나에 한결은 이것을 눈치챘다— 이 여자가 샘플북 앞에서 0.5초 멈췄다는 것을. 봉투를 카운터에 내려놓으면서 시선이 그쪽으로 한 번 더 갔다는 것을.

업무상 온 사람이 샘플북을 두 번 보는 이유는 없었다.

한결은 서랍을 열었다. A4 한 장을 꺼냈다. 여자 앞에 밀어놓으려다— 멈췄다.

이번엔 주문서가 아니었다. 꺼낸 것은 빈 종이였다.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한결이 빈 종이를 카운터 위에, 서류 봉투 옆에 나란히 놓았다.

두 종이가 나란히 있었다.

「도시정비사업 시행구역」 이라고 찍힌 봉투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 종이.

여자가 그것을 내려다봤다.

뭔가를 말하려다, 처음으로— 문장을 끝맺지 못하고 멈췄다.

형광등 빛 아래서, 두 장의 종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름이 없는 것들은 사라지기 전까지 아무도 모른다.

다음화 예고
2화 · 「'엄마 말고 나'를 인쇄해 주세요」
바로 이어서 볼 수 있어요.
다음화 이어보기 →
AD
📣 멤버십 가입하면 광고가 사라지고 모든 회차를 무제한으로 읽을 수 있어요. 멤버십 보기 →

💬 댓글 0

댓글을 쓰려면 로그인하세요.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