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봉쇄 조항, 혹은 당신이 빠뜨린 한 가지
새벽 네 시의 기록실은 항상 고요하다. 정확히는, 고요한 척한다.
세리아 아스트렌은 촛불 하나를 중심으로 앉아 오늘 밤 세 번째로 같은 문장을 고쳐 썼다. 손가락에 잉크가 번졌다—검고 깊게, 피부의 결을 따라 실핏줄처럼 번져서, 세 번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세리아는 네 번째로 손을 닦지 않았다. 닦을수록 번진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거짓말이 그런 것처럼.
목격자: 없음.
다섯 글자. 거짓말치고는 지나치게 단순했다. 단순한 거짓말이 제일 위험하다—의심받을 여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도 믿게 되어서.
세리아는 깃털 펜을 내려놓고 왼손 검지의 은반지를 천천히 빼 손바닥 안에 쥐었다. 반지의 차가운 온도가 손금 위에 정착했다. 이 방에서 정직한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감추려는 충동, 그리고 그 충동이 만들어내는 열기. 금속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차가운 것은 차갑다고만 말한다.
카엘 베르나.
폐위된 황태자. 이 제국의 하늘에서 지워진 이름. 성도(星圖)에서 지운 별처럼—지웠다고 해서 그 자리의 어둠까지 지워지지는 않는.
그가 낙하 좌표 정중앙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세리아의 머릿속에서 깜빡였다. 별처럼. 꺼질 것 같다가 꺼지지 않는 별처럼. 충격이 가시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 자체보다—그가 왜 거기 있었는지를 아직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왕관별의 낙하 좌표는 기밀이다. 천문대 외부로 유출된 적이 없다. 세리아 자신도 그 좌표를 관측 당일 오전에야 산출한다. 그런데 그는 그 전날 밤, 아무런 예고 없이, 정확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것은 운이 아니다.
운이라고 부르기엔 그의 눈빛이 너무 고요했다.
세리아는 은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끼웠다. 차갑게. 천천히. 체온이 금속에 서서히 배어드는 것을 느끼며—그것이 협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차가운 것과 따뜻한 것이 서로를 잠식하는 시간. 누가 먼저 상대방의 온도로 변하는가.
내일 아침 여섯 시. 그가 온다.
준비해야 했다.
아침 안개가 천문대 첨탑을 반쯤 집어삼킨 시각, 카엘 베르나는 정확히 약속한 시간보다 삼 분 일찍 기록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세리아는 그 삼 분을 파악하는 데 이십 초가 걸렸다.
문이 열리기도 전이었다. 복도 끝 유리창—안개에 절반쯤 흐려진—에 그림자 하나가 비쳤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 문을 두드리지도, 발소리를 내지도 않고 그냥 거기 서 있는 그림자. 세리아는 그 정지를 읽었다. 이십 초. 찻잎이 우러나는 속도로 정확하게.
삼 분 일찍이라는 것은 단순한 조급함이 아니다. 일찍 도착한 자는 상대가 준비를 마치기 전의 공간을 보게 된다. 단추를 잠그는 손, 서류를 정리하는 순서, 숨을 고르는 간격—그 미완성의 순간들이 전부 정보가 된다. 삼 분은 그것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세리아는 다섯 시 오십 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찻잔 두 개. 자신의 자리 앞에 하나, 맞은편에 하나. 자리 배치는 이미 구도였다—자신이 창을 등지고, 그가 아침 빛을 정면으로 받도록. 심문관과 피심문인의 구도가 아니라 주인과 손님의 구도처럼 보이지만, 실은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구도. 빛을 등진 쪽이 상대의 표정을 읽는다. 빛을 받는 쪽은 자신의 표정을 숨기기 위해 에너지를 쓴다.
세리아는 등을 창에 기대듯 곧게 세우고, 찻잔에 손을 얹은 채 기다렸다.
이십 초가 지났다. 그림자가 움직였다. 문이 열렸다.
카엘 베르나는 세리아가 기억하는 것보다 낮에 보니 더 선명했다.
어젯밤 별빛 아래에서는 그저 날카로운 윤곽이었는데—지금은, 그 날카로움이 각도마다 달랐다. 옆에서 보면 무관심하고, 정면으로 보면 모든 것을 꿰뚫는 것 같고, 아주 잠깐 시선을 비끄러 보면 무언가를 치밀하게 계산하는 것 같은. 세 개의 얼굴을 동시에 가진 사람처럼. 어느 것이 진짜인지, 혹은 셋 다 진짜인지 판별하려면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했다.
그가 들어서며 기록실 전체를 단 한 번의 시선으로 훑었다. 서가의 배열, 창문의 위치, 세리아의 손, 그리고 찻잔 두 개의 위치까지. 그 시선의 궤적이 너무 정밀했다—서가를 볼 때 멈추는 위치, 창문의 각도를 가늠하는 방향, 찻잔을 확인한 뒤 세리아에게 돌아오는 속도까지. 세리아는 그 경로를 정확히 추적했고, 그 경로가 자신이 설계한 구도를 읽고 있다는 사실에 손가락 끝이 잠시 굳었다.
그는 함정을 알아봤다. 그 위에 걸어 들어오면서도.
"영애께서 직접 차를 준비하셨군요."
카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중한 어법. 그러나 그 안에 무언가가 봉인되어 있었다—단어들 사이의 밀도가 달랐다. 직접이라는 단어가 특히. 시녀를 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파악했다는 뜻이고, 그것이 왜인지도 이미 짐작했다는 뜻이었다.
"시녀를 들이는 것은 오늘 대화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세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말했다. "앉으십시오, 황—"
"베르나입니다." 그가 부드럽게 끊었다. 날을 세우지 않고, 그러나 정확하게—봉합하듯이. "황태자라는 호칭은 폐위와 함께 반납했으니까요. 과분한 예우는 사양합니다."
과분한.
세리아는 그 단어를 머릿속에서 한 번 뒤집었다. 과분하다는 말은 자신이 마땅히 받을 것 이상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겸손의 언어처럼 보이지만 실은 역설이다—그 말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받을 것과 받지 않을 것을 이미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가 지금 거부한 것은 호칭이고, 호칭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는 내가 그를 황태자로 묶어두려 한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다.
황태자로 부르는 동안 그는 폐위된 자였고, 세리아는 그 위에 있는 자였다. 그 구도가 그에게도 보였다.
"베르나 경." 세리아는 한 박자도 틀리지 않고 수정했다. 흔들리지 않게. "그럼 본론으로."
세리아는 준비한 문서 한 장을 책상 위에 밀어냈다. 손가락 두 개로—미는 것인지 건네는 것인지 모를, 애매하게 계산된 각도로. 줄 테니 가져가라는 것도 아니고, 같이 보자는 것도 아닌, 그 경계선 위에 정밀하게 놓인 몸짓.
"어젯밤 일에 관한 제안입니다. 당신이 본 것을 본 것으로 기록하지 않는 대가로, 천문대 제3열람구역 출입권을 제공합니다. 제국의 어느 귀족도 발을 들인 적 없는 자료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또한—"
"또한?"
목소리가 끊어 들어왔다. 재촉이 아니라 확인이었다—그 뒤에 무엇이 오는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 확인하는 방식으로.
세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당신의 현재 신분은 이 제국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천문대는 예외입니다. 귀족 사교계에서 당신을 조우할 경우, 저는 천공 천문대 별지기 가문의 이름으로 당신을 '연구 자문관'으로 소개할 것입니다. 제국 귀족들은 별지기 가문의 인맥을 함부로 캐묻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는."
마지막 다섯 글자는 한계를 명시한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는. 다른 자리에서는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 카엘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안개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만 흐릿하게 존재했다.
카엘은 문서를 집어 들었다. 읽었다—정확히는, 읽는 척했다. 아니, 세리아는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문서를 내려다보는 동안 그의 표정은 완벽하게 닫혀 있었다. 닫혀 있다는 것조차 표정이 없는 게 아니라 닫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였다. 문서를 읽으면서 읽지 않는 것인지, 읽지 않는 척하면서 읽는 것인지—판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세리아에게는 없었다.
그가 오른손 소매의 잘린 단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었다.
세리아는 그 동작을 놓치지 않았다. 어젯밤에도 한 번 봤다. 무의식적 습관이다. 이미 생각이 시작되었다는 신호—그것도 심하게.
"제3열람구역." 카엘이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왕관별 낙하 기록 원본이 있는 곳이군요."
세리아의 몸이 0.2초 경직됐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경직됐다.
"……열람구역의 소장 목록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공개되지 않는다고 존재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카엘이 문서를 내려놓으며 비로소 세리아를 바라봤다. 직접적으로. 창에서 들어오는 빛이 그의 눈 위로 떨어졌다—그 빛 속에서 그는 전혀 눈을 찌푸리지 않았다. "영애께서는 제가 그 기록들을 보기를 원하십니까, 원하지 않으십니까."
이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세리아는 즉각 분류했다. 탐색. 그것도 아주 정교하게 설계된 탐색—두 개의 선택지를 나열하면서 실제로는 세 번째 선택지를 가리키고 있는. 세리아가 원한다고 해도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대답이 무언가를 드러낸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탐색입니다." 세리아는 눈을 정확히 0.5초 더 그에게 고정했다. "저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제공합니다. 열람구역 출입과 신분 보호. 그 대가는 침묵. 단순한 교환입니다."
"단순하군요." 카엘이 낮게 중얼거렸다.
단순하다는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단순하다는 것은, 빈틈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그가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내려놓았다. 그 일련의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마치 이 기록실이 이미 익숙한 공간인 것처럼.
"조건들을 검토했습니다."
세리아는 등을 곧게 세웠다.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자세.
"열람구역 출입권은 수락합니다. 신분 위장은—유용하겠군요." 카엘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창에서 들어오는 빛이 그의 옆얼굴을 훑으며 지나갔다—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정확히 그의 광대뼈를 가로질렀다. "그런데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세리아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빠졌다.
그녀가 빠뜨린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녀가—세리아 아스트렌이—사흘 밤을 이 협약의 조항들을 설계하는 데만 쓴 그녀가. 가능한 변수를 열두 가지 시나리오로 나누고, 각각의 반박에 대한 재반박을 준비한 그녀가. 빠뜨렸다는 뜻이다.
손 안에서 반지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아니—반지가 식은 것이 아니라 손이 식었다.
"……무엇이 빠졌습니까."
목소리는 관리됐다. 완벽하게. 그러나 물어본 것 자체가 이미 그의 페이스였다.
카엘은 서두르지 않았다. 소매의 잘린 단을 한 번 더 훑었다. 찻잔의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가 놓았다. 마침내—마치 그 침묵의 무게를 충분히 쌓았다고 판단한 것처럼—입을 열었다.
"영애께서는 제가 침묵하는 대가를 제공하셨습니다." 그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강이 깊을수록 소리가 없는 것처럼. "하지만 저는 이미 어젯밤에 침묵을 선택했습니다. 대가를 받기 전에. 협약이 존재하기도 전에. 그것은 계약이 아닙니다, 영애."
그가 세리아를 바라봤다. 시선이 바뀌었다—아까까지는 수평이었는데, 지금은 미세하게 내려왔다. 아니, 올라왔다. 세리아는 그 방향을 판별하지 못했다.
"그것은 제가 먼저 건넨 것입니다."
0.5초.
세리아는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았다—정확히는 쉬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0.5초가 너무 길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카엘도 알 것이다.
"따라서."
카엘이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손도 움직이지 않고—단지 무게중심만 조금 앞으로 이동했을 뿐인데, 그 작은 이동이 기록실의 공기를 압축시켰다. 세리아와 그 사이의 거리가 물리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는데 좁아졌다.
"저는 침묵에 침묵을 받겠습니다."
세리아는 눈썹이 0.1밀리미터 올라가려는 것을 눌렀다. "무슨 의미입니까."
"별이 꺼질 때마다." 카엘이 말했다. 가볍게. 너무 가볍게—무거운 것을 가볍게 말하는 사람 특유의 방식으로. "영애께서도 제게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잠깐 멈췄다. 그 멈춤의 길이가 정확했다.
"다음 번에 별이 꺼지면, 저도 그 자리에 있겠습니다."
세리아의 심장이 한 박자 비틀렸다.
비틀렸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감각. 박자가 하나 건너뛰는 것도 아니고 빨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리듬이 잠깐 그 자신을 잃은 것 같은.
다음 번에도. 현장에.
그것은 협약 조항이 아니었다. 조항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개인적인 무게를 가졌다. 그러나 제안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선명하게 일방적이었다.
"그것은." 세리아는 목소리를 관리했다. 완벽하게. 결함 없이. "당신이 저를 감시하겠다는 말입니까."
"과찬이십니다." 카엘이 미소를 지었다.
정확히 미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세리아는 판단하지 못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는. 미소는 얼굴로 짓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완성되는데, 그의 눈은 웃지 않았다. 웃는 것을 거부한 것인지, 애초에 그런 것을 하지 않는 눈인지.
"혹은 그렇게 들리도록 설계한 말씀이시거나."
그가 덧붙였다. 세리아가 방금 한 말이 감시라고 단정한 것인지, 아니면 감시처럼 들리게 만들어서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 가리려 한 것인지를—다시 탐색하면서.
"저는 단지." 카엘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천천히—그리고 그 천천함이 전혀 다른 질감이었다. "영애 혼자 감당하기엔 밤하늘이 너무 넓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안개가 창유리 밖에서 움직이는 소리. 촛불이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 그리고 세리아의 폐가 공기를 들이마시는 소리—그것만이 이 방에 존재했다.
세리아는 반지를 빼지 않았다. 빼지 않기 위해 왼손을 무릎 위에 꾹 눌렀다. 반지의 차가운 테두리가 손금 위에서 선명하게 버티는 것을 느끼면서.
그가 무서운 이유는 독설을 정중하게 포장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무서운 이유는—그 말이, 협박처럼 들렸다가, 순간 전혀 다른 무언가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협박이었다면 차라리 대응할 수 있었다. 협박에는 구조가 있으니까—위협과 요구와 거부의 자리가 분명하니까. 그런데 그것은 협박이 아닌 것처럼도 들렸다. 그 전혀 다른 무언가가 무엇인지—세리아는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이 실재가 되기 때문에.
"조건을 수락하겠습니다." 그녀는 말했다. "단."
카엘이 눈썹을 들었다. 아주 조금. 그 '아주 조금'이 눈에 띄었다는 것은, 그가 이 단어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세리아는 그 미세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있는 동안, 기록은 제가 합니다. 당신은 보기만 합니다."
"물론입니다." 카엘이 답했다. 쉽게. 너무 쉽게.
그 순순함이 더 불안하다.
싸우지 않았다. 조율하지 않았다. 단지 수락했다—마치 그 조건이 자신이 원래 원하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처럼.
세리아는 문서 아래쪽 서명란에 깃털 펜을 댔다. 잉크가 양피지에 스며들었다. 번지지 않게—정확하게—선명하게. 그녀의 이름이 적혔다. 세리아 아스트렌, 천공 천문대 제9대 별지기 영애.
카엘은 서명하지 않았다. 문서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서명란이 있습니다." 세리아가 말했다. 깃털 펜을 내려놓으며. 그것을 그에게 밀지 않고.
"저는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세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0.5초보다 빠르게—반응이 너무 빨랐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카엘이 그녀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시선이 한 겹 더 내려온 것 같았다—아니, 아까와 같은 시선인데 세리아 쪽이 무언가를 더 허락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차이를 판별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를, 세리아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계약은 문서가 아니라 선택으로 맺습니다, 영애."
카엘이 말했다. 낮고 고요하게—그러나 그 고요함이 이번에는 달랐다. 처음의 고요함이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고요함은 거리를 없애는 것이었다.
"저는 오늘 여기 왔습니다. 그것이 제 서명입니다."
세리아는 그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반박하고 싶었다. 계약이란 문서로 봉인되어야 효력이 있고, 증인이 있어야 하며, 조항이 명시되어야 하며, 양측의 서명이 있어야 한다고—그 네 가지를 순서대로 말하고 싶었다. 그 말들이 혀끝에 있었다.
그런데 꺼내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이 협약은 처음부터 문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어젯밤 낙하 좌표 한가운데서—그가 거기 서 있었고 세리아가 거기 도착했을 때—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그 순간 어느 쪽도 서명하지 않았지만, 둘 다 무언가를 선택했다. 세리아는 기록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고, 카엘은 말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문서가 없는 계약이 이미 그 자리에서 체결된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세리아는 문서를 준비했다. 봉인하려고. 명문화하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는 봉인을 거부했다. 문서 밖에 있기를 선택했다. 문서 밖에 있는 것은 조항으로 구속할 수 없다.
카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조급하지 않게—이 방에서 이미 충분히 오래 있었고 이제 가도 된다는 것을 스스로 결정한 것처럼.
"제3열람구역 열쇠는 내일 제공하시면 됩니다. 오늘은." 그가 기록실 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췄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별이 언제 꺼집니까."
세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0.5초. 1초. 2초.
카엘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리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것도 제가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중 하나겠군요." 그가 말했다. 문손잡이에 손을 얹으며. "그럼—다음에 봅시다, 영애."
문이 닫혔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닫은 것이었다.
세리아는 문이 닫히고 삼 초가 지나도록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등을 창에 기댄 채,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깃털 펜이 잉크 자국을 남긴 서명된 문서를 바라보며.
그 삼 초 동안 그녀의 뇌는 방금 일어난 일을 역순으로 분해하고 있었다.
카엘은 신분 위장과 열람구역 출입을 수락했다. 예상 범위였다.
카엘은 다음 번 별이 꺼질 때 함께 있겠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예상 범위 밖이었다—그러나 수락했다. 세리아가.
카엘은 서명하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반박하지 못했다. 세리아가.
세 가지 예상 밖의 사건 중 두 가지에서 세리아가 흔들렸다.
그러나—더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더 문제는.
그가 제안하기 직전—별이 꺼질 때마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이었다.
별이 꺼질 때마다. 복수형.
그것은 한 번 꺼진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꺼진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세리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알려줄 이유가 없었고, 알려줄 방법도 없었다—왜냐하면 왕관별이 세 번 꺼진 것은 공식 기록에 없기 때문이다. 세리아가 전부 단일 사건으로 조작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는 알고 있었다.
세리아의 손이 천천히—아주 천천히—반지를 빼 손바닥 안에 쥐었다.
그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
별이 꺼진 횟수를. 낙하 좌표가 기밀임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그녀가 사흘 밤을 들여 설계한 협약의 빈틈을 단번에, 정확히 짚어냈다는 것을.
세리아는 이 협약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쥔 척을 하도록 허락받은 것인가.
찻잔에서 김이 가늘게 피어올랐다. 식어가는 중이었다. 카엘이 한 모금만 마시고 내려놓은 그 찻잔—그 한 모금의 흔적이 세리아의 시야 안에 남아 있었다. 잔을 비우지 않았다. 비우지 않은 채 두고 갔다. 이 자리에 무언가를 남기고 간 것처럼.
세리아는 반지를 다시 끼지 않았다.
끼지 않은 채로—빈 서명란을 바라봤다. 그녀의 이름 옆에서 카엘의 이름이 없는 자리가. 없다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그 빈 자리가 무게를 가진 것처럼 그녀의 시선을 당겼다.
그리고.
세리아 자신도 모르게—아주 짧게, 입술 끝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찰나였다. 0.3초. 그녀가 이 싸움에서 처음으로 웃은 것이—뒤처진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세리아는 아직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그가 그녀를 인질로 삼은 것이라면, 인질은 협약에 조항을 추가하지 않는다. 인질은 문서 서명을 거부하지 않는다. 인질은 다음에 봅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인질에게 다음은 인질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니까.
카엘 베르나는 그녀를 인질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파트너로 삼았다.
그 차이가 왜 이렇게—불안하면서 동시에, 불안과는 전혀 다른 어떤 감각인지를. 세리아는 아직 이름 붙이지 않기로 했다.
이름 붙이는 순간, 그것이 실재가 되기 때문에.
아직은.




